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사는 프로듀서-550화 (551/601)

매혹적이거나 당혹스럽거나 (3)

“여기 있다.”

가방 뒤편에 줄로 고정되어있는 상자를 집어들었다.

촬영 장비는 아니라서 텐트 밖에 두긴 했으나, 이 정도면 어지간한 바람에도 날아가진 않았을 것 같긴 하다.

무의식중에 나도 모르게 잘 정리해둔 모양.

그냥 두고 갈까 하다가 품에 넣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챙겨야지.

떨어지지 않게 안주머니에 잘 집어넣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치지지직.

그때 무전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님, 잘 오고 계시죠?

박호중 PD의 목소리다.

걱정이 되어서 연락한 모양.

“어, 물건 찾아서 이제 출발하려고.”

-바람 세지니까 얼른 오세요.

“그래.”

고개를 들자, 눈발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다시 조금 전에 돌아왔던 지점에 도달했을 즈음.

휘이이잉-!

바람이 점점 더 세차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수직으로 내려오던 눈송이들은 어느새 대각선으로 휘날리고 있는 상태.

옷을 몇 겹이나 두껍게 입고 있었으나, 칼바람이 불어와 살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빨리 들어가서 따끈한 물에 샤워하고 자야겠다.

몸을 움츠린 채로 얼마쯤 걸었을까.

시야가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다행히 휴대폰 GPS가 있어서 경로 이탈은 하지 않고 있는 상태.

여기서 한 10분 정도만 더 가면 숙소일 텐데…….

그런데 그때.

“……어?”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그도 그럴 것이, 시야 끝에는 커다란 형체가 서있었으니까.

덩치를 보면 사람은 아닌 것 같고.

동물인가?

김 소장도 여기서 짐승이 나온다고 했으니 가능성이 꽤나 높았다.

혹시 모른다는 몸을 낮춘 채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서서히 그들의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들소인가?

눈을 찌푸려서 자세히 살폈다.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산양이다.

정확히는 한국의 산양과는 다른 러시아 산양으로, 큰뿔양이라는 명칭을 가진 녀석들이 3마리나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다행히 바람은 맞은편에서 불어오고 있어 들키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나, 숙소로 돌아가는 정방향에 녀석들이 서 있어서 가기가 꽤나 껄끄러웠다.

아무리 초식동물이라고 해도 인간이 다가가면 위협을 느끼면 공격할 수 있으니까.

어깨 높이만 내 배꼽 가까이 되고, 덩치는 100kg을 훌쩍 넘기니…… 저 커다란 뿔에 받히면 바로 죽음이다.

돌아가야 될 것 같은데…….

사방에 시야가 확 트여있긴 했으나, 그래도 눈보라 덕분에 조금만 거리를 벌리면 보이지 않을 터.

나는 큰뿔양들을 응시한 채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

번뜩-.

큰뿔양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꿀꺽.

목울대가 울렁였다.

그럼에도 못 봤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마네킹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더니.

홱.

녀석들은 다시금 반대로 고개를 돌렸다.

“휴우.”

살았다.

조금 더 멀리 돌아가야겠는데.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두두두두두-!

큰뿔양들이 나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X발.”

X됐다.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쟤네 초식 동물이잖아?

영역 침범한 것도 아닌데…….

당황함에 머리가 굳어있던 그때.

다큐멘터리에서나 보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큰뿔양들의 뒤로 늑대 무리가 뛰어오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이런 미친.”

지금 이 광경은 현실적이다 못해 피부로 와닿을 지경.

차라리 비현실적으로 호랑이 같은 게 등장했다면 아예 믿기지도 않겠지만.

늑대는 너무나도 실제 상황이지 않는가?

다리는 본능적으로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정면으로 뛰면 녀석들한테 따라잡힐 터.

늑대는 어차피 큰뿔양을 쫓을 테니…….

나는 90도 옆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

“PD님이 올 때가 됐는데…….”

한시아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창문에는 눈보라만 몰아치고 있을 뿐, 사람의 실루엣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 생긴 거 아니겠지?’

초조하게 방에서 서성거리던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로비로 내려왔다.

물론, 로비라고 해도 건물을 개조한 터라, 일종의 식당의 형태에 가까웠기에 사람들이 모여앉아 있었다.

그녀는 두리번거리다가 저 멀리에 앉아있던 박호중 PD에게 다가갔다.

“감독님!”

“아, 네. 시아 씨.”

그는 방긋 웃으며 물었다.

“필요한 거 있으세요?”

“PD님 안 오셨어요?”

“강준수 선배님이요?”

“네.”

“아직 안 오신 것 같은데…….”

“오실 때 지나지 않았어요?”

박호중 PD는 손목시계를 보고는.

“음…… 그렇긴 하네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많이 오니까 조금 늦어지시는 것 같아요.”

“저희 여기 도착한 지, 30분이 지났어요.”

불안한 한시아와 달리, 박호중 PD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강준수 선배님께서 중간에 텐트로 돌아가셔서 조금 더 걸리실 거예요. 거리가 꽤 있잖아요.”

그는 한시아를 안심시키려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잘 오고 계실 거예요.”

하나, 한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까 PD님이 무전기 가져갔죠?”

“예, 챙겨 가셨어요.”

“그거 어디 있어요? 제가 연락해볼게요.”

“잠시만요.”

그는 바닥에 내려둔 가방에서 무전기를 꺼내들었다.

한시아는 그것을 빼앗듯 받아들어 전원을 켰다.

“PD님, 어디쯤 오셨어요?”

-…….

“PD님 들리세요?”

그에게서 응답이 없었다.

