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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사는 프로듀서-487화 (488/601)

487화 새로운 루트 (2)

“왜지?”

한시아는 거울을 노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눈도 크고, 눈망울도 촉촉하고, 코도 예쁘고, 입술도 앙증맞고…… 어디 가서 꿇리진 않는데?’

꿇리지 않는 수준이 아니었다.

미모로는 국내에서 손에 꼽히는 여배우 중 하나이고.

특유의 밝고 여우같은 성격으로 남심을 후려치고 다니는 게 바로 한시아였으니까.

실제로 유나희보다 활동 경력은 짧지만, 남자 연예인에게 고백 받은 횟수는 훨씬 더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솔직히 말해서 자존심이 상한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갖지 못했던 건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물건은 물론이고, 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까지도.

그렇기에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허나, 지금 상황에서 변하지 않는다면, 강준수의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건 자명한 사실.

‘유나희처럼 해야 되나……?’

그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다가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러고 싶진 않아.’

사랑받더라도 한시아 자신으로 사랑받고 싶지, 누군가를 따라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게다가 유나희한테 꿇릴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분명한 건 강 PD님도 나한테 흔들린 적이 있다는 사실이야.’

그에게 직접 들은 건 아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막무가내로 들이댈 수는 없는 노릇.

우선은 변화가 필요했다.

“어떻게 해 드릴까요?”

한시아의 이러한 결심을 알 리 없는 헤어 디자이너는 평화로운 얼굴로 다가왔다.

“언니.”

“네.”

“저 염색하려고요.”

“뿌리염색이요?”

헤어디자이너는 늘 그렇듯 익숙하게 머리를 만졌다

“아직 뿌염할 시기는 아닌 것 같은데.”

“아니요.”

한시아는 결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색 바꿔 보려고요.”

“정말요?”

헤어디자이너는 화들짝 놀라 눈을 땡그랗게 떴다.

“촬영 들어가요?”

“아니요. 그냥 기분전환.”

“흠…….”

그녀는 한시아의 머리를 찬찬히 살폈다.

“시아 씨 예전에 촬영 때문에 흑발 한 번 한 적 말고는 늘 이 분홍색 아니었어요?”

“네, 맞아요. 근데 이번엔 바꿔 보려고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요. 이미지가 늘 똑같으면 안 좋잖아요. 이제 스타일 변화할 때 됐죠.”

한시아는 자신의 머리를 살피다가 결심하고 말했다.

“노란색으로 해 주세요.”

“노랑이요?”

“네. 구체적인 색깔은…….”

그녀는 잡지 속에 보이는 한 여성의 머리칼을 가리켰다.

“이렇게 해주세요.”

“이건 탈색 또 해야 되는데…… 머릿결 괜찮겠어요?”

“네. 괜찮아요.”

“음, 알겠어요.”

“아, 그리고 언니.”

한시아는 눈에 힘을 주어 헤어디자이너를 바라보았다.

“저 머리도 자를 거예요.”

“어느 정도나요?”

“짧게요.”

“어깨선 정도?”

“아니요. 단발할게요.”

“……네?”

“단발이요. 그렇다고 너무 짧은 숏컷은 아니고, 귀 밑으로 꽤 내려오는 단발이요. 어깨선과 귀 사이 정도?”

“정말요?”

이번에야 말로 헤어디자이너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헛숨까지 들이켰다.

“농담하는 거죠?”

“아니요. 진심이에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헤어디자이너는 분무기까지 내려놓고 한시아의 의자를 빙글 돌려 얼굴을 마주 봤다.

“머리카락 엄청 소중히 생각하셨잖아요. 색깔도 바꾸고 단발까지 한다니…….”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다시금 타이르듯 말했다.

“안 좋은 일 있으셨다고 충동적으로 바꾸시면 다음에 후회해요. 나쁜 일 있으면 저한테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저 비밀 잘 지키잖아요.”

헤어디자이너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혹시 실연당하셨어요?”

“아니에요.”

한시아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손을 저었다.

“기분전환이에요, 기분전환.”

“진짜 괜찮겠어요?”

“네.”

그녀는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변화를 주고 싶어요.”

“알겠어요. 그러면 염색하고 자를게요.”

* * *

감독명을 바꾸고 새로운 작품을 진행한다.

이 기조는 명확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누가 뭐라 해도 확실하게 보안이었다.

외부로 새어나가는 순간,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니까.

