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92)

8화





미음이 역시 시스템 에러 창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너한테 말할 수 없는 모양이다. 아무튼, 갑자기 게이트로 몬스터가 튀어나왔다면 뭔가를 무서워해서 도망쳤을 가능성이 높다.”


“뭔가가 뭔데?”


“그건 나도 모른다. 더 높은 등급의 몬스터일 수도 있고.”


미음이의 말을 들으니 더욱 확신이 생겼다.


“미음아, 도망치자.”


“이야오옹?!”


하지만 혼자서 도망치려니 양심이 아팠다.


나는 몬스터를 피해 하룻밤 찜질방이라도 가면 되지만, 혹시 지나가 휘말리기라도 하면? 일반인이 몬스터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는 직접 죽어 본 내가 잘 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흘 뒤 몬스터가 나타나요!’ 말한다고 믿어 줄지도 의문이고. 어떻게 알게 되었냐고 물어보면 대답할 수도 없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 * *




“그 차림이 더 수상해 보인다.”


미음이가 내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 방법밖에 없어.”


나는 용맹하게 밖으로 향했다.


야구 모자에 선글라스, 마스크까지 쓰고 체형이 드러나지 않는 점퍼를 걸쳤다.


완벽한 은행 강도 패션이다. 은행에 갔다간 입구를 통과하기도 전에 경찰서로 끌려갈 것만 같다.


내가 봐도 무척 수상해 보였지만, 신상이 밝혀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 정도 변장을 해야 안심이다.


은행 강도 차림으로 내가 향한 곳은 인근의 공중전화 부스다. 익명으로 신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좀처럼 잘 보이지 않아서 한참 헤맨 끝에야 겨우 공중전화 부스를 발견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지 한 번 더 확인한 뒤, <던전관리청> 긴급 신고 전화번호를 눌렀다.


- 네, <던전관리청>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 신고를 하려고 하는데요.”


- 네, 신고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저는 권리…….”


헉, 무심코 솔직하게 이름을 대답할 뻔했다.


상대가 이름을 물으면 자동 반사적으로 대답하는 습관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출석 번호를 부르면 손들고 대답하는 생활을 하다 보니 그만.


안 된다. 회귀 사실을 감추려고 은행 강도 패션까지 해 가면서 익명으로 신고하려는 건데. 나는 황급히 말을 고쳤다.


“김…… 김권리라고 합니다.”


이름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 네, 김권리 님, 무슨 일로 전화 주셨지요?


“저기…… 《어비스》 던전 게이트3가 근처에서 자기장 반응이 있어요.”


- 자기장 반응이요?


자기장 반응이란 던전 근처에서 자기장이 이상해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왜, 나침반이 빙빙 돌거나 자석이 고장 나는 일이 있지 않은가. 나침반이 이상해지면 그곳에 균열이 발생하거나 몬스터가 튀어나온다는 설이 있었다.


던전의 발생을 예측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었다. 그래서 이 자기장 이상설은 꽤 많은 지지를 받았다.


물론 몇 년 뒤 속설에 불과하며 아무런 근거도 없는 유사 과학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선풍기 틀고 자면 죽는다고 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지만, 일단 우기자.


“이상한 소리도 들리고…… 아, 아무튼 지나갈 때마다 음침한 기운이 감돈다니까요.”


나는 거듭 《어비스》 던전 게이트 주변이 수상쩍다고 우겼다.


박박 우겼더니 상담원은 주변의 순찰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예전에 허위 신고인 줄 알고 신고를 무시했다가 A급 균열이 발생해 사상자가 많이 발생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던전 관련 신고는 무조건 대응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제 안심이다.


회귀 전에도 원래는 사람을 해칠 법한 고위험 몬스터가 아니라고 했으니까, 헌터가 제때 순찰하면 몬스터가 나타나도 그렇게 큰 피해는 되지 않을 테다.


겨우 마음이 놓였다.


그래, 몬스터는 헌터에게 맡기고 나는 미리 안전하게 대피하는 민간인의 역할에 충실하자.




