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1장. 백 잔의 믹스커피
죽고 나자 억울함이 몰려왔다.
이렇게 죽을 줄 알았다면 어제 치킨 시켜 먹을걸.
매일 블로그 포스팅으로만 보던 호텔 뷔페도 먹어 볼걸.
연차 써서 여행도 다녀올걸.
야근 좀 작작 할걸.
회사 때려치울걸……!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일만 하다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정말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 한참을 혼자 투덜거리다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죽었는데 왜 의식이 또렷하지?
몸에 감기는 이 포근하고 부드러운 느낌은, 꼭 내 방 침대 이불 같았다.
설마 죽는 순간 주마등을 보는 걸까. 주마등이란 게 원래 이렇게 촉감까지 생생하게 느껴지는 건가?
더군다나 핸드폰 알람이 옆에서 쩌렁쩌렁 울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빨리 주마등이 끝나고 의식을 잃길 기다렸지만, 정신은 점점 또렷해졌다.
“으, 시끄러워…….”
알람 소리에 결국 눈을 떴다. 침대와 책상, 너저분한 방 안 풍경이 보였다.
나, 아무래도 죽기 전으로 되돌아온 것 같다.
* * *
바야흐로 헌터의 시대라고 한다.
‘각성’을 통해 초월적인 힘을 발휘하는 능력자, 헌터는 20년 하고도 3년 전에 처음 세상에 나타났다.
그리고 세계 각지에 생겨난 던전에서 쏟아지는 몬스터를 물리치고 인류에게 평화를 되찾아 주었다.
세계는 이 구원자들에게 열광했다.
아이들은 연예인, 스포츠 스타보다도 헌터를 선망했다. 빅3로 불리는 대형 헌터 길드는 시가 총액이 어지간한 대기업을 웃돌았으며, 상위 랭커 헌터의 일거수일투족이 매일 뉴스에 나왔다.
헌터만 되면 큰돈을 벌 수 있는 데다 유명해지기까지 했다.
많은 사람이 로또 대신 헌터가 되기를 꿈꿨고, 국가에서 체계적인 헌터 양성을 위해 설립한 교육기관은 수천 대 일의 경쟁률을 기록할 정도였다.
그러나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각성한 것도 아니고, 헌터나 던전 관련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베일에 싸인 A급 던전 공략자 - 빅3 길드 묵묵부답]
[던전 공략으로 나도 억대 연봉?]
[레전드 아이템 파밍으로 노후 준비!]
이런 기사를 봐도 아무런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던전을 누가 공략하든 말든 알 게 뭐람. 나는 출근해야 한다고!
쥐꼬리만 한 월급을 주면서 아침부터 밤까지 부려 먹는 곳이 바로 내가 다니는 회사였다.
야근 수당? 물론 그런 건 없다. 식대 없음. 연차 없음. 주말 출근 수당 없음. 매일 야근을 하다가 겨우 막차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날은 운이 나빴다. 그날도 나는 야근을 하다가 막차를 타러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으, 으아아악!”
“던전이야! 누가 <던전관리청>에 신고해!”
“아가씨! 조심해!”
지하철역 앞에 갑자기 던전으로 연결되는 이공간 구멍, 즉 균열이 생겨났다.
던전이 발생하면 <던전관리청>에서 일반인의 출입을 막은 뒤, 각 길드와 협력해 던전을 공략한다. 시간 내에 던전 보스를 처치하지 않으면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 안에서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던전이 생겨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라,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대피하며 신고 전화를 걸었다.
문제는 그 균열이 하필이면 내 발밑에 생겼다는 것이다. 눈치챘을 때는 이미 발밑이 쩌억 하고 갈라진 다음이었다. 나는 그대로 던전에 빨려 들어갔다.
던전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무서워서 기억을 지워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몬스터에게 쫓기고 도망친 것만은 확실하다.
아무튼 일반인의 몸으로 던전에 들어간 나는 그대로 몬스터의 손에 죽었다. 푹, 하고 몬스터의 앞발이 나를 찔렀을 때의 섬뜩한 감촉만큼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집 회사 집 회사 집 회사 집 회사 던전 죽음이라니. 이렇게 억울한 인생이 있을 수가. 이대로는 분해서 눈을 감을 수 없다고 투덜거렸다. ‘투덜거렸다’는 순화한 표현이고, 사실은 마구 욕설을 쏟아 냈다.
그런데 눈을 뜨자 내 방 침대 위. 3년 전으로 회귀했다.
“……어?”
처음에는 꿈을 꾸는 줄 알았고, 다음에는 기뻤고, 마지막으로는 의문스러웠다.
왜 다시 살아난 걸까. 던전에서 몬스터한테 죽었는데 과거로 돌아왔다니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다. 그것도 3년 전으로 회귀.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이 두 번째 삶에서 해야 하는 일이라도 있는 걸까.