단순히 하루이틀 보안을 지켜줄 사람이 아닌, 프로그램이 종영하고 난 뒤를 넘어, 내가 밝히기 전까지 입을 함구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사람을 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본인이 말을 잘 지킨다고 약속을 하더라도, 실수로 술자리에서 언급을 하거나, 본의 아니게 말실수를 해버리면 요즘 시대에선 인터넷으로 금방 퍼져버리기도 하니까.

다른 스태프들을 차치해두고 우선은 PD와 작가를 먼저 구할 생각이다.

물론, 쉬운 건 아니었다.

단순히 비밀을 함구하는 것 외에도 어느 정도 업무 능력이 받쳐줘야 함께 일을 진행할 수 있으니까.

이번 상황의 특성상, 많은 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업무를 진행하는 게 아니라, 최소한의 인력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해나갈 계획이었다.

그렇기에 그 인원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강준수 사단 내부에서 데려와야 했다.

능력도 검증이 되어 있고, 외부인들보다는 내부인들이 더 안전할 테니까.

어떤 이가 좋으려나…….

“선배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몰히 하세요?”

어느새 다가온 박호중 PD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무슨 문제 있어요? 사무실 사람들을 뚫어져라 쳐다보시네.”

“아니야.”

“에이,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박호중 PD 이 녀석.

솔직히 믿을 만하긴 하다.

장난기가 많긴 하지만, 입도 무겁고 일도 굉장히 잘하는 축에 속한다.

진즉에 입봉할 만한 실력을 갖추긴 했으나, 단독 제작이라는 것에 부담을 갖고 있기에 내 곁에서 일을 더 배우고 싶다며 서브 PD로 남아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다만, 문제는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실수할 수도 있을 것 같긴 하다만…….

그렇다고 해도 이로 보나, 저로 보나 영입 1순위로 이만한 인물이 없긴 하다.

“왜, 왜 그러세요?”

박호중 PD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날 바라봤다.

“저 뭐 잘못했어요? 왜 그렇게 지그시 보세요?”

“호중아.”

“네?”

“너 비밀 잘 지키냐?”

그는 반사적으로 대답이 나왔다.

“당연하죠.”

이내 자신 있다는 듯 눈을 번쩍 뜨고 가슴을 탁 쳤다.

“제 별명이 박지퍼입니다.”

그는 입에 지퍼를 잠그듯 지이익 입술을 닫았다.

“…….”

나는 차게 식은 눈으로 녀석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더 신뢰도 사라지는 거 알지?”

“아이, 진짜라니까요. 저 대학 동기들이 박지퍼라고 불러요. 그래서 저 고민 상담도 엄청 많이 들어줬어요.”

“박 오지라퍼 아니고?”

“선배님 설마 지금 라임 맞춘 겁니까?”

“……아니다.”

“그런 것 같은데.”

“여하튼.”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너 오늘 끝나고 잠깐 남아.”

“아이, 선배님. 저 야근입니까?”

“30분 안에 보내줄게.”

“알겠습니다!”

녀석은 장난스레 거수경례를 하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쟤 믿어도 되려나.

* * *

“와, 대박.”

박호중 PD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서 날 바라봤다.

“아니, 진짜 감독명을 바꾸고 진행한다고요?”

“그래.”

“미쳤다. 우와.”

녀석은 설레는 듯 가슴팍에 손까지 올리며 싱글벙글 웃어댔다.

“너무 재미있겠다. 장난 아니겠다. 완전 떨리겠다.”

저 모습을 보니 오히려 더 걱정이 되었다.

“아니, 너 비밀 지킬 수 있겠냐?”

“당연하죠, 선배님.”

“그러니까 못 믿겠는데.”

“에헤이, 선배님. 이미 제가 알았는데 빠지면 되겠습니까?”

흠…….

그래.

이렇게 말하긴 해도 이 녀석이 어디 가서 말실수를 하는 타입은 아니니까.

“진짜 비밀 잘 지켜야 된다.”

“아이, 그럼요. 걱정 마세요, 선배님.”

박호중 PD는 들뜬 목소리를 냈다.

“그나저나 진짜 이런 건 처음 봐요.”

“뭐가?”

“기성 가수가 얼굴 없는 가수로 활동하거나 사고 친 작곡가들이 활동명을 갈아엎고 활동하는 건 봤어도, 프로듀서가 이렇게 하는 건 처음이거든요.”

“당연히 그렇지.”