* * *




다음 날, 나는 오늘 치의 믹스커피를 타며 핸드폰으로 잘 곳을 찾아보고 있었다.


몬스터가 나타날 예정일은 바로 내일이다. 하룻밤 가게를 비우고 안전하게 다른 곳에서 자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회사를 그만두면서 예전에 살던 자취방은 계약 해지했고, 고양이를 데리고는 찜질방에 갈 수가 없었다. 동물을 데리고 갈 수 있는 호텔을 찾아보니 살짝 가격이 비싼 편이다.


‘어쩐다…….’


확 질러? 말까?


우와, 침대도 푹신해 보이고 거품 나오는 욕조도 있다. 밥도 맛있어 보이네.


그래도 하룻밤 자는 데에 이 가격은 좀 비싼데…….




[믹스커피 100잔 타기: 90/100]




나는 퀘스트 화면을 확인했다.


퀘스트 횟수를 다 채울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곧 500만 원이 생길 테니까 이 정도쯤 괜찮겠지.


에라 모르겠다, 결제하자.


막 핸드폰 화면의 결제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달칵 하고 문이 열렸다.


어, 누구지? 아직 지나 씨가 올 때가 아닌데.


웬 외국인 남자가 가게 입구에 서 있었다. 새빨간 곱슬머리와 피어싱이 아주 화려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부분은 가슴에 커다랗게 수놓아진 마크였다.


‘저건 뭐야?’


“이야옹(그것도 모르냐! 미국 헌터 협회의 로고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는데.


그런데 미국이라고? 미국 출신 헌터가 왜 여기에?


어떡하지, 몇 년 전에 토익 시험을 친 이후로 영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헬로, 하우아유, 메이 아이 헬프 유? 이상의 영어는 머릿속에서 날아간 지 오래였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나의 걱정과 달리 들려온 것은 한국어였다.


“여기는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네?”


“오, 아주 특이한 장소입니다.”


남자가 말할 때마다 입 모양과 소리가 미세하게 어긋났다. 꼭 목소리가 다른 곳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왜옹, 왜옹(저자, 통역 아티팩트를 쓰고 있다).”


옆에서 미음이가 속삭였다.


‘살짝 어색한데?’


“왜옭(싼 거 써서 그래).”


‘아…….’


성능이 좋은 통역 아티팩트는 몬스터와도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들었다. 당연히 비싸고.


이 남자는 퍽 싼 걸 썼는지, 말투가 어째 번역 투다.


“그런데 누구신지…….”


이런 남자와 과거에 아는 사이였던 기억은 없다.


그때 지나가 문을 열고 등장했다.


“헌터님, 그쪽이 아니라 저쪽으로 가셔야 해요!”


그렇게 말하는 지나는 무척 피곤해 보였다.


“어, 지나 씨, 어쩐 일이세요?”


“안녕하세요. 헌터님에게 이 근처를 안내드리고 있었어요. 튜토리얼 던전은 내일이지만 미리 살펴보고 싶다고 하셔서요. 이쪽은 미국에서 오신 제임스 잭 스미스 헌터님이에요.”


“권리을이라고 합니다.”


잠깐, 그럼 이 남자가 회귀 전에 사망했던 그 미국 출신 헌터인가.


잠시 놀랐지만,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날이 내일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진정했다. 그래, 오늘은 아무 일 없겠지.


“그리고 신고가 들어와서 오늘내일은 헌터들이 이 주변을 순찰할 예정이에요.”


“그래요?”


신고가 제대로 들어갔다니 안심이다. 자기장 어쩌고 할 때 민망하기는 했지만 빡빡 우긴 보람이 있었다.


그럼 이 미국인 헌터가 죽는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


안심한 나는 새 믹스커피 봉지를 꺼냈다.


“오신 김에 조금만 쉬고 가세요. 지금 커피 끓이려던 참이었어요.”


“아, 그럴까요?”


지나가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재빠르게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붓고 물을 부었다.