에라, 모르겠다.
어쨌건 개이득 아닌가. 어쩌면 던전이 내 도돌이표 인생을 불쌍하게 여겨 한 번 더 기회를 준 걸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두 번째 인생은 다르게 살기로 결심했다.
야근에 찌든 노예 생활은 안녕이다!
안녕히 계세요. 저는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자유를 찾아 떠납니다!
* * *
당장 사표를 내고 짐을 정리하는 데는 채 며칠도 걸리지 않았다.
노예가 도망치는 것이 아쉬웠는지 사장이 붙잡았지만 들은 체도 않고 나왔다. 기껏 살아났는데 이렇게 새까만 회사에 청춘을 바칠 수는 없었다.
다음으로 내가 향한 곳은 <백은 길드>였다.
길드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는 권지운의 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나 진짜 과거로 돌아왔구나.
왈칵 반가운 마음에 그를 불렀다.
“오빠, 오랜만이야.”
“뭐?”
권지운이 귀신이라도 보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무슨 사고라도 쳤어?”
뭐지? 설마 내가 회귀한 걸 알아차렸나? 평소랑 똑같은 것 같은데? 얼굴에 뭐 표시라도 나나?
“아…… 아니, 아무 일도 없는데?”
“갑자기 왜 닭살 돋게 오빠 소리인가 해서. 평소에 절대 그렇게 안 부르더니.”
애틋한 마음이 순식간에 와장창 부서졌다.
그래. 그랬지. 저 비딱한 말투를 들으니 회귀했다는 실감이 들었다.
나는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큰아버지 댁에 맡겨져, 사촌 오빠인 권지운과 함께 자랐다.
지금은 따로 살지만, 스무 살 때까지는 같은 집에서 지냈다. 다른 형제도 없는 만큼 유일한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말하면 꽤 친한 사이일 것 같지만, 별로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어색한 사이에 가까웠다.
권지운은 <백은 길드>의 부길드장이자 A급 힐러다. 이명은 은랑.
국내 랭킹 12위의 힐러로 텔레비전을 틀면 자주 얼굴이 나왔고, 눈에 띄는 외모 때문에 헌터 잡지에도 자주 실렸다. 빅3에 비해 소규모인 <백은 길드>가 널리 알려진 건 모두 권지운의 유명세 덕이었다. 거기다 길드장인 큰아버지가 몇 년 전 실종된 이래로 길드장 대리까지 겸임 중이다.
그런 만큼 권지운은 정신없이 바빴다. 아무리 어렸을 때 친했다고 해도 일반인인 나와는 거리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헌터 따위에 관심 보이지 말고 평범하게 지내라.”
어쩌다 만날 때면 권지운이 자주 하는 말이었다. 내가 자기한테 뭐 부탁이라도 할 것 같았나.
그래서 보란 듯이 잘 지낸다는 걸 보여 주려고 곧장 취업했는데, 거기가 그렇게 새까만 회사일 줄은 몰랐다.
‘지금 생각하니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나는 응접실 맞은편에 앉은 권지운을 가만히 보았다.
권지운은 내 기억보다 약간 어려 보였다. 내가 지금 스물세 살이니까, 그는…… 스물다섯 살이겠구나.
힐러 스킬의 영향으로 은빛으로 변한 머리카락이 무척 눈에 띄었다. 화려한 외모지만 표정은 냉랭하고, 눈가는 살짝 거뭇한 것이 피로해 보였다.
“회사 그만뒀다고 들었다.”
내가 얼굴만 쳐다보고 잠시 말이 없자 그가 물었다. 아마 길드의 누군가가 내 소식을 전했겠지.
“무슨 일 있으면 이야기해.”
피곤한 듯 권지운이 엷은 한숨을 쉬었다.
굳이 재미없는 안부 인사를 나누며 빙빙 돌아갈 이유도 없다. 나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그런 건 아니고, 회사 그만두고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뭔데?”
“카페 차리려고.”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권지운이 당연히 반대하리라 생각했다.
자영업이란 게 어떤가. 100명이 시작해서 99명은 망한다고 한다. 특히 진입 장벽이 낮은 카페 같은 직종은 철저한 준비 없이 차렸다가는 망하는 일이 허다했다. 권지운이라면 반대하고도 남지.
하지만 내가 다른 일도 아닌 카페를 차리려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어떻게 설득하지. 그런 고민을 하는데 권지운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래? 우리 길드 건물 1층에 빈자리 있는데 거기다 카페 차리든가.”
“……어? 아니, 거기는…….”
“왜? 맘에 안 들어? 당장 내일부터 비울 수 있는데.”
