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92)

3화

화면이 빨리 감기를 한 것처럼 글자가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게임을 할 때도 스토리는 전부 스킵하는 편이었다. 뭔지 몰라도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나와는 상관없겠지.

곧 글자가 스킵되고 새로운 화면이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입력창이 있었다.

[이름:

 나이:

 혈액형:       ]

이걸 입력하라는 건가. 무시해도 되겠지만, 뭐가 나올지 조금 궁금했다.

‘이름은 권리을, 나이는…… 스물여섯에서 3년 전으로 회귀한 거니까 23세, 혈액형은 O형…….’

텔레비전 화면에 나타난 버튼을 눌러 답을 입력했다.

이 이상한 텔레비전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다음 중 당신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1) 돈

2) 명예

3) 권력

4) 휴식

이건 당연히 4번이다.

물론 돈도 중요하지만, 돈만 벌고 써 보지도 못하고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결국 돈도 4번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나는 죽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적어도 이번 생은 쉬엄쉬엄 느긋하게 보내고 싶었다. 말로만 듣던 워라밸이란 것을 챙겨 보겠다 이 말이다.

[쉬는 날에는 주로 무얼 하면서 보내나요?]

1) 자기 계발

2) 운동

3) 사교

4) 휴식

이번에도 4번을 골랐다.

어쩌다 쉬는 날이 생기면 부족한 잠을 보충하기만도 바빴다.

자기 계발? 운동? 기껏 주문한 운동 기구는 택배 상자도 뜯지 않은 채 옷장 안에 처박혀 있었다. 사교? 얼마 안 되는 친구들과는 카톡으로만 드문드문 생존 신고를 하는 정도였다.

[쉬는 날 늦잠을 자는데 친구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당신은?]

1) 친구를 만나러 나간다.

2) 다음에 만나자고 하고 계속 잔다.

이건 볼 것도 없이 2번이지. 늦잠이 얼마나 소중한데.

고만고만한 질문이 몇 개 더 이어졌다. 이 질문의 의도는 모르겠으나 나는 아무튼 휴식, 쉬고 싶다, 놀고 싶다는 답을 골랐다. 심리 테스트 같은 건가.

[테스트가 끝났습니다. 결과를 확인하세요.]

이윽고 검은 화면에 마지막 메시지가 나타나더니 뒤편 벽에 갑자기 문이 하나 생겨났다.

조금 전 청소를 할 때는 분명 아무것도 없는 벽이었는데 말이다.

‘여기로 들어가라는 건가?’

……꿀꺽.

심지어 문에서는 푸르스름한 빛이 새어 나왔다. 가게의 형광등과는 다른 묘한 기운은 꼭 던전 게이트와도 비슷해 보였다.

‘설마 던전 같은 건 아니겠지?’

이전 생에서 던전에 들어간 건 균열에 휘말린 단 한 번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죽음이었고.

이 문 너머가 던전이라면 절대 들어가고 싶지 않다. 회귀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또 죽을 수는 없다. 더군다나 몬스터한테 배를 찔리는 건 엄청나게 아팠다고.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나는 문 앞에서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그 순간.

[적격자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문을 열고 결과를 확인하세요.]

메시지와 함께 삐비빅 하는 소리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왔다.

더더욱 수상하다. 뒷걸음질을 치면 칠수록 소리는 더 커져, 귀를 막아도 들릴 정도였다.

나는 귀를 막은 채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아, 안 가! 안 들어간다니까!”

나는 던전 트라우마가 있는 데다 던전 알레르기에 던전 공포증까지 앓고 있다. 아니, 뭐라고 불러도 좋다. 아무튼 나는 저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적격자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문을 열고 결과를 확인하세요.]

이번에는 머릿속에 직접 목소리가 들렸다. 기이한 느낌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저 문 너머에 뭐가 있어서 자꾸만 들어오라고 하는 거지?

“<던전관리청>에 신고할까?”

던전 관련 긴급 신고 전화가 몇 번이더라. 그래, 던전은 헌터에게 맡기는 것이 제일이다.

그런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려고 하는 순간, 우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진동했다.

“……으앗!”

그 바람에 나는 핸드폰을 떨어뜨렸고, 핸드폰은 순식간에 손이 닿지 않는 틈새로 들어가 버렸다.

여전히 눈앞에는 푸르스름한 빛을 뿜어내는 문이 있었다.

마치 여기로 들어가는 것만이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답이라는 듯.

에라, 모르겠다. 할머니가 지내시던 곳인데 그렇게 위험한 물건이 있는 건 아니겠지.

무서웠지만, 이 이상한 테스트의 결과가 대체 무엇인지 솔직히 궁금하기도 했다.

좋아, 일단 문을 열어 보고 몬스터가 튀어나올 것 같으면 잽싸게 도망치자. 살짝 들여다만 보는 거야. 아니다 싶으면 튀는 걸로.

그렇게 결심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푸르스름한 빛이 주위를 감싸더니 풍경이 바뀌었다.

“어?”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에 찬 공기만 닿았다. 조금 전까지 여기 있던 문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헐, 갇혔다.

도로 나가려고 해도 문이 없으니 불가능했다.

그 이상한 텔레비전이 나를 속인 게 분명하다! 역시 문을 열지 말고 당장 신고했어야 하는데, 누가 문이 아예 없어질 줄 알았겠는가.

“으악, 내보내 줘! 사람 살려!”

[적격자의 방문을 확인했습니다. 에이전트를 생성합니다.]

비명을 질렀지만 들려온 것은 태평한 목소리뿐이었다.

가만, 애초에 이 소리는 어디서 들리는 거지?

