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모르던 (4)
“홍지유?”
“네.”
“홍채린 PD가 홍지유 동생이라고?”
“전 선배가 알고 계시는 줄 알았어요.”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홍지유는 나의 과거 전 여자친구 중 하나였으니까.
홍지유.
내가 대학교 다니던 시절에 처음으로 만났던 여자친구.
물론, 회귀를 한 걸 생각하면,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지난 이야기지만…….
아무래도 고등학교 때 첫사랑이다, 뭐다 하던 애들 장난과 달리.
대학교에 들어오고 첫 연애를 했던 사람이라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았으니까.
“아니, 그럴 리가 없…….”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억 속에서 홍채린의 얼굴이 문득 홍지유와 겹쳐졌으니까.
“……아.”
“왜요?”
송지연은 조심스레 물었다.
“처음 봤을 때 어쩐지 낯이 익더라고…….”
그녀는 듣기만 해도 민망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
처음 봤을 때 어딘가 모르게 익숙해서 학교나 출신지도 물어봤었지.
홍지유와 닮아서 기시감이 들었던 것이니 당연히 겹쳤을 리가 없다.
“그나저나 너는 어떻게 알아?”
“저는 지유 언니랑 친했잖아요.”
“……아, 그래?”
그건 또 처음 들었네.
“잘 산다지?”
“그럴걸요.”
“뭐 하고 사는데?”
나는 물어 놓고 손을 저었다.
“아니다. 됐어.”
“왜요, 궁금하신 거 아니에요?”
“이제 들어서 뭐 하겠어.”
그래.
과거는 과거로 묻어 둬야지.
송지연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 저도 잘 몰라요.”
“……그래?”
“네. 저도 대학 다닐 때나 몇 번 봤었지…… 사실 선배 졸업하고 나서는 거의 학과 생활 안 했잖아요.”
아, 그랬지.
교우 관계를 포함해 학교에 적응하기 힘들어서 자퇴를 했으니, 아마 그때 연락이 끊어졌겠지.
“잠깐만.”
“네?”
“네가 알 정도면…… 홍채린 PD도 알고 있던 거 아니야?”
“그렇겠죠?”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지려 한다.
“……일부러 모른 척한 건가.”
“그럴 거예요. 괜히 아는 척해 봤자 선배만 민망하니까.”
하긴, 이야기해서 좋을 것도 없고.
“고맙기는 한데…….”
괜히 머리가 아프려고 하네.
“머 여하튼 저는 선배가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괜히 꺼내서 미안해요.”
“아니야. 미안할 필요는 없어.”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그렇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OST 관련해서 너한테 전임으로 맡겼으면 하거든.”
“정말요?”
송지연은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일정은 어느 정도 여유가 있긴 하거든. 근데 네가 스케줄이 될까 해서.”
“이제 크랭크인이라고 했죠?”
“응. 사흘 남았어.”
“몇 곡이죠?”
“지금 생각하는 건 한 10곡 정도 보고 있어.”
“촬영 일정 생각하고, 편집 기간까지 하면…… 어렵진 않을 것 같아요.”
“그러면 부탁 좀 할게.”
“저야 감사한 일이긴 한데…….”
그녀는 잠시 말을 늘이고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저 몸값 좀 비싸요.”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건 내가 얼마든지 맞춰줄게. 곡만 좋은 걸로 뽑아줘.”
“그럴게요.”
***
“안녕하세요, 감독님!”
저 멀리서 힘차게 인사를 하며 다가오는 인물은 이번 작품 ‘멸망한 세계의 생존자’의 청일점 진희성이었다.
“잘 지내셨죠?”
“그럼요. 희성 씨는요?”
“저는 오늘 컨디션 완전 좋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슴팍을 탕 쳤다.
“첫 신 자신 있습니다.”
“하하, 믿어 보겠습니다.”
마침내 크랭크인 당일.
현장은 분주하고 바쁘게 정신이 없었다.
