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사는 프로듀서-590화 (591/601)

견뎌내거나 바스러지거나 (4)

“컷, 오케이!”

내 사인과 동시에.

주르륵.

한시아의 뺨을 타고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눈물을 닦아내며 어설프게 미소를 지으며 사과했다.

“애드리브해서 죄송해요.”

사과의 대상은 배우와 스태프들이었다.

“키스신보다 이게 더 감정을 잘 표현할 것 같았어요.”

“네. 좋았습니다.”

한시아의 대사로 인해.

키스 대신 포옹만으로도 충분했다.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나는 감정을 추스르지도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철수할게요.”

그제야 스태프들이 순식간에 웅성웅성대기 시작했다.

“시아 씨 연기 장난 아니에요.”

“저 방금 진짜 놀랐어요.”

“나 숨도 못 쉬고 들었잖아.

스태프들은 나를 향한 고백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그저 완벽한 애드리브라고 생각하겠지.

내 마음은 무거웠다.

이번 영화가 끝나기 전에, 한시아가 고백을 하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리라는 건 상상치 못했지만.

머지않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당황스럽진 않았다.

다만.

내 마음에 걸리는 건 따로 있었다.

고백이라는 행위보다도.

그녀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한시아가 내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사귀자거나 자신을 봐달라는 말이 아니라.

‘사랑해’였다.

그저 그 감정을 내게 표현했을 뿐이다.

무언가 혹은 보답을 바라고 이야기한 게 아니다.

그녀가 사전에 이야기했던 대로.

후회하지 않고 싶기에 마음을 전한 것이겠지.

이에 대한 대답은 지금 할 수 없었다.

“회식 장소로 이동하겠습니다.”

***

이날 저녁.

띠링-.

유나희에게는 한 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두 번 사는 프로듀서’의 마지막 신 촬영 장면이었다.

당연히 대본에 대한 내용은 그녀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사전에 서휘원 조감독에게 부탁해두었다.

한시아가 다른 남자 배우와 키스신을 한다면.

그리고 그 장면을 강준수가 직접 찍는다면.

둘의 관계는 오늘로 마무리가 되리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미리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촬영 시간이 짧네?’

녹화 시간을 따져 보면, 최소 두세 번 트라이 안에 OK 사인이 나왔다는 뜻일 터.

‘한시아가 순순히 응한 건가?’

유나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영상을 재생시켰다.

그러나 내용을 확인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이게 뭐야?

본인이 상상한 장면과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한시아가 키스신을 하고, 촬영이 마무리가 되는 게 예정된 루트였으나.

-사랑해요. 진심으로 사랑해요.

‘왜 고백을 해?’

유나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여기서 OK 사인까지 나왔잖아?’

갑자기 마음이 초조해졌다.

‘준수 오빠…… 괜찮으려나?’

사실, 이런 그림이 펼쳐지리라라는 건 유나희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한시아의 출연을 막을 수도 있었고.

만약에 유나희가 그런 의사를 표현했다면, 강준수는 유나희의 의사를 존중하여 다른 배우를 섭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이 오묘한 삼각관계가 종결되지 않는다는 걸 유나희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한시아의 출연을 허락한 것이었다.

그 관계에서 결판을 내야, 유나희와 강준수가 더 진지한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한시아와의 촬영으로 인해 흔들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서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강준수를 믿기에 한시아의 출연을 감수한 것이니까.

그러나 촬영 장면을 본 유나희는.

‘불안해.’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강준수가 미덥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한시아답지 않은 고백 때문이었다.

그녀가 긴장한 채로 말하는 모습에선 유나희 또한 떨릴 정도였으니까.

‘한시아, 생각 이상인데?’

유나희가 예상하던 것 이상으로 한시아는 진심이었다.

이제서야 확신했다.

한시아는 그저 강준수를 갖고 장난친다거나.

손에 갖고 싶어서 투정을 부리는 게 아니라.

진짜 강준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나에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문제는 강준수도 그걸 느꼈으리라는 것이다.

‘실수했어.’

