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쥐거나 내려놓거나 (3)
“괜찮을 것 같은데?”
걱정했던 것과 달리, 유나희는 흔쾌하게 수락했다.
“재미있어 보여.”
“진짜로?”
“응.”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어차피 우리 사귀는 건 대한민국 사람들 다 알잖아.”
“그렇긴 한데, 이게 잘못하면 커플들 관찰 예능처럼 느껴질까 봐.”
나는 민망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면 너한테 부담이 될 것 같아서 걱정했거든.”
그녀는 잔망스레 입꼬리를 휘었다.
“그 대신에 오빠가 내 거라는 낙인 찍을 수 있잖아.”
“하하하, 알았어.”
“촬영이 언제라고?”
“다음 주 수요일. 그때 너 스케줄 없지?”
“응. 없어.”
유나희는 달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날 점심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맞아.”
“알았어. 체크해둘게.”
“고마워.”
그녀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이번 프로그램은 언제까지 할지 정해진 건 아니지?”
“응. 근데 이 예능은 내가 일주일 내내 준비하는 게 아니거든.”
기획 회의와 본 촬영을 합쳐도 일주일에 사흘 정도만 집중하면 된다.
“나머지 기간 동안은 시나리오 집필할 거야.”
시간이 날 때마다 영화를 준비할 예정이다.
“그렇게 해서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가 나올 때까지 시도하는 거지?”
“응. 그게 좋을 것 같아.”
“나도 찬성이야. 예능으로 다양한 사람들 만나면서 리프레시 하다 보면 또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올 거거든.”
“맞아.”
지이잉-.
그때 휴대폰에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인은 다름 아닌, 이수정 PD.
얘가 무슨 일이지?
“왜, 누군데?”
“이수정 PD 기억하지?”
“알지. ‘뉴 패밀리’ 하다가 중국계로 이직하신 분 아니야?”
“맞아.”
꽤나 좋은 조건으로 옮겨갔는데, 그 뒤로 소식이 하나도 안 들렸긴 하다.
“일단 받아 봐.”
“응.”
나는 그 자리에 앉은 채로 전화를 받았다.
“네, 강준수입니다.”
-……선배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이수정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주말에 쉬고 계시는데 죄송해요.
떨고 있는 듯한 느낌.
심상치 않다는 직감이 왔다.
“무슨 일 있어?”
-혹시 괜찮으시면 뵐 수 있을까요?
“지금 어딘데?”
-서울이요.
“……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너 촬영 부산에서 한다며.”
중국계 회사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부산에서 준비한다고 했었다.
-그렇긴 한데…….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뵙고 이야기 드려도 될까요?
단순히 넘길 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알았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있는 곳 주소 찍어. 내가 갈 테니까.”
-……네.
전화를 끊자, 유나희가 심려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심각한가 보네.”
“무슨 커다란 문제가 생긴 것 같아.”
“얼른 가 봐.”
“미안해. 모처럼 주말인데.”
“아니야. 이따가 저녁에 같이 있으면 되지.”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내가 태워줄까?”
“아니야, 괜찮아.”
나는 그녀를 앉히며 어깨를 토닥였다.
“쉬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
***
“허…….”
기가 찼다.
자초지종을 듣고 있는 내내 어이가 없는 수준을 넘어서 화가 났다.
“그러니까…….”
차마 뒷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수정 PD는 중국계 회사에서 팽을 당한 것이었다.
“정보는 다 넘겨줬다고?”
“방송국에 관한 정보랑 제가 예능하면서 알게 된 노하우 및 계절별 특성 같은 거는 다 공유했어요…….”
“편집 기술도?”
그녀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걱정했던 일이 결국 벌어지고 말았다.
IT나 최첨단 기술 엔지니어들도 중국계 회사로 옮겨가서 기술만 쏙 빼앗기고 버려지는 일이 잦은데.
결국 방송판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너만 간 게 아니라, 다른 제작 스태프들도 많이 차출해갔다며.”