<백은 길드> 본부 1층이면 번화가 중에 번화가, 지금 서울에서 땅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국밥 한 그릇에 5만 원이 평균인, 커피를 아무리 팔아도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는 자리. 보통은 헌터 대상의 은행이나 고가의 헌터용품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아, 임대료는 신경 쓰지 마. 너한테 돈 받을 생각은 없으니까.”
내가 당황하는 것이 돈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권지운이 덧붙였다.
나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부길드장 사촌이라고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위치에 가게를 차리다니 부담스럽다.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닌데 갑자기 왜 그런 제안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더군다나 나는 이미 세워 둔 계획이 있었다.
“아니, 위치는 벌써 정했어.”
“그래? 어딘데?”
“서울시 중구 던전 게이트3가 16로.”
“어? 거기는…….”
내가 말한 주소를 듣고 권지운이 얼굴을 찌푸렸다.
“대던전 앞인데?”
“응, 대던전 앞에 카페를 차리려고.”
나는 활짝 웃으면서 선언했다.
* * *
서울시 중구 던전 게이트3가 16로.
즉, 서울시 중구에 있는 대던전, 《어비스》의 입구를 가리키는 주소였다.
20년 전, 서울 한복판에 이공간이 발생하더니 커다란 던전이 나타났다.
탑 형태의 이 던전은 균열에서 생겨나는 인스턴스 던전과는 달리 끝없이 높이 이어졌다. 한 층을 공략하면 다음 층으로 연결되는 게이트가 나타나는 구조다.
그리고 이 던전 앞은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가 운영하시던 카페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물론 그때는 ‘던전 게이트3가’라는 수상쩍은 주소가 아니라 평범한 상점가였지만.
주변은 다 철거되어 서울 시내인데도 쓸쓸한 적막이 흘렀다.
그도 그럴 것이,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던전 앞에서 생활하려 하겠어. 우리 할머니 같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대던전 《어비스》가 세상에 나타난 뒤 주변 상가들이 정부 보상금을 받고 건물을 허물었지만, 할머니는 계속 이곳에 남아 계셨다. 위험하다고 자식들이 뜯어말리는 데도 돌아가시는 날까지 가게를 지켰다.
내가 이곳에 카페를 차리려고 마음먹은 이유도 바로 그래서다.
어린 시절, 학교를 마치고 할머니의 카페로 가면 늘 따뜻한 커피를 타 주시곤 했다. 그 달달한 맛, 포근한 공간은 분명 소중한 추억이었는데.
지난 삶에서는 회사를 다니느라 바빠 할머니의 카페를 빈 채로 버려두었다. 그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려, 예전의 편안한 공간으로 되살리고 싶었다.
사실 돈이 많이 들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낡긴 했지만 할머니의 가게는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예 가게 2층에서 살 생각이라 가겟세는 물론, 집세까지 들지 않는다. 적은 돈으로 카페를 차리기에는 그야말로 최적의 장소.
마지막 이유는 사람이 없고 한적한 곳이기 때문이다.
카페를 차린다더니 왜 사람이 없는 곳을 찾느냐고?
그야 기껏 회귀를 했는데, 열심히 일할 생각은 당연히 없으니까.
무엇보다 나는 쉬고 싶었다. 할머니가 계실 때처럼 아늑하고 편안한 카페에서 말이다.
손님은 많지 않아도 좋다. 이따금 던전에 들어가려는 헌터들에게 커피를 파는 걸로 충분하다.
적게 일하고 많이 쉬는 삶.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욜로 라이프니까.
나는 살던 자취방을 정리한 뒤 할머니의 카페로 향했다.
오래 방치된 건물은 무척 낡아 있었다. 간판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문을 열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카페를 오픈할 때까지 준비할 일이 많았다.
그 첫 번째 단계는 청소.
안의 먼지를 쓸고 닦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힘들었지만 그래도 회사에 다닐 때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했다.
피곤해지자 자연스럽게 커피가 당겼지만 당장은 믹스커피밖에 없었다. 나는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타서 마시면서 안을 둘러보았다.
“이게 뭐지?”
그런데 가게 안쪽의 좁은 방에 웬 네모난 텔레비전이 놓여 있었다. 할머니가 쓰던 건가?
신기한 마음에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그런데 대체 어디서 만든 건지 회사 마크가 없었고, 전원 버튼도 보이지 않았다.
“……으앗!”
그때 팟, 하고 불이 켜지더니 화면에 글자가 나타났다.
…….
[자격을 확인 중입니다.]
[적격자임을 확인했습니다.]
[드디어 왔구나, 적격자의 피를 이은 아이여. 나는 시스템을 관장하는 자, 너를 기다리고 있었…….]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너무 길다. 나는 [건너뛰기]를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