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사는 프로듀서-488화 (489/601)

488화 새로운 루트 (3)

“오랜만입니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작가들이 반가운 얼굴로 나를 반겼다.

“오셨어요?”

회의실은 널찍하지만 굉장히 한산했다.

이번에도 서브 PD를 맡아준 박호중을 비롯해 막내 PD 하나.

그리고 작가들은 총 6명.

메인 하나, 서브 둘, 막내 셋이다.

메인 작가를 맡은 오인영은 날 바라보며 물었다.

“이게 다 모인 거죠?”

“예, 맞습니다.”

인원은 조촐했다.

나를 포함해 총 9명.

“일부러 적게 뽑았습니다. 이유는 다들 아시죠?”

끄덕.

외부로 새어나가는 위험성을 최대한으로 줄이기 위해서.

“인원수가 적은 만큼 다들 고생하시겠지만, 그만큼 가장 일을 잘하시는 분들로 뽑았기에 믿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자부심을 키워주는 것이다.

일종의 명예라고 볼 수도 있고.

실제로 일당백을 하는 인원들로만 차출한 것도 사실이긴 했다.

소수로 프로그램을 꾸려나가려면 특급 에이스들만 뽑아도 부족할 테니까.

“이외에 카메라 감독님과 음향 감독님, 소품 팀 등 각종 스태프들도 최소한의 인원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많이 빡세긴 하겠네요.”

“물론, 고생하시는 만큼 부족한 인력의 수당은 더 쳐드릴 겁니다.”

그 말에 작가들의 눈이 반짝였다.

원래 일이 빡세더라도 주머니가 두둑하면 일할 맛이 나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감독님.”

오인영 작가는 조심스레 물었다.

“여기 있는 인원들이야 믿고 비밀로 할 수 있다지만, 몸집이 커지면 많이 힘들지 않을까요?”

“예. 그 사안도 고려는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믿고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검증된 인원들로 섭외를 해야겠네요.”

“네. 거기에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추가 스태프들에게는 비밀 유지 계약서도 쓰고 진행할 예정입니다.”

실제로 유출을 하기로 마음먹는다면 막을 도리가 없지만, 계약이라는 것의 무게가 조금이라도 외부로 새어나가는 걸 막아줄 테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계약서를 쓴다는 건 일반 스태프들에게 부담스럽긴 하겠지만, 다른 일에 비해 수당을 많이 쳐주는 만큼 불만이 나올 리는 없을 테지.

“다만, 문제는 출연진입니다.”

“고정 출연자들은 본인들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함구하겠지만… 추가 스태프들이 문제겠네요.”

“예. 맞습니다.”

배우 한 명이 출연한다고 하면, 단순히 그 사람만 오는 게 아니라, 담당 매니저부터 시작해서 스타일리스트 혹은 그 상위 포지션 등 다른 스태프들까지 추가로 붙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면 PD님.”

막내 작가 하나가 손을 들며 물었다.

“강 PD님이 가면 같은 걸 쓰고 진행하는 건 어때요? 아예 정체를 숨기는 거죠.”

“티가 많이 날 겁니다.”

“맞아.”

옆에 있던 오인영 작가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맞장구를 쳤다.

“우리 감독님이 보통 유명인사가 아니잖아. 키도 크고 목소리도 이미 다 알려져서 단번에 알아볼 거야. 오히려 더 어그로가 심할걸.”

“아아, 그러겠네요.”

나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고정 출연진으로 진행을 하고, 게스트는 특집 때만 초대하는 방향으로 하려고 계획 중입니다.”

“네. 그게 좋을 것 같네요.”

“그러면 아예 안전하게 스튜디오 예능으로 가나요?”

“아니요.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스튜디오 예능은 제 주력 장르가 아니기도 하고, 또 제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더라고요.”

“야외 예능이면 시민들이 알아볼 염려가 너무 크지 않나요?”

“예. 그래서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 야외에서 아예 장소 하나를 섭외해서 쭉 가는 거죠.”

“아, 돌아다니는 게 아니고요?”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지방에 있는 시골집 하나를 섭외해서 거기서 며칠 동안 찍는 거죠.”

“시즌제 느낌이 좀 나겠네요.”

“그렇죠.”

그렇게 하면 외부로 유출될 염려도 적고, 야외 예능 특유의 현장감까지 뽑아낼 수 있을 테니까.