한시아와의 촬영을 반대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유나희는 노트북을 덮었다.

소파에 앉은 채 현관문을 바라봤다.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강준수가 오늘 집에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

“두 번 사는 프로듀서의 흥행을 위하여!”

“위하여!”

짠-!

1차. 2차. 3차.

그리고 자정을 넘어서 간 4차까지.

부어라, 마셔라 스태프들과 배우들은 영화를 찍는 동안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겠다는 듯 회포를 풀었다.

다만, 다른 이와 달리, 나는 거의 맨정신이었다.

오늘은 회식이 끝난 뒤에 정리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한시아 또한 마찬가지.

나는 취하지 않을 정도로만 조절해서 필요한 상황에만 한두 잔 정도를 마시고 있었으나.

한시아는 아예 마시지 않고 있었다.

“선배님, 안 드세요?”

“나는 오늘은 술이 잘 안 받아서.”

“그러면 먼저 들어가셔도 되는데.”

“아니야. 오늘 같은 날은 끝까지 남아야지.”

후배들의 염려에도 그녀는 자리를 지켰다.

그렇다고 분위기가 이상하냐?

그것도 아니었다.

취한 사람들과 있을 때는 그 텐션에 맞게.

맨정신인 사람들과는 또 조용조용하게 술자리를 즐기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4차를 끝으로 회식이 마무리되었다.

“시아 씨 먼저 들어가시죠.”

“아니에요. 조감독님 택시 타세요.”

“아이, 그래도 배우님을 안전하게 보내드려야 되는데…….”

“저는 매니저 오기로 했어요.”

“어, 아까 오 실장님 취하신 것 같던데.”

“다른 대타 매니저님이 오시고 있어요.”

“아, 그래요? 다행이네요.”

서휘원 조감독은 헤헤 웃으며 택시에 올랐다.

“그러면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를 필두로 카메라 감독, 조명 감독과 남자 주연이었던 진희성 등 4차까지 지키고 있던 소수의 멤버들이 모두 떠나갔다.

남은 건 이제.

“PD님은요?”

“저도 이제 가야죠.”

한시아와 나.

단 둘뿐이었다.

“시아 씨는 매니저님 안 오시죠?”

한시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요.”

이미 새벽 2시를 넘었다.

매니저 보고 데리러 오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지.

“다들 취해서 의심도 안 하시더라고요.”

“좀 걸을래요?”

“그래요.”

여의도에서 용산.

차로 가면, 10분 안팎의 짧은 거리였으나.

우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밤이라 그런지, 차도 없네요.”

“그러게요.”

늘 사람으로 가득 찼던 원효대교도 한산했다.

한시아는 문득 멈춰 서더니.

한강을 바라보며 손짓했다.

“PD님, 여기 봐 봐요.”

야경으로 피어난 불빛이 바다에 녹아들고 있었다.

“새벽이라 불빛이 많지 않은데도 예쁘네요.”

“그렇죠?”

그녀는 다리의 난간을 잡고 한강을 바라봤다.

“한강은 참 묘한 것 같아요.”

“네?”

“보고 있으면 기분이 착 가라앉거든요. 고요해진다고야 되나. 특히 밤에는 더 그렇고요.”

한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집에서 한강이 보이면 그렇게 비싼 건가?”

“그럴지도요.”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나저나 시아 씨 집에서도 한강 보이지 않아요?”

“맞아요. 그래서 이사 간 거예요.”

“금호동이죠?”

“네. 이사 안 갔으면 PD님이랑 같은 동네였을 텐데.”

한시아는 잔망스레 눈꼬리를 휘었다.

“동네친구였다면, 조금은…….”

그녀는 말을 삼키고는 고개를 돌렸다.

“PD님 용산으로 이사 가신지 얼마나 됐죠?”

“조금 됐어요. 예전에 스토킹 사건을 당하고 나서 옮겨왔거든요.”

“이사 가지 말고 더 기다릴 걸 그랬나?”

“……네?”

“사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어요.”

