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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6/192)

6화

고육지책으로 가게 앞에 자판기를 설치했다.

정확히 말하면 수동으로 돌아가는 자판기다. 플라스틱 상자에 버튼이 하나 달려 있을 뿐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다.

앞에는 커다랗게 ‘커피 무료’, ‘마음껏 드세요.’라고 써 붙였다. 손님이 버튼을 누르면 뒤에서 내가 잽싸게 믹스커피를 타서 올려놓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단 한 명도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단 한 명도!

어제, 겨우 어떤 헌터 길드 직원들이 이 앞을 지나간 적이 있었다. 그들이 커피 자판기(수동)를 발견하는 것을 나는 조마조마하게 지켜보았다.

“어, 커피 무료래! 먹어 볼래?”

“됐어. 저런 거 다 폰팔이들이 미끼로 주는 거야.”

“어, 그래?”

“믹스커피 한 잔 타 주고 200만 원짜리 폰을 36개월 할부로 사라고 꼬드긴다니까.”

“헐…….”

아니요, 폰팔이 아닙니다. 내 폰은 3년, 회귀 때문에 체감상 6년 된 폰입니다.

폰 안 팔 테니까 그냥 커피만 한 잔씩 마셔 주면 안 될까요.

‘……라고 하면 수상하겠지?’

‘냐아오옹.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대신 나는 그들이 떠난 뒤 커피 자판기(수동) 앞에 커다랗게 ‘폰팔이 아님’이라고 써 붙였다.

그러나 다시 이 앞에 사람이 지나가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지지부진하게 퀘스트를 해 나가던 어느 날이었다.

그동안 가게는 나름 그럴듯한 모습이 되었다. 청소도 마쳤고, 커피머신도 문제없이 동작했다. 낡았지만 아늑한 분위기가 감도는 실내는 예전 할머니가 계시던 때를 떠오르게 했다.

적어도 이제 폰팔이로 오해받는 일은 없겠지.

그러나 레시피가 믹스커피밖에 없어서야…….

……꿀꺽.

나는 오늘의 마지막 믹스커피를 마셨다. 주르륵 전부 입 안으로 털어 넣자 퀘스트 알림이 떴다.

[믹스커피 100잔 타기: 25/100]

100잔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다.

믹스커피는 아주 맛있지만, 이 달달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은 환상적이지만……. 이제는 다른 메뉴를 마시고 싶다.

“그렇게 서두를 필요 있느냐.”

푹신한 쿠션 위에 퍼질러 누운 미음이가 말했다. 쿠션이 마음에 들었는지 골골 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쉬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 때로는 여유를 가지는 것도 중요하단다. 야오옹.”

고양이한테 또 설교를 들었다.

확실히 나는 적게 일하고 많이 쉬는 삶을 바란다. 이곳에 카페를 차리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니까. 열심히 일할 마음 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믹스커피 100잔 타기: 25/100]

눈앞에 퀘스트 창이 깜빡거렸다.

튜토리얼 퀘스트도 단번에 깨지 못하다니. 성격 급한 K-게이머의 영혼이 울었다. 아직 못 깬 퀘스트를 놔두고 잠이 옵니까?!

아니, 안 오는 게 당연하다. 눈을 감고 누워도 ‘아, 이럴 시간에 레벨 업을 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정상이라고.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이었다.

쾅! 우당탕탕.

“키야오옹. 무슨 일이냐?”

갑자기 밖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미음이가 쿠션 위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털을 쭈뼛 세웠다. 대체 무슨 일이지.

벌써 주변에 짙은 어둠이 내리깔린 시각이었다. 옆에는 시리얼 부스러기를 핥아먹던 고양이 한 마리뿐.

무서웠지만 조심스럽게 밖을 확인했다.

웬 사람이 앞에 쓰러져 있었다.

“으으……. 흑, 우으…….”

이런 정체불명의 신음도 들렸다. 무시하고 경찰에 신고할까.

아니, 잠깐……. 사람이라고?

그것도 굉장히 피곤하고 지쳐 보이는 사람.

저 피로한 모습을 보는 순간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내 커피를 시험하기에 최적의 대상이다.

