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사는 프로듀서-565화 (566/601)

인간관계라는 건 (2)

“어머, 왜 이렇게 많이 사 왔어요?”

“너, 너무 많이 사 왔나요?”

유나희는 쩔쩔매며 몸을 움츠렸다.

“죄송해요. 냉장고에 다 안 들어가려나?”

“죄송하라는 말은 아니었고…… 음, 준수가 최근에 냉장고 하나 사줘가지고 들어갈 것 같긴 해요.”

“……그래요?”

“네. 잘 먹을게요.”

“예!”

“그나저나 나희 씨 오느라 고생 많았죠?”

“아닙니다.”

“어유, 왜 이렇게 땀을 많이 흘려요? 더운가? 그런 날씨는 아닌 것 같은데.”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외투라도 벗어요.”

“괜찮…… 아, 네. 벗을게요.”

옆에서 웃음을 열심히 참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팔뚝에 주먹을 꽂거나.

잡아먹을 듯한 살의를 뿜어내며 째려보기라도 했겠지만.

지금의 유나희는 정신이 없어서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모양.

계속 지켜보고 있는데 보통 귀여움이 아니었다.

“외투 줘.”

“……네. 아니, 어.”

그녀는 가디건을 벗어 내게 건넸다.

“저녁 아직이죠?”

“예.”

“얼른 와요. 밥 차려놨어.”

“네.”

대답이 뻣뻣하기 그지없었다.

진짜 다른 사람이 보면 얼굴만 유나희지, 속은 딴 사람인 줄 알 것이다.

어머니가 먼저 부엌으로 가신 뒤.

“가자.”

나는 유나희를 일으키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괜찮아?”

도리도리도리.

고개 젓는 속도가 마하 3에 다다를 정도다.

“밥 먹다가 체할 것 같은데.”

“조금만 먹어.”

“어떻게 그래? 최소한 한 그릇 다 먹어야지.”

“아픈 거보단 그게 나아.”

“아니야. 다 먹을 거야. 나 배고파.”

이런 데서는 또 억지를 부린다.

“먹다가 남겨도 돼.”

“알았어.”

유나희와 함께 식탁으로 향했다.

“우와, 엄청 푸짐하네요?”

갈비찜에 된장찌개, 잡채, 고등어도 모자라 간장게장까지 한정식 한 판이 차려져있었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식탁에 앉았다.

“한 3명 정도 더 불러도 되겠는데요?”

“그러면 아들 둘에 딸 하나 정도 낳으면 되겠네.”

유나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농담이에요.”

역시 부모님 세대라 애드리브 자체가 확실히 수준이 다르다.

“국 식기 전에 얼른 들어요.”

“네. 잘 먹겠습니다.”

나도 수저를 들었다.

유나희는 걱정과 달리, 씩씩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다만, 걱정인 건.

깨작깨작 먹던 평소와 달리, 잘 먹고 있다는 점.

“어머, 우리 나희 씨 정말 복스럽게 잘 먹네. 밥 더 줄까요?”

“네?”

아니, 우리 어머니…… 물어보면서 이미 손은 밥솥에서 밥공기를 고봉으로 푸고 있었다.

“어…… 네. 감사합니다.”

내가 보기엔 평소 유나희 식사량의 3배는 족히 넘을 것 같은데.

나는 그녀에게 몸을 기울였다.

“배부르면 남겨도 돼.”

끄덕끄덕.

“근데 반찬이 맛있어.”

“그래?”

그나마 다행이다.

“나희 씨 여기 갈비찜 너무 멀죠? 덜어줄게요.”

“아, 괜찮습니다. 손닿아요.”

“그래요?”

“네. 그리고…….”

그녀는 밥을 삼키고 말했다.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음, 그럴까요?”

“네. 그게 저도 편합니다.”

“그러면 그럴게.”

그렇게 몇 숟갈쯤 먹었을까.

“아들, 너도 더 줄까?”

“저 반 공기만요.”

“그래.”

반찬이 너무 많아서 아직 다 맛보지도 못했으니까.

그런데 그때.

“어?”

식사에 전념하던 유나희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왜?”

내가 물었음에도 그녀는 대답 대신.

“아까부터 얄미웠어.”

나를 향해 낮게 읊조리더니 스윽 옆을 바라봤다.

“어머님.”

“응?”

“저 하나 여쭤봐도 돼요?”

“말해.”

유나희는 젓가락을 집더니.

저 반대편에 있던 반찬 그릇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가 집은 것은 다름 아닌.

……저게 왜 있냐?

“그 이렇게 깻잎을 들잖아요.”

깻잎장아찌였다.

“가끔씩 이렇게 두 장이 겹쳐서 집힐 때가 있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옆에 여자친구가 있는데…… 완전 불여시 같은 여자애가 일부러 끼 부리면서 깻잎 두 장을 들었으면 떼어주는 게 맞아요?”