“진짜 많이 생각하셨구나.”

작가들은 순수하게 감탄을 토해냈다.

“저희가 염려했던 부분까지 다 고려를 하셨네요.”

“그럼요. 이렇게 정체를 숨기고 하려는데, 쉽게 가려고 하면 금방 들키겠더라고요.”

“그건 맞죠.”

오인영 작가는 눈을 빛냈다.

“확실히 재미있을 것 같긴 해요. 정체를 숨기고 진행할 때도 재밌지만, 나중에 이 프로그램의 PD가 감독님이라는 것까지 밝혀졌을 때 그 반응… 생각만 해도 벌써 흥미롭네요.”

“그러니까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프로그램이 흥해야 그런 맛이 더 살지 않겠어요?”

“네, 맞아요.”

그때 서브 작가 하나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그나저나 PD님.”

“네?”

“프로그램 촬영 자체는 비밀로 진행하더라도 저희가 매번 여기에 모여서 회의를 하면 회사 내에서도 퍼지지 않을까요?”

오인영 작가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무리 저희 강준수 사단 멤버들이라고는 해도, 아는 사람이 많아지면 위험하잖아요.”

“네. 그거 관련해서는 제가 박호중 PD한테도 살짝 이야기했었는데, 조만간 다른 조치가 있을 겁니다. 윗선과 논의 중이니까 해결되기 전까지 당분간만 이곳에서 회의를 하고, 이후엔 적절한 방안을 찾아볼게요.”

“알겠습니다.”

일단 전체적인 계획은 이 정도로 마무리.

다음으로는 프로그램의 틀을 설명했다.

“제가 구상한 건….”

내가 어느 정도 윤곽은 잡아두었기에 천천히 세부 기획만 짜면 될 터.

프로그램 내용에 대해서는 간단한 설명을 마치고, 다음 파트로 넘어갔다.

“참, 선배님.”

박호중 PD는 손을 번쩍 들었다.

“혹시 저희 메인 PD가 어떤 이름으로 갈지 정하셨습니까?”

“그건 아직이야.”

강준수라는 이름이 아닌, 가명을 쓴다는 것만 정해두었다.

박호중 PD는 기다렸다는 듯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럴 줄 알고 제가 기똥찬 것 하나 준비했죠.”

저 표정을 보니, 뭔가 야심찬 걸 가져온 모양인데.

“요즘 엄청 유행하는 건데, 혹시 애너그램이라고 들어보셨어요?”

“그게 뭔데?”

“서브 닉네임 같은 걸 정할 때 쓰는 건데, 이름을 철자 하나씩 쪼개어서 재조합하는 일종의 말장난이에요.”

“자세히 좀 설명해볼래?”

“그러니까 선배님으로 예를 들면, 강준수니까 ㄱ, ㅏ, ㅇ, ㅈ, ㅜ, ㄴ, ㅅ, ㅜ 이런 식으로 자음과 모음까지 다 분리한 다음에 다시 재조합하는 거죠.”

“그거 괜찮은데?”

“그렇죠?”

박호중 PD는 눈썹까지 들썩이며 덧붙였다.

“선배님은 이번 프로그램을 평생 비밀로 할 게 아니라, 언젠간 공개하게 될 텐데 그때 더 임팩트가 세질 테고요.”

“어, 맞아.”

작가들도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같이 한 번 짜볼까요?”

“좋죠.”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글자를 짜내기 시작했다.

“한글로 글자 제한이 있으면 영어로 해도 되는데, Kang Jun Soo 맞죠?”

“어, 맞아.”

“Jonson Aug. 어때요? Aug는 Augutus를 줄인 거라서 스윽 늘려도 되거든요.”

“음, 괜찮은데, 아무래도 영어 이름은 더 어그로가 많이 끌릴 것 같아.”

“하긴, 안 그래도 요즘 중국 자본 들어오고 있어서 예민하죠.”

“그러면 그냥 한글로 할까요?”

“그러자.”

그때 막내 작가 하나가 손을 들었다.

“우주가사 어때요?”

“그게 나와? 모음이 4개인데.”

“정확히는 ‘우주갓’인데 ㄴ(니은)이 하나 남아서 이건 모음 ㅏ랑 비슷해서 바꿔봤어요.”

“별로야.”

너무 어렵고 복잡할 것 같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조합해봤는데….”