그제야 조금 진정한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들어선 곳은 숲에 둘러싸인 잔디밭이었다. 얼추 끝에서 끝까지 스무 걸음 정도 되는 넓이였는데, 빽빽한 숲 너머는 짙은 안개로 감싸여 보이지 않았다.

저녁 7시를 넘긴 시각인데도 새파란 하늘과 쨍한 햇빛은 이곳이 이공간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잔뜩 긴장한 것에 비해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어디선가 살랑살랑 부드러운 바람마저 불어왔다.

여긴 던전이 아닌 걸까.

일반적으로 균열에서 발생하는 던전은 동굴이나 무덤 등 실내 형태가 많았다. 간혹 특이하게 야외에 노출된 구조도 있다고 들었지만 파란 하늘에 해까지 떠 있는 경우는 들은 적이 없다.

허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여기가 어디건 간에 나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어디 숨겨진 문이 없나 잔디밭을 살펴보는데, 안쪽에 작은 꽃 덤불이 있었다. 그리고 덤불 옆의 편평한 돌 위에는 웬 고양이가 있었다.

삼색 털을 한 고양이는 돌 위에서 늘어져라 낮잠을 자는 중이었다. 털은 매끈매끈했고 살이 넉넉하게 붙은 몸은 말랑해 보였다.

얘도 나처럼 그 문으로 들어온 걸까? 깨우지 않도록 조심조심 다가가는 순간 다시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에이전트의 이름을 지어 주세요.]

에이전트가 대체 뭔데? 설마 이 고양이?

“……이름을 지으라고? 나더러?”

그렇게 되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대신 눈앞에 안내창이 나타날 뿐이었다.

[이름 입력:       ]

나를 이곳으로 부른 것도 이 정체불명의 알림 메시지다. 아무튼 이 메시지가 시키는 대로 해야 나갈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미간에 손을 짚고 이름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양이 이름이라.

고양이 이름…… 고양이 이름…… 고양이, 야옹…….

“……야옹이?”

역시 고양이 이름이라면 이것밖에 없지. 그러나 시스템은 삐 소리와 함께 거부 반응을 보였다.

[에이전트가 이 이름을 거부합니다.]

“야옹이가 어디가 어때서?”

전통 있는 고양이 이름이잖아.

[당신을 위한 에이전트입니다. 진지하게 생각해 주세요.

이름 입력:       ]

엄청나게 진지했는데.

마지못해 다시 이름을 생각했지만, 마땅히 좋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나는 이름 짓는 센스랄 게 없는 사람이라고. 나비……는 조금 안 어울리고, 만두? 아니야, 영 별로다. 털색이 세 종류니까, 삼색, 으음…… 음…….

그러다가 한 이름이 머리를 스쳤다.

‘미음이’는 어떨까.

내 이름 ‘권리을’은 할머니가 지어 준 이름이다.

뜻은 말 그대로 리을이다. 기역, 니은, 디귿 다음에 리을. 할머니의 네 번째 손자라는 이유로 지은 이름이라는데, 왜 사촌 언니, 오빠들은 기역, 니은, 디귿이 아닌데 나만 리을인지는 모르겠다.

원래는 ‘권ㄹ’이라고 출생 신고를 하려 했는데, 주민 센터 담당 공무원이 반려시켜서 ‘리을’이 되었다.

누구신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분이지만 감사합니다. 저의 이름을 구해 주셨습니다. 공무원 사회의 정의와 도리가 거기 있었다. 나는 주민 센터가 있을 것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무튼, 할머니가 남겨 주신 가게의 이공간에서 발견한 고양이니까 ‘미음’이란 이름이 좋을 것 같았다. 뜻은 말 그대로 기역, 니은, 디귿, 리을 다음에 미음이다. ‘ㅁ’ 말이다.

“……미음이?”

까다로운 알림 메시지가 거부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지만 더 이상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통과된 건가? 대신 눈앞의 미음이가 번쩍 눈을 떴다.

“야오오옹……!”

쭈욱 고양이가 기지개를 켰다. 털이 부드럽게 흔들리고 끝이 동그란 꼬리가 위로 치솟았다. 턱은 동글동글했고 살이 넉넉하게 붙은 배는 부드러워 보였다.

귀엽다.

나는 조금 전까지 나가는 문을 찾아 헤매던 것도 잊고 무심코 미음이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배 한 번만 만져 보면 안 될까. 저 포동포동한 배를 손가락으로 살짝 쓰다듬으려던 찰나였다.

탁.

앞발로 내 손을 쳐 낸 미음이가 띠꺼운 눈으로 나를 보고는 말했다.

“어허, 함부로 만지면 안 되지.”

고양이한테 혼났다.

“어?”

나는 방금 들은 말에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돌렸다. 지금 누가 말한 거지? 그러나 이곳에는 여전히 나와 미음이밖에 없었다.

“내가 말한 것 맞아.”

“너 고양이인데 말도 해?”

“야오옹, 내가 보통 고양이인 줄 아느냐! 시스템을 집행하는 에이전트로서 적격자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느니라. 하도 안 와서 기다리다가 죽는 줄 알았네. 아무튼 빨리 손을 여기 올려 봐.”

미음이가 동그란 앞발을 내밀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앞발의 분홍 젤리를 만지고 싶었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나타났다.

[자격 확인…… 완료. 시스템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테스트 결과에 따라 능력이 부여됩니다.]

[클래스: 카페 주인(F)으로 각성했습니다.]

[스킬: 내 손안의 카페(C)를 획득했습니다.]

[스킬: 바닥이 반짝반짝(E)을 획득했습니다.]

[스킬: 스마일(C)을 획득했습니다.]

[업적: 초보 카페 주인을 달성했습니다.]

[퀘스트: 믹스커피 100잔 타기(0/100)를 시작합니다.]

어?

그러니까, 나 지금 각성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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