“어유, 안 되지.”

“그렇죠?”

“그럼, 당연히 안 되지.”

어머니는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젓가락이 괜히 두 짝이야?”

“그쵸!”

유나희는 눈을 크게 떴다.

“절대 안 되죠?”

“그렇게 하면 손등을 탁 때려버려야지. 여자친구가 시퍼렇게 눈 뜨고 있는데 어떻게 그래?”

“그러니까 말이에요.”

“혹시 우리 준수가 그랬어?”

“아니요.”

유나희는 스윽 날 바라봤다.

“설마 그랬겠어요?”

“에이, 준수가 그럴 리가 없지?”

“당연하죠.”

“…….”

숨이 턱 막힌다.

“아들.”

“네?”

“깻잎 좋아하잖아. 많이 먹어.”

어머니는 손수 깻잎장아찌가 담긴 그릇을 내 앞까지 끌어당겨주셨다.

“……감사합니다.”

내가 체하게 생겼네.

***

“과일 먹을까?”

“네, 좋죠.”

다행인지, 불행인지, 깻잎 이야기 이후로 유나희는 긴장이 조금이나마 풀린 것 같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고.

아직도 조금은 삐걱삐걱거리고 있는 상태.

“어머님, 제가 같이 준비할게요.”

“됐어.”

어머니는 오지도 말라는 듯 단호하게 그녀를 만류했다.

“손님이니까 앉아 있어.”

“그래도…….”

“준수야. 나희 씨 못 오게 해.”

“네.”

나는 유나희를 잡아 옆에 앉혔다.

그녀는 눈치를 보며 내게 물었다.

“가야 될 것 같은데…….”

“아니야. 진짜 괜찮아.”

“……그래?”

“응. 어머니도 그게 편하실 거야.”

“다행이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어머니는 딸기를 씻어 내오셨다.

함께 담겨있던 사과는 껍질째로 들고 왔다.

“이건 제가 깎을게요, 어머님.”

“어유, 손 다쳐.”

유나희를 말리고 내가 나섰다.

“제가 할까요?”

“됐어. 네가 하면 껍질 대신 살을 다 잘라서 사과가 반쪽이 되더라.”

“…….”

“나희 씨 얼른 먹어.”

“아, 네…….”

그래도 가만히 먹기는 영 마음에 걸렸는지, 그녀는 눈치를 보다가 과도를 집어 들었다.

“괜찮다니까.”

“제가 해보고 싶어서 그래요.”

어머니와 더불어 내가 말렸으나, 유나희는 한사코 할 수 있다며 사과를 들어올렸다.

“조심히 해. 날 가까이 잡고.”

“네.”

“그러면 나는 망고 좀 썰어올게.”

어머니는 다시 부엌으로 향하셨다.

나는 유나희를 붙잡았다.

“안 해도 돼.”

“아니, 할래.”

“……그래?”

거절해도 나서길래, 요리학원에서 배운 줄 알았다.

동그랗고 길게 깎을 줄 알았는데.

툭.

투둑.

뚝.

뚜두둑.

사과 껍질이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푸훕.”

웃음이 새어나왔다.

유나희는 땀까지 흘리며 집중하고 있었다.

“내가 깎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째릿-.

그녀는 살벌하게 날 노려봤다.

“오빠.”

“응?”

“나 지금 칼 들고 있다.”

“……미안.”

그녀는 낑낑대며 겨우 사과 두 개를 깎고 나서 탈진해버렸다.

“후아아.”

소파에 푹 기대어 쉬기도 잠시.

“어유, 예쁘게 잘 깎았네.”

어머니가 망고를 들고 돌아오셨다.

유나희는 벌떡 자세를 고쳐 잡았다.

“어유, 망고까지 고생하셨어요.”

“먹어볼까?”

“네!”

***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밤이 무르익고 있었다.

“이제 가려고?”

“예. 가야죠. 지금 출발해야 자정 전에 도착해요.”

“자고 가면 좋을 텐데.”

“죄송해요. 내일 제가 스케줄이 있어서.”

유나희가 아니라, 내 일정이었다.

드라마 공개가 임박한 시점이라, 인터뷰와 제작발표회 등 업무를 미룰 수가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지.”

그럼에도 아쉬우신지 영 발을 떼지 못하셨다.

“어머니, 다음에 놀러 올게요.”

유나희가 어머니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때는 꼭 자고 갈게요.”

“그러면 너무 좋지.”

어머니는 유나희의 손등을 쓸었다.

“딸 생긴 것 같고 참 좋네.”

“저도 너무 좋아요, 어머님.”

어머니는 아쉬운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네 아버지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야. 나 혼자라서 부족하네.”