그녀는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제가 예전에 살던 동네니까…… 금호동으로 옮기지 말고 버틸걸. 아닌가, 내가 있었으면 이쪽을 오지 않았으려나…… 온갖 생각이 들더라고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유나희의 집과 가까운 곳이라서 온 것이니까.

“원래 짝사랑이라는 게 그래요.”

한시아는 민망하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상대방은 별 의미 없이 한 행동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몇날 며칠 동안 그거만 생각하고 있어요. 이건 이 뜻이 있는 게 아닌가, 저 뜻을 담아서 한 건가? 술자리에서 PD님이 저 먹기 좋으라고 안주 접시를 밀어줘도, 하루 종일 생각해요.”

그녀는 약간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일련의 그 행동들이…… 혼자 생각하는 것이 한심하게 여겨지지 않고, 설레요. 나중에 돌아보면 흑역사겠지만, 원래 그런 게 짝사랑이잖아요?”

나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죠.”

“여기서 PD님이 동의하면 나만 부끄러워지는데.”

“못 들은 척할까요?”

“아니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저와 한 대화는 평생 기억해줘요. 무덤에 가서도 잊지 말고요.”

“그럴게요.”

한시아는 문득 내게서 시선을 앗아냈다.

“아, 근데 조금 부끄럽다.”

“네?”

“저 지금 PD님한테 고백만 몇 번째 하는지 모르겠어요. 좀 부끄럽네.”

“시아 씨도 부끄러움을 타는군요.”

“당연하죠.”

그녀는 숨을 깊게 내뱉으며 말했다.

“사실, 낮에 촬영 때까지만 해도 긴장해서 어쩔 줄 모르겠었는데……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하네요.”

흘긋 나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이제 마무리가 되려고 그러는 건가?”

“글쎄요.”

“PD님은 그게 문제예요.”

한시아는 날 바라보며 말했다.

“기면 기다, 아니면 아니다. 딱 잘라낼 줄 모르시더라고.”

“…….”

“또 그게 매력이기도 하지만.”

“그런 게 매력이 될 수도 있나요?”

“그럼요. 정이 많아서 모두를 품고 가는 거니까요.”

“좋은 포장이네요.”

“그게 제 장기잖아요.”

우리는 동시에 피식 웃었다.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안했다.

분명 한시아와 대화해야할 내용이 가벼운 내용이 아니기도 하고.

심란하게 받아들이려면 얼마든지 어려워질 수 있음에도.

그녀와 나 모두 가슴이 평온하다는 게 느껴졌다.

문득 궁금함이 들었다.

“시아 씨.”

“네.”

“내가 왜 좋아요?”

“뭐야, 도끼병이에요?”

“그냥 궁금해서.”

“…….”

그녀는 피식 웃더니.

“악의가 없잖아요.”

흘러가는 한강을 보며 답했다.

“음흉하지도 않아. 순수해.”

“……그게 끝이에요?”

“하나하나 읊자면, 오늘 PD님 집에 못 들어가는데 들어볼래요?”

“아니요.”

“흐흐흐.”

한시아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원래 이 바닥 사람들이 겉과 속이 다르잖아요.”

연예계라는 곳이 원래 그런 법이지.

“그런데 PD님은 안 그랬어요. 저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사람한테 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길게 듣지 않아도 한 번에 와 닿았다.

“그러면 이제 내 차례네.”

한시아는 수줍은 미소를 짓더니.

“PD님.”

“네, 시아 씨.”

“나 좀 봐줄래요?”

몸을 돌렸다.

한시아의 눈망울은 별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달빛은 구름 위로 바스러져 한시아 위로 쏟아졌다.

세상에 한시아와 나.

단 둘만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저도 물어볼게요.”

끄덕.

“지금 당장 나에게 오라는 말은 하지 않을 거예요. 어떠한 선택을 하라는 강요도 하지 않을 거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냥 지켜보기만 할 거예요.”

한시아는 한 걸음 내게 다가왔다.

“그것만 말해줘요.”

그녀는 내 얼굴을 올려보며.

촉촉이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기다려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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