더군다나 입고 있는 옷이 눈에 익었다. <던전관리청>의 일반직 공무원 옷이다. 뭐야, 야근에 찌든 공무원인가.

사정을 알 만했다. 회귀 전, 야근에 시달리다 막차를 타고 집에 갈 때 제일 많이 본 옷이 저 공무원 복장이었으니까.

“저기, 괜찮으세요?”

“으으윽…….”

“잠깐 안으로 들어오세요.”

“괜찮……습니다. 그냥 잠깐 지쳐서 넘어진 것뿐이에요. 저는 이만…….”

“아니요, 잠깐만 쉬다 가세요. 네?”

끝까지 사양하며 가려는 사람을 거의 반강제로 의자에 끌어다 앉혔다.

“감사합니다…….”

역시 내 예상대로, 그녀는 <던전관리청> 일반직 공무원이었다. 즉, 던전 관리 일을 하는 공무원 중 헌터가 아닌 일반인.

던전 관리라고 하면 듣기는 좋지만 그 실체는 공무원 헌터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하는 험난한 자리다. 다른 말로 공무원의 지옥, 공무원의 묘지. 1년 이내 퇴직률이 얼마였더라…….

자신을 김지나라고 밝힌 이 공무원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눈 밑이 퀭했다. 나도 저랬었지. 그 모습이 회귀 전의 나를 떠올리게 해 연민이 느껴졌다.

‘내 손안의 카페.’

나는 믹스커피를 한 잔 탔다. 회복 속도가 빨라지는 효과가 있으니, 이 불쌍한 공무원이 마시고 기운을 차렸으면 했다.

“한잔 쭉 드세요.”

“아, 커피까지 주시고. 감사합니다.”

지나가 종이컵을 받아들고는 꿀꺽 마셨다. 따뜻한 믹스커피에 지친 표정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 순간 퀘스트 창의 숫자가 올라가는 것을 보니 자연히 웃음이 나왔다.

“한 잔 더 드시겠어요?”

“아니요.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수는…….”

“그냥 믹스커피인데요, 뭐. 자, 더 드세요.”

다시 한 잔, 또 한 잔…….

연거푸 세 잔을 마시게 하자 꽤 피로가 풀린 듯 지나의 낯에 생기가 돌았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떠나는 동그란 등을 바라보았다.

“왜오옹, 왜 그런 표정이냐?”

“그런 게 있어.”

“그런 게 뭐냐!”

“인간끼리만 이해하는 그런 거.”

“왜오오옭!”

날아오는 미음이의 앞발을 피하며 생각했다.

‘또 오면 좋겠다.’

물론 퀘스트 횟수를 채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저 휘청거리는 발걸음을 보니 마음이 착잡한 게…….

음, 이런 걸 공노비와 (전)사노비의 동병상련이라고 하는 건가.

* * *

“역시 우리 딸 해낼 줄 알았어.”

공무원 시험에 1년 만에 철썩 합격했을 때는 좋았다.

엄마는 지나가 천재라도 된 것처럼 크게 감격했다. 동네에 플래카드를 걸겠다고 하는 걸 뜯어말리느라 고생했을 정도다. 자칫했다간 온 동네에 ‘김지나 공무원 시험 합격’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릴 뻔했다.

김지나는 어렸을 때부터 던전에 관심이 많았다. 미지의 보고, ‘시스템’이 내린 신비한 이공간. 학구열을 불태우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곳은 없었다.

그래서 남들이 다 힘들다고 뜯어말리는 <던전관리청>을 지망했다. 면접 합격률이 낮은 곳이었지만, 지나는 던전 관리 규정집과 대던전 《어비스》의 생태 조사 보고서를 달달 외워서 바로 합격했다.

드디어 꿈꾸던 <던전관리청> 근무.

그러나 지나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지옥이었다. 왜 <던전관리청>이 공무원의 지옥이자 무덤으로 불리는지 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단순히 일이 많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던전 관리와 조사로 바빴다면 그래도 지나는 행복했을 테다. 몸의 힘듦보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기쁨이 컸을 테니.