“아니에요, 어머님.”

유나희도 이제는 더 이상 굳어있지 않았다.

“저 진짜 대접 잘 받았어요.”

평소답지 않게 그녀는 싹싹하니 잘 대해주었다.

그저 고마울 따름.

“아직도 배부르다니까요?”

“그래도 음식이 입에 맞아서 다행이네.”

어머니는 잊고 있었다는 듯.

“아, 참.”

손뼉을 치더니.

“잠깐만 기다려 봐.”

부엌에서 아이스박스를 2개 가져오셨다.

“이게 뭐야?”

“깻잎장아찌 좀 포장했어.”

“……제발 그만.”

“이제 안 좋아하니?”

“아니, 좋아하긴 하는데…….”

“어머님, 감사해요!”

유나희가 옆에서 덥석 받아들었다.

“제가 잘 챙겨먹일게요.”

“하나는 나희 씨 거니까 가져가.”

“어머, 너무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유나희는 직접 뒷좌석에 아이스박스를 잘 챙겨 넣었다.

어머니는 유나희의 팔을 쓸며 말했다.

“우리 애가 참 부족해. 여자 친구도 얼마 못 사귀어봐서 여자 마음을 잘 모를 거야.”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다 아는데.”

“나 엄마 몰래 연애 많이 했는데…….”

“거짓말 치지 마.”

어머니의 목소리는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아닌데…….”

내 말은 들은 체도 안했다.

“여하튼 잘 부탁해.”

“네. 종종 놀러올게요.”

“그래.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연락하고. 내가 보내줄게.”

“저 진짜로 전화드려도 되죠?”

“그럼. 당연하지.”

어머니는 날 바라보며 말했다.

“얼른 출발해. 늦겠다.”

“예.”

나는 그제야 운전석에 탑승했다.

창문으로 손을 흔들었다.

“저희 이제 진짜 갈게요.”

“가보겠습니다, 어머님.”

“조심히 가.”

백미러로 보이는 어머님은 우리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배웅해주셨다.

“후아아.”

유나희는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녹초가 되었다.

“고생했어.”

“아니야. 너무 잘 챙겨주셔서 감사하더라.”

그녀의 지친 얼굴을 보는데…….

나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났다.

솔직히 말해서 유나희가 낯선 이에게는 워낙 차가운 스타일이고 도도한 사람인지라 실수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무례하기는커녕, 오히려 살갑기 그지없었다.

나한테도 그랬던 적이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부드럽고 착했으니까.

“고마워.”

“고맙기는.”

그래서…….

더 좋아진 것 같다.

“눈 좀 붙여.”

“그럴까?”

이번에는 유나희도 마다하지 않았다.

“의자도 넘기고.”

“응.”

피곤했는지 그녀는 의자도 살포시 뒤로 넘겼다.

그래도 내게 미안한지, 완전히 눕히는 게 아니라 반쯤 넘어간 상태.

유나희가 잘 수 있도록 음악소리도 낮췄다.

그렇게 한 20분쯤 갔을까.

“오빠.”

유나희가 문득 입을 열었다.

“안 잤어?”

“응. 잠은 안 오네.”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우리 가족도 볼까?”

“응?”

“엄마까지는 부담스러울 것 같고…….”

“괜찮아. 나 볼 수 있어.”

“아니야. 완전 호들갑 떨 거야. 게다가 이것저것 캐물을 거라…….”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불편해.”

“그러면?”

“우리 엄마는 다음에 보고…… 내 동생이랑 같이 밥이나 한 끼 먹자.”

“그럴까?”

“응.”

“좋지. 용돈이나 줘야겠다.”

“그건 안 줘도 될걸?”

“왜?”

핸들을 부드럽게 꺾으며 물었다.

“대학생이잖아. 한창 돈 필요할 때 아닌가?”

“걔 돈 많이 벌어.”

“뭐 하는데?”

“요즘 로맨스 소설 쓰거든.”

“……그래?”

내 기억에 따르면…….

“그러고 보니 저번에 무슨 방송 웹툰 지망한다고 구경 왔었잖아.”

“근데 그림에는 소질이 없다고 소설 쓴다더라고. 방송국에서 로맨스하는 웹툰이야. 못생긴 남자 PD한테 여자 연예인들 엄청 많이 꼬이는 건가 봐.”

잘 안 팔릴 것 같은데.

“예상외로 잘 풀렸나 봐. 이번에 무슨 판권도 팔렸더라고.”

“그래? 잘됐네.”

“어쨌든 요즘 걔도 서울에 있으니까 같이 얼굴이나 한 번 보자.”

“좋아. 날짜 잡으면 알려줘.”

“응.”

나는 오른손을 뻗어 살포시 유나희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내 손을 감쌌다.

유나희의 체온이 오늘따라 더 따스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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