[아이템: 믹스커피(★★★☆☆)


상태: 매우 좋음 (남은 시간: 00:10:00)


효과: 회복 속도가 100% 빨라집니다.]




이 정도쯤 이제 안 보고도 가능하다.


제임스에게도 한 잔을 주었지만, 그는 받아 들지 않고 얼굴을 찌푸렸다.


“이건 무엇입니까?”


“드셔 보세요. 커피예요.”


“이것은 커피가 아닙니다.”


뭐? 이놈이?


“이런 즉각적인 커피는 마시지 않습니다.”


다시 권했지만 제임스는 끝끝내 거절했다.


믹스커피를 무시하다니, 이런 편견에 가득 찬 미국 놈을 봤나.


‘스마일.’


그의 완강함에 슬슬 사교적인 미소를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나는 억지로 웃는 대신 그냥 스킬을 썼다.


입술 끝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완벽한 영업용 미소를 만들어 낸다.




[스킬 ‘스마일’을 실행합니다.]


[Lv1. 효과: ‘웃으면 기분이 좋아져요.’에 의해 시전 대상자의 기분이 좋아집니다.]


[시전 대상자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뭐? 내 기분이 좋아지는 게 아니었어?


쓸모없어 보이던 ‘스마일’에는 생각지도 못한 효과가 붙어 있었다. ‘스마일’ 덕분인지 잔뜩 찌푸린 제임스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흠, 그러고 보니 냄새가 좋은 듯도 하고…….”


“그렇죠?”


“하지만 이런 건 진짜 커피가 아닙니다.”


‘참자……. 스마일.’


“한번 맛이라도 보세요.”




[스킬: 스마일을 실행합니다.]




“흠,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한 번만 마시겠습니다.”


꿀꺽.


한 모금 믹스커피를 삼킨 제임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맛은……!”


다시 한 모금.


“이 커피는 정말 훌륭합니다. 오, 무척 환상적이에요. 이런 커피는 처음 먹어 봅니다.”


“그렇죠?”


지나가 뿌듯하게 말하고는 믹스커피를 비웠다. 제임스 역시 단번에 종이컵에 든 커피를 다 마시고는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잽싸게 전기 포트에 물을 새로 받았다.


“한 잔 더 드릴까요?”


“당신의 친절에 감사합니다.”


두 번째 잔도 금방 비운 제임스가 말했다.


“이런 곳에서 이렇게 뛰어난 바리스타를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아하하…….”


저 그런 사람 아닌데요.


지나는 왜 또 같이 고개를 끄덕이는 거람.


“당신을 미국에 초청하고 싶습니다.”


네?


“오시면 그랜드 캐니언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아니요, 그걸로는 부족합니다. 미국의 던전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진짜 괜찮아요, 진짜.”


한국에 있는 던전도 충분히 끔찍한데 미국에서까지?


계속해서 제임스는 나를 미국으로 초대한다고 말했다. 방금 만났다고는 믿겨지지 않는 친화력이다.


설마 이거…… 스마일의 효과인가?


스마일 세 번만 썼다간 나도 모르게 미국 땅을 밟고 있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위험한 스킬이니 주의해야겠다.


그랜드 캐니언에 가는 대신 펜팔을 하기로 하고, 겨우 급발진한 제임스를 진정시킨 그때였다.


“저, 저, 저기…….”


“리을 씨, 왜 그러세요? ……헉!”


가게 안으로 웬 몬스터가 뛰어 들어왔다.


너구리를 닮았지만 훨씬 덩치가 컸다. 붉은 눈과 뿔이 아주 흉측했으며, 당장이라도 이쪽으로 달려들어 나를 찢어발길 것만 같았다.




[화염너구리(C)가 나타났습니다.]




“키야오옹(C급 동물형 몬스터다. 가까이 다가가면 불을 뿜어내는 고약한 놈이다)!”


내 무릎 위에 앉아 있던 미음이가 속삭였다.


왜?


몬스터가 나타나는 건 분명 내일일 텐데!


하루나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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