그러나 지나의 주 업무는 <던전관리청> 소속 헌터의 어시스턴스다.

어시스턴스라고 하면 듣기에는 좋아 보이나, 그 말이 뜻하는 실상은 비위 맞추기와 시중들기였다.

헌터는 모두 다 고압적이고 제멋대로였으나, 공무원 헌터는 더 심했다.

지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고액 연봉을 받으면서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전달받을 땐 짜증을 내기 일쑤였다.

근무 시간 중 연락이 안 되는 건 예사에, 일반인이라고 무시하는 건 일상, 자잘한 심부름까지 시켜 댔다.

그런 헌터들을 조율해 던전 공략 스케줄을 짜다 보면,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 것도 일상이었다.

각성 안 한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던전관리청>에 대한 환상은 근무 시작 3일째에 쓰레기통에 처박혔고, 근무 시작 일주일 만에 지나는 헌터 혐오자가 되었다.

퇴직하고 싶단 마음뿐이었지만, 시험에 합격했을 때 기뻐하던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역시 우리 딸, 엄마는 네가 해낼 줄 알았어.”

‘엄마, 딸은 이대로면…… 저 헌터 놈 대가리를 깰 것 같아요.’

그날도 지나는 늦은 밤 집을 향해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담당 헌터가 튜토리얼 던전 준비를 지나에게 떠넘겼기 때문이다. 단순 관리 업무는 자기 일이 아니라나 뭐라나.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지나에게는 힘이 없었다.

‘등급 딸려서 헌터 길드 못 들어가고 공무원 된 놈이 뭐가 그리 말이 많아? 네가 유능한 헌터였으면, 아니 D급만 됐어도 헌터 길드에서 모셔 갔지 단순 관리 업무를 시키겠어?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날로 먹으려 들어!’

마음 같아서는 이렇게 쏘아 주고 싶었지만, 앞에서는 한 마디도 못 했다. 원체 소심한 성격인 데다가, E급이라도 헌터는 세고 무서웠으니까.

결국 늦은 시각까지 밀린 일을 다 처리하고 돌아가는 길.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을 밟고 몸이 휘청거렸다.

“으으…….”

진짜 때려치우고 싶다. 때려치우기 전에 그 헌터 한 대만 때릴 수 있으면 좋겠다.

일어날 힘도 없어서 그대로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는데 눈앞에 노란 빛이 비쳤다.

처음에 지나는 꿈을 꾼 줄 알았다. 드디어 일에 지친 나머지 헛걸 보았나?

어쩌면 자신은 진작 과로사했고, 이곳은 저승의 입구인 걸지도 모른다.

일단은 서울 시내인데도 을씨년스러운 던전 게이트3가에 저렇게 따뜻한 분위기의 가게가 있을 리 없으니까.

그러나 차분한 목소리가 쓰러진 지나를 불렀다.

“저기, 괜찮으세요?”

서글서글한 분위기의 여성이 지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 구석진 곳에 있는 카페 주인이라고 했다.

어쩌다 보니 카페 주인이 이끄는 대로 안에 들어가 커피를 얻어 마셨다.

평소에 잘 마시지도 않는 믹스커피는 신기할 정도로 맛있게 느껴졌다. 달짝지근한 맛과 부드러운 향기에 마음까지 녹아내리는 것 같아, 결국 세 잔이나 마시고 말았다.

잠시 커피를 마시며 하소연을 했더니 스트레스가 조금 풀렸다.

‘그래, 내일도 어떻게든 되겠지. 어떻게 안 돼도 내 잘못은 아니고!’

지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이었다.

어……? 일어났다?

평소에는 알람이 다섯 개는 울려야 일어났는데 눈이 단번에 떠졌다. 더군다나 자연스럽게 샘솟는 이 힘은 뭐지?

늘 지나를 괴롭히던 만성 피로가 깨끗이 가셔 있었다.

두통도 없고, 몸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이런 감각을 느껴 본 것이 얼마 만이었던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문득 지나의 머릿속에 어제 마신 믹스커피가 떠올랐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어쩌면 그 커피의 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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