꽤 간단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단순히 재조합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름 같은 단어가 나와야 하는데 그게 생각보다 어려웠으니까.

한참을 끄적이던 끝에 박호중 PD가 다시 손을 들었다.

“선배님 이름 ‘장수’ 어때요?”

“장수?”

그럴 듯하다.

실제로 주변에서 한 번은 들어본 이름이니까.

“근데 그러면 성이….”

“조금 특이해요. ‘군’ 씨요.

“군장수?”

“예.”

“…군밤장수 같은데.”

“괜찮은 것 같지 않아요?”

“그나마 이게 가장 이름 같긴 하다만. 실제로 군 씨가 있나?”

“검색해 보니까 소수지만 있긴 있어요.”

“그래?”

더 고민해 봤자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사실 어떤 이름이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강준수가 아닌, 낯선 이름이라는 게 핵심이니까.

그런 점에서 저런 독특한 이름이면 오히려 시청자들에게 새롭게 각인되고 좋지, 뭐.

“그러면 군장수로 가자.”

“예, 군밤장수 PD님.”

“…….”

박호중 녀석을 쏘아보자, 녀석은 실실거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농담입니다.”

나는 다시금 시선을 거두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제 문제는 누구를 섭외하느냐인데, 생각해본 사람들은 있어요?”

“감독님.”

기다렸다는 듯 메인작가 오인영이 입을 열었다.

“혹시 한시아 씨 섭외 가능한가요?”

“…시아 씨요?”

그녀와의 사정을 모르는 작가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최근에 3부작 영화 촬영이 끝나서 한동안 휴식하면서 예능할 거라고 선언했더라고요.”

“그래요?”

“네. 게다가 최근에 스타일도 변화를 주는 것 같고요. 저희 쪽에서 섭외하면 그림 좋을 것 같은데.”

“음, 이번 시즌에서는 패스하고 다음번에 한 번 보도록 하죠.”

“그래요?”

의외라는 듯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새로운 이름으로는 첫 연출인데 시아 씨라는 카드를 버리기엔 너무 아깝지 않나요?”

“한시아 씨는 너무 자주 출연했잖아요.”

“식상해서 그런가요?”

“시아 씨 매력으로는 식상하기 힘들죠. 그런 것보다는 저랑 접점이 너무 많아서 시청자들이 알아챌 염려가 있거든요.”

“아, 그러네요.”

“예. 그래서 제 방송에 몇 번 출연 경력이 있는 분들은 조금 패스하려고 하거든요.”

“그러면 잭슨 킴, 임은혜, 유나희 씨 전부 패스할게요.”

그때 서브 작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서혜나 씨는 어떤가요?”

“그분은 괜찮을 것 같아요. 친하긴 한데, 게스트 한 번 외에는 같이 프로그램에 본격적으로 출연했던 적이 없거든요. 그림은 신선할 것 같네요.”

“그러면 출연진은 총 4명 정도로 생각해 봅시다. 후보 뽑아서 리스트업 한 번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

그로부터 일주일 뒤.

“말씀하셨던 출연진 후보 리스트업 해보았습니다.”

첫 방송에서는 여자 둘, 남자 둘로 총 4명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어느 정도 기본적인 캐릭터를 잡은 뒤, 게스트를 하나씩 초대하는 그림이 될 터.

“생각보다 많네.”

남자는 8명, 여자는 7명이었다.

회의에서 말했던 서혜나도 포함이 된 상태.

“그리고 저희끼리 이야기를 좀 더 해봤는데, 아무래도 섭외 과정에서 미리 밝히면 수월하긴 하겠지만, 괜히 퍼질 염려가 있어서 섭외 확정된 후에 이야기하는 게 어떨까 하거든요.”

“응. 만약에 하게 되면 혜나 씨는 내가 해도 되는데, 그 외에 섭외 전 미팅은 작가님들이랑 호중이 네가 좀 맡아서 해줘.”

“알겠습니다. 후보 한 번 보시고 천천히 말씀해 주세요.”

“작가님들이랑 네가 이 중에서 뽑은 베스트는 누군데?”

박호중 PD는 가볍게 손가락을 뻗어 하나씩 가리켰다.

“남자는 여기 두 분이고, 여자는 서혜나 씨랑….”

그의 손가락 끝은 한 여성의 프로필을 짚었다.

“이분이요.”

어……?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동공이 커다래졌다.

잠깐만.

이 여자를 뽑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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