좀비물의 특성상, 다양한 인물들이 한꺼번에 출연하는 일명 ‘떼 신’이 굉장히 많은데.
오늘도 바로 그 ‘떼 신’을 찍는 날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보안을 위해 엑스트라라고 불리는 보조 출연자들은 따로 섭외하지 않았고, 좀비를 맡은 한 명 한 명 모두 단역 배우들로 섭외했다.
“선배님.”
박호중 PD는 내게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
“미리 대비는 해뒀지만, 모이고 보니 확실히 사람이 많긴 많네요.”
“그렇지.”
스태프를 제외하고 출연진만 해도 100명 가까이 된다.
“이 정도면 보안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어쩔 수 없지.”
예능에서는 특정 인원들만 출연하기에 군장수라는 비밀을 지킬 수 있었지만.
드라마라는 작품의 특성상, 출연진이 한둘이 아니기에 보안 유지가 쉽지 않을 테니까.
“어떻게든 크랭크업까지 최대한 입단속하고, 그 이후에 빠르게 편집 돌리면서 오픈하는 수밖에 없지.”
“네. 그러면 이번 작품 방영하고 나서 공개하시는 거죠?”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군장수인 것과 SN이라는 것 모두 발표할 계획 중이다.
부디 내가 직접 공개하기 전까지 새어나가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일단 고사는 어느 정도 준비됐어?”
“예. 상은 다 차려놨고, 배우들만 다 오면 바로 시작 가능합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찍을 때는 꼭 크랭크인 전에 고사를 지내곤 한다.
나뿐만이 아니라, 이 업계 전부가 그렇다.
다른 곳보다 더 미신에 민감해서 그런지, 징크스도 많고 이런 건 꼭 해야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니까.
일반적으로는 대본 리딩이 끝나고 고사를 지내는 게 맞지만.
지난번에는 내가 검사들의 다큐멘터리 때문에 고사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어서 오늘로 미뤄뒀던 것이다.
그나마 첫 촬영이 떼 신이기에 모든 주조연 배우들이 있는 상황에서 고사를 지낼 수 있다는 게 다행일 따름.
“배우분들 다 오시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고생해줘.”
“예.”
나는 촬영장을 쭉 훑어보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정말 오랜만의 드라마라 그런지, 설레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하고.
솔직히 말하자면, 다른 감정보다도 부담감이 가장 큰 건 사실이긴 했다.
아무래도 지난번과 달리, 이번 작품은 발표 이후에 내 이름까지 공개하는 게 예정되어 있기에 어느 정도 성적을 내줘야 자존심을 세울 수 있을 테니까.
주변에는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부담감 외에도 내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작품을 만드는 이유가 하나 더 있긴 했다.
아무래도 강준수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다 보니.
작품을 온전히 작품만으로 보는 게 아니라, 외적인 요소들을 넣어서 평가하는 일이 잦아졌는데.
그렇지 않고, 순수하게 작품으로만 평가를 받고 싶었으니까.
시청자들도 그렇게 몰입해주기를 바라고 있고.
그렇기에 더욱더 성공하고 싶었다.
그래야 어부지리가 아니라, 정녕 내 실력으로 정점에 섰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
그래서 어느 때보다도 이번 작품의 흥행이 더욱 간절했다.
“PD님, PD님, PD님!”
그때 옆에서 활기찬 목소리로 나를 부르며 한 여성이 다가왔다.
안 봐도 뻔하다.
“시아 씨 왔어요?”
“네. 안녕하세요, PD님!”
목소리만 들어도 내가 기운이 다 샘솟는다.
“오늘 고사 지낸다면서요?”
“맞아요.”
박호중 PD가 바로 이야기를 한 모양.
한시아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러면 제가 첫 번째로 절해도 돼요?”
“안 됩니다.”
“아, 왜요?”
“첫 번째는 접니다.”
“아이, 뭐야.”
한시아는 웃으며 내 팔을 통 쳤다.
“그러면 두 번째!”
“아, 근데 그게…….”