“대답 안 하는데, 문제 생긴 거 아니에요?”

그제야 무언가 잘못된 걸 깨달은 박호중 PD도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널 만지신 거 아니죠?”

“마이크만 눌렀어요.”

그는 다시금 무전기를 잡고 입을 열었다.

“선배님, 안 들리십니까?”

-…….

박호중 PD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잠시만요.”

그는 무전기를 든 채로 건물 밖으로 향했다.

한시아도 황급히 그의 뒤를 따라 나왔다.

박호중 PD는 다시금 마이크를 누른 채로 입을 열었다.

“선배님, 무전 안 들리세요?”

연신 부름에도 응답이 없자, 박호중 PD는 육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나, 사면 모두 눈보라만 세차게 내리고 있을 뿐, 강준수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에요?”

“괜찮을 거예요.”

“아니, 연락도 안 되잖아요.”

“선배님께서 무슨 일 생기셨다면, 무전하셨을 거예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박호중 PD도 영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는 다시 로비로 돌아가 사람들을 모았다.

“혹시 강준수 선배님 본 사람?”

“…….”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김 소장님은 어디 계셔?”

“밖에 담배 태우러 가신다고 들었는데.”

박호중 PD는 뜀박질하듯 빠른 걸음으로 건물 뒤편으로 향했다.

“소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강준수 감독님께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

그의 말을 듣자, 김 소장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아직도 안 오셨다고요?”

“예.”

“저한테 미리 말씀을 하셨어야죠.”

“…….”

한시아는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지금 찾으러 가야 해요.”

김 소장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까에 비해 눈은 펑펑 더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 날씨엔 무리입니다.”

“그러면 이대로 가만히 기다려요?”

“그건 아닙니다만…….”

김 소장은 쉽지 않다는 듯 스읍 숨을 들이마셨다.

“자칫하다간 저희까지 같이 조난될 수 있어요.”

“……조난이요?”

한시아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러면 지금 PD님이 조난되었다는 소리예요?”

김 소장은 대답하는 대신 박호중 PD를 향해 물었다.

“저희가 도착하고 정확히 얼마나 지났습니까?”

“36분이요.”

“아까 그 지점에서 헤어졌으니…… 아무리 늦어도 10분 전에는 도착했어야 하는데.”

“그럼 찾으러 가야죠!”

한시아는 주먹을 세게 쥐다 못해.

“저라도 갈 거예요.”

홱 돌아서며 눈보라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허나, 그 걸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안 됩니다.”

김 소장은 다급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지금 나가면 진짜 위험해요.”

한시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면 이대로 강 PD님 연락도 안 되는데 가만히 기다리라는 게 말이 돼요?”

“저희가 가겠습니다.”

김 소장은 구석에 있던 보안요원들에게 나오라는 손짓했다.

“전문가들이 나서겠습니다.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세요.”

그러나 한시아는 고개를 저으며 신발을 고쳐 신었다.

“저도 갈 거예요.”

“위험하다니까요.”

“그래도 가야 돼요.”

그녀는 간절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짐 되지 않을 테니까 데려가주세요.”

김 소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알겠습니다. 대신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돌려보낼 겁니다.”

“네.”

“그러면 바로 출발합시다.”

한시아는 비장한 얼굴로 대답하고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허억. 허어억. 허어어억.”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더 이상 내 시야 안에 동물은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면 따돌린 것 같은데…….

아니, 정확히는 따돌린 게 아니라, 도망친 것이다만.

어찌 되었든 간에 살았다는 게 중요하지.

“후우우.”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들었다.

정신을 차리니, 처음 보는 장소였다.

어디지?

일단 내 몸부터 점검했다.

한시아가 줬던 팔찌는 안주머니에 그대로 있고.

휴대폰도 있고.

다만, 문제는 달리는 와중에 무전기를 떨어뜨렸다는 것.

좋지 않은 소식이긴 하나, 그래도 치명적이진 않다.

그래도 휴대폰으로 GPS는 잡히니, 숙소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다만, 심각한 문제는.

날이 저물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이미 반쯤 저물었다.

극지방에 가까워서 그런지, 해가 순식간에 지고 말았다.

주변은 꽤나 어둑한 상태.

지금 당장이야 주변 시야가 보이기는 하나.

GPS상 베이스 캠프까지 약 4km는 떨어져있는데.

해가 저버리면 갈 수가 없다.

한국 같으면 4km는 한 시간도 안 걸리겠지만.

이렇게 눈이 쌓인 지역에서는 걷는 것도 쉽지 않아서 꽤 오래 걸릴 테니까.

가다 보면, 중간 즈음에 분명 해가 지고 완연한 어둠이 찾아올 것이다.

산짐승도 문제다.

시야가 어두워지면, 위험한 건 인간이니까.

게다가 체력까지도 이미 소모되어버린 탓에 또다시 만나게 되면 도망칠 수도 없을 터.

또한, 눈보라도 여전하고 바람도 쌩쌩 불고 있기에 숙소까지 가기엔 무리였다.

이거 아무래도 하룻밤을 보내고 내일 아침에 가야할 텐데…….

스태프들이 걱정하겠지만, 무전기를 잃어버린 지금으로서는 연락할 방도가 없었다.

일단 밤새워서 버티는 건 쉽지 않을 테고…….

어디 바람만 피할 수 있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나마 휴대폰 배터리가 여유 있다는 게 다행일 따름.

나는 지도를 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 300m쯤 움직였을까.

“어……?”

저 멀리 동굴 비스무리한 게 눈에 들어왔다.

그사이, 주변은 더 어두워진 상태.

저기로 들어가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버텨야겠는걸.

나는 그 안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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