일반적으로 PD들은 네임 밸류라는 게 있고,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브랜드가 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어 드라마가 흥행을 하지 못하더라도 고유의 분위기가 있기에 팬들은 있기 마련이니까.

그렇기에 다들 잘 되든, 못 되든 본인의 이름으로 쭉 밀고 가는 것이지.

물론, 사고를 친 PD들이 세탁을 하는 루트로 꿈꿀 수도 있겠지만, 누구보다 정보에 빠르고 소문에 민감한 연예인들과 그들의 소속사가 과거를 모를 리가 없다.

그러니 당연히 출연을 지양할 테고, 제작 자체가 무너지는 경우가 크지.

사실, 애초에 그 전인 스튜디오 입사부터 실패할 가능성이 더 크고.

그렇기에 프로듀서들은 새로운 감독명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아니, 아예 없다고 단언해도 과언이 아니지.

눈앞에 있는 박호중 PD 이놈이 이렇게 들뜬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지금까지 없던 일을 처음으로 하는 거니까.

“선배님.”

“또 왜?”

“저는 역시 입봉 안 하고 선배님이랑 같이 일하기를 택한 게 잘한 것 같아요.”

“갑자기?”

“선배님이랑 일하면 이렇게 유니크한 경험도 해보지 않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만……

“제가 강준수 사단 들어오면서 딱 배웠어요. 즐겁고 재밌게 일하려면 선배님이랑 일해야 됩니다.”

“됐다.”

이 자식, 나 기분 좋으라고 띄워주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재미있을 것 같아서 흥분한 것이다.

“일단 일 이야기로 돌아가서요, 선배님.”

녀석은 씨익 웃으며 물었다.

“차기작으로 뭘 준비하실 생각이십니까? 예능? 드라마? 영화? 아니면 단막극?”

“일단은 예능으로 할 생각이야.”

“아, 예능 좋죠.”

그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드라마나 영화는 일반 엑스트라 배우들 때문에라도 보안 유지가 쉽지 않겠네요.”

“그렇지. 최소한 예능은 데뷔한 연예인들만 출연하니까.”

게다가 영화나 드라마를 연출하게 되면 내 색채가 더 크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데, 지난 할리우드 영화가 흥행하며 너무 많은 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탓에 내 색채가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예능에서도 게스트라든지 여러 가지 문제점이 더 있긴 하지만, 그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다.

“플랫폼은 생각해 보셨어요?”

“우선은 큐튜브는 안 갈 거야.”

“아, 그게 좋겠네요.”

강준수 사단으로 들어가면 너무 티가 날 테니까.

“근데 TV로 편성되더라도, 제작사가 스튜디오 J로 나오면 도긴개긴 아니에요?”

“그거에 대해서는 윗선에서 다시 이야기하고 있거든. 조만간 결정 나오면 이야기해 줄게.”

“완전 초기군요.”

“너한테 처음 말했어. 네가 첫 합류자야.”

“진짜요?”

녀석은 흡족스러운 듯 반색했다.

“아, 역시 선배님과 저 사이에는 아주 특별한 라포가 형성된 게 맞았네요.”

“어려운 말 쓰지 마라.”

“옙. 흐흐흐.”

박호중 PD는 멈칫하며 물었다.

“참, 다른 작가들한테도 비밀이죠?”

“당연하지. 네 여자친구한테도 비밀이야.”

“그럼요. 저 박지퍼라니까요.”

“됐고, 보안면에서 확실한 다른 스태프들 좀 아는 사람 있어?”

“음, 우선 저희 사무실에서 찾으면 임현아 작가님도 괜찮으실 것 같고…….”

하긴, 그 작가는 안 그래도 메인 입봉할 때가 되긴 했으니 데려올 만하지.

“아! VJ팀에 성상훈 감독님도 굉장히 입이 무거우시다고 들었어요.”

“그 과묵하신 분?”

“예. 무엇보다 사람 자체가 인성이 좋으시고…….”

“너한테 저번에 술 사 주셨다고 하지 않았냐?”

“……아이, 그래서 제가 좋다고 하는 건 아니고요.”

“맞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선배님. 여하튼 성상훈 카메라 감독님 같이 작업하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래. 일단 체크해 둘게. 또 있어?”

“예전에 제가 방송국 다녔던 시절에 친했던 후배 중에 최민석이라는 친구가 있거든요? 얼마 전에 프리로 나왔는데 얘가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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