그녀가 말을 하려던 그때.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데, 무슨.”
옆에서 냉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연, 주아린이었다.
“선후배 순서대로 지내야 하지 않겠어요?”
한시아도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주아린이 175cm나 되는지라, 여성 중에선 압도적이었다.
게다가 치켜 올라간 눈꼬리 때문에 인상이 장난이 아니었다.
유나희와 앙숙인 걸 생각하면, 그녀 역시 보통 센 캐릭터가 아니긴 하지.
“…….”
한시아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주아린은 다시금 날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인사가 늦었네요.”
“아, 네. 아린 씨 안녕하세요.”
“그건 그렇고 순서는 제가 말한 게 맞지 않아요?”
나는 민망하게 웃었다.
“예. 데뷔한 순서대로 가는 게 좋죠.”
자연스레 주아린이 두 번째, 한시아가 세 번째가 되었다.
“네, 그러면 준비할게요.”
주아린은 가볍게 입꼬리를 휘며 떠나갔다.
한시아는 눈에 힘을 주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오…….”
사실, 촬영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긴 하다.
여배우끼리 기싸움하는 건 예삿일이니까. 당연히 남자배우들도 그렇고.
“기싸움하지 말아요.”
“그냥 싫어서 그래요.”
한시아는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좀 별로야, 저 면도칼 아줌마.”
“……예?”
“주아린 별명이 ‘수원 면도칼’이잖아요.”
그건 또 뭔 소리람.
인상이 세긴 해도 인성이 나쁘진 않을 텐데…….
학창시절에도 특별한 논란은 없던 걸로 기억한다만.
“둘이 무슨 일 있었어요?”
나는 목소리를 낮춰서 물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대본 리딩 때 둘이 처음 보고 반갑게 인사했던 것 같은데.”
“그땐 좋은 사람인 줄 알았으니까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사람 좋은 한시아가 이렇게 반응할 정도면, 평범한 일이 아닌 것 같은데?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날 바라봤다.
“PD님이니까 그냥 말할게요.”
“네.”
“제가 말했다고는 하지 마세요.”
“그럼요, 당연하죠.”
“그러니까…….”
한시아는 말하려다가.
“에이, 아니다.”
고개를 저었다.
“괜히 제가 뒷담화하는 것 같잖아요.”
“굳이 그렇지는 않은데…….”
“그래도 PD님한테 그렇게 보이고 싶진 않아요.”
한시아는 코를 찡그리고는 숨을 들이마셨다.
“뭐, 일단…… 저 분이 선배니까 1차적으로는 제가 참을 거긴 한데…… 진짜 그 이상 건드리면 저도 못 참아요.”
“알겠어요.”
한시아는 막상 말해놓고도 후회되는지.
“괜히 PD님한테 화풀이한 것 같네.”
입술을 삐죽거렸다.
“괜찮아요. 저한테는 편하게 해도 돼요.”
“여하튼 촬영에는 문제없게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요. 조금 쉬고 있어요. 고사 지낼 때 부를게요.”
“네.”
한시아는 머리를 질끈 묶으며 자리를 옮겼다.
그 착하고 밝던 한시아가 저런 반응이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회식하면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차차 알려줄 것 같긴 한데…….
그것보다 이런 상황이면, 이번 촬영 아무래도 쉽지 않겠는데?
혼자 심각해지던 그때.
“안녕하세요, 감독님.”
아무것도 모르고 혼자 해맑은 이소현이 내게 다가왔다.
“소현 씨, 오셨어요?”
“네, 방금요.”
그녀는 끄덕이고는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여기 왜 분위기가 싸한 것 같지.”
눈을 꿈뻑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감독님,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에요.”
그녀를 보다 보니, 갑작스레 안쓰러운 느낌이 들었다.
이번 작품에는 여자 주연만 세 명이다.
수원 면도칼과 불여우.
그 사이에 낀 순수한 말티즈 한 마리.
이소현…….
잘 살아남을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