“맞아요. 대부분이 지상파였어요. PBC와 MBS, KTS는 기본이고 종편이랑 작은 제작사 출신도 많았어요.”
“너만 그런 거야? 아니면, 다른 사람도 그래?”
“전부예요.”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며 말했다.
“저희 팀 자체가 해산되었어요. 따로 연락해보니까 전부 해고 통보 받았고요.”
옮겨간 지,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제대로 프로그램 만들기는 했고?”
“다양한 시도를 했어요. 일반 극본 코미디부터 시작해서 콩트나 버라이어티까지…… 종류별로 계속 한 3화 정도 찍고 새로운 장르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여러 개 던져놓고 걸리는 걸 하려나보다 생각했는데…….”
이수정 PD는 조소를 지었다.
“그게 기술을 빼가려는 걸 줄은 몰랐어요.”
예로부터 중국 쪽에서 판권도 안 사가고 예능 프로그램을 표절하거나 자체적으로 리메이크하는 괘씸한 짓들을 해왔는데.
심지어 이런 식으로 기술을 빼갈 줄이야.
“질이 나빠도 너무 심한 수준이잖아.”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노동청이나 어디 기관 같은 데 이야기는 해봤어?”
“네. 신고는 했는데, 이게 중국계 회사라서 제대로 된 처벌이 힘들 것 같더라고요.”
“그래도 국내 법인이 있을 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이번 일 끝내면서 폐업 처리를 해 버렸더라고요.”
“허어.”
어이가 없어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완전 계획적이잖아?”
“그렇다니까요.”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애초에 기술만 빼 갈 생각으로 이쪽으로 진입했던 것 같아요.”
이수정 PD는 씁쓸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그녀는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제가 회사를 버리고 나왔는데…… 이렇게 힘들 때 갑자기 연락드리니까 너무 송구스러워요.”
“무슨 소리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버린 게 아니라 졸업한 거야.”
순간, 그녀의 몸이 움찔거렸다.
이수정 PD는 울컥한 듯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일단 지금 지낼 곳은 있어?”
“본가에서 있기는 한데……. 직장은 새로 찾아 봐야죠.”
“그러면…….”
그녀를 향해 턱짓했다.
“당분간 우리 회사로 돌아와.”
“……네?”
“아예 다시 들어와도 되고. 불편하면, 새 직장 구하기 전까지 있어도 되고.”
“아니에요.”
“왜, 졸업하고 나서 다시 재수강하는 느낌이라서 싫어?”
“아니라니까요!”
이수정 PD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서 그렇죠. 제가 어떻게…….”
“나 요즘 프로그램 새로 시작하는데, 인력이 너무 딸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와서 편집 좀 봐주라.”
“……진짜 괜찮으시겠어요?”
“대신 중국계만큼 페이를 주진 못해.”
“그거야 당연하죠.”
“일도 왕창 시킬 거야.”
“시킨 거 2배로 할게요.”
“과로사하겠는데?”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 주부터 출근해. 내가 회사에는 이야기해둘게.”
“……감사해요, 정말로.”
“어깨 펴고, 인마.”
***
이러한 사정으로 ‘준수 포차’의 프로듀서로 이수정 PD가 합류했다.
물론, 메인 연출에는 내 이름 ‘강준수’ 석 자가 박혀있긴 하지만.
나는 ‘출연진’의 역할이 강하기에 촬영 준비나 편집 등은 이수정 PD가 도맡아서 진행해줄 예정이었다.
“다시 불러주셔서 감사해요.”
“오히려 네가 있으니까 든든하다, 야.”
“그래서 오늘 바로 촬영 시작하는 거죠?”
“응. 세팅 시작하면 돼.”
촬영 장소는 우리 집.
미리 구도는 봐두었지만, 일반 가정집이었기에 세팅을 준비하려면 꽤나 정신이 없었다.
점심부터 촬영이 시작이기에 아침 일찍부터 모여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선배님, 유나희 씨는 12시 도착 예정이랍니다.”
“알았어. 그러면 지금 거실이랑 주방 세팅은 끝났고, 방에만 카메라 설치하면 되지?”
“네.”
“그러면 나머지는 이수정 PD한테 점검 받고, 나는 요리 준비할게.”
“알겠습니다.”
촬영 콘셉트 상, 점심은 집주인인 내가 직접 준비해야 했으니까.
메인 디시는 저녁이었기에, 점심은 간단하게 김치볶음밥으로 준비했다.
김치를 잘게 썰고, 베이컨도 넣고.
한창 준비를 끝마칠 무렵.
“선배님.”
이수정 PD가 내게 신호를 주었다.
“유나희 씨 주차장 도착하셨답니다. 지금 FD가 마이크 착용시켜 주고 있어요.”
“준비 끝났으니 바로 올라오셔도 된다고 그래.”
“알겠습니다.”
김치볶음밥이 식지 않도록 프라이팬의 뚜껑을 잘 덮어두었다.
부엌 외에도 집안 곳곳에 설치된 모든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후아아.”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예능에서 카메라 앞에 서는 것도 오랜만인데.
이렇게 내 이름까지 내걸고 본격적으로 예능에 출연하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평소처럼만 하자.’
어차피 메인이 되는 건 내가 아니라, 게스트니까.
‘준비는 다 끝난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점검을 마칠 무렵.
“선배님.”
이수정 PD와 스태프들이 내게 다가왔다.
“저희는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고생했어.”
아무래도 세트장이 아니라, 가정집이라는 특성상 스태프들이 머물면서 촬영을 하는 게 아니라.
곳곳에 카메라를 설치해 사각이 없도록 세팅하여 관찰 카메라 형식으로 진행하는 걸로 가닥을 잡았으니까.
게다가 스태프가 바글바글하면 출연하는 입장에서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카메라가 있더라도.
손님과 나, 단 둘만이 있는 형식으로 진행을 하면 분위기가 편할 테기에 이렇게 결정했다.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주세요.”
“그래.”
스태프들이 근처에서 대기하며 모니터링하는 게 아니라.
이들은 퇴근이었다.
아무래도 한 명이라도 실시간 모니터를 하다 보면, 누군가에게 감시당하는 느낌이라 좋지는 않았으니까.
이게 더 자연스럽게 진행할 수 있겠지.
유나희가 아니라, 다른 게스트가 출연해서 만약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내가 메인 PD로서 촬영된 부분을 날리면 되기에 부담도 없었고.
“파이팅입니다!”
스태프들은 힘차게 외치며 집을 떠났다.
그리고 약 5분 뒤.
-이수정 PD : 선배님, 지금 유나희 씨 엘리베이터 타셨어요.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나는 부엌에서 김치볶음밥을 그릇에 세팅해서 식탁으로 옮겼다.
초인종 소리가 들리면, 곧바로 마중 나갈 생각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삑-.
삑. 삑. 삑. 삑. 삑.
-띠리링.
찬란한 전자음과 함께 도어락이 열렸다.
나는 흠칫하며 현관으로 향했다.
유나희는 태연하게 안으로 들어오며 해맑은 표정을 지었다.
“실례합니다!”
신발을 벗으려던 그녀는 당황한 내 얼굴을 보며 멈칫했다.
“왜?”
유나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뭐 실수했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 안 해?”
“준비 다 됐다고 해서 올라온 건데……. 아직 준비 안 됐으면 조금 이따가 들어올까?”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문을 가리켰다.
“여기 우리 집이거든.”
“그게 왜?”
때마침 문이 닫혔다.
-또로롱.
그제야 유나희는 깨달은 듯 입을 틀어막았다.
“……아!”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NG야?”
“응.”
아무리 열애설을 인정하긴 했어도.
방송 콘셉트 상 손님이다.
“초인종을 눌러야지.”
“……미안.”
유나희는 부끄러운 듯 새빨갛게 달아오른 볼을 감추더니.
“기다려 다시 올게.”
후다닥 문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