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도…… 도망쳐요!”
날카롭게 외쳤지만 제임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슬쩍 뒤를 돌아보면서 손을 휘둘렀을 뿐이다.
“끼에엑!”
매서운 바람이 불어닥치더니 다음 순간, 화염너구리가 둘로 갈라졌다.
순식간에 사태가 끝나 버렸다. 제임스는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지나와 나를 안심시키기까지 했다.
“걱정 마십시오. 이 몬스터는 내가 해치울 수 있습니다.”
다행이다.
대규모의 던전 브레이크가 터지는 거 아닌가 쫄았는데, 몬스터 한 마리가 튀어나온 것뿐이었나 보다.
과거와 달리 위기를 회피했다. 화염너구리가 완전히 두 쪽 난 것을 보자 겨우 심장이 진정되었다.
지나는 본청에 연락하겠다고 잠시 자리를 비우고, 제임스가 내게 물었다.
“그보다 이 환상적인 커피를 어디서 살 수 있는지 말해 주십시오.”
“네? 언제든 오시면 커피는 제가 대접할게요.”
“나는 사흘 뒤 귀국합니다. 이 완벽한 맛을 맛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입니다. 제발 알려 주십시오.”
이거 그냥 맥모골인데. 한국 대부분의 슈퍼에서 파는 그 믹스커피.
다만 ‘내 손안의 카페’ 스킬을 써서 탔을 뿐.
하지만 제임스의 열렬한 기세에 눌려 그만 대답하고 말았다.
“슈퍼에 가면 이런 봉투에 든 커피를 팔거든요. 네? 아, 여기 주소랑 이름 적어 드릴 테니까, 직원한테 달라고 하면…….”
나는 종이에 가까운 슈퍼마켓 주소와 맥모골 이름을 써서 건넸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퍽.
몬스터의 발톱이 제임스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서걱.
뭔가가 짓이겨지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다.
커다란 입이 쩍 벌어지더니 날카로운 이빨이 제임스의 팔을 물어뜯었다.
뚝, 뚝. 몬스터가 흘린 침과 섞여 흘러내리는 피.
어? 이게 무슨 일이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무섭다. 본능적인 공포에 몸이 떨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커다란 입에 날카로운 이빨. 지금 나타난 몬스터는 C급 화염너구리 따위가 아니었다.
훨씬 더 거대한…….
“윽, 쿨럭, 으헉…… 큭!”
제임스가 신음을 뱉으면서 상처를 손으로 막았다. 그러나 쏟아지는 피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방금의 상처는 치명적이었다.
“도망치십시오. 내가 이 몬스터를 막겠습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제임스가 스킬을 사용했다.
“끼에에엑!”
칼날 같은 바람에 베인 몬스터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른다. 됐나?
그러나 돌풍이 멎은 뒤에도 몬스터는 멀쩡했다.
“윽…….”
‘징그러워…….’
바로 앞에서 본 몬스터는 약간 곰을 닮았다. 다만 평범한 곰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무서웠을 뿐.
털가죽은 강철처럼 단단해 보였고, 머리통은 가게의 천장에 닿았다. 몬스터의 머리에는 뿔이 솟아 있어, 자칫하다간 천장에 구멍이 뚫릴 것 같았다.
[동굴흑곰(A)가 나타났습니다.]
A급이라고?
뒤늦게 뜬 시스템 알림이 절망적인 정보를 전했다.
“크어어엉!”
괴성을 지르며 동굴흑곰이 앞발을 휘두른다.
우지끈! 날카로운 발톱에 반토막 난 테이블이 옆으로 쓰러지며 제임스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테이블 뒤로 몸을 숨길 수 있었지만 죽는 건 시간문제였다. 오래된 목제 테이블 따위 몬스터가 두어 번 때리면 가루가 될 테니까.
제임스의 상처는 얼핏 보기에도 치명적이었다.
제임스를 데리고 저 몬스터의 공격을 피해 달아날 자신이 없었다. 아니, 나 혼자라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밖으로 빠져나간다고 해도, 몬스터는 곧장 나를 쫓아와 찢어발길 테지.
윽, 몬스터의 발톱에 찢기는 건 정말 아프다. 경험자인 내가 하는 말이니까 믿어도 좋다. 절대 두 번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
콰직.
묵직한 앞발에 테이블이 종잇장처럼 찢어진다. 이제 두 걸음만 내디디면 나를 찢어발길 차례였다.
또 죽는 건가? 이렇게 허무하게?
회귀를 하고 이곳으로 와서 며칠간의 일이 머리를 스쳤다.
너무 짧은 두 번째 삶이었다.
몬스터에게 죽는 운명은 바뀌지 않고, 회귀라는 건 그냥 죽는 자리가 달라질 뿐이었나?
그런 비관적인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윽……!”
이어지는 고통을 예감하고 눈을 질끈 감는 순간. 눈앞에 빛으로 감싸인 반투명한 방어막이 나타났다. 제임스의 스킬이었다.
안도한 것도 잠시, 동굴흑곰이 방어막을 쾅 두들기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단번에 방어막이 부서지지 않자 이번에는 머리의 뿔로 들이받았다.
쾅!
금방이라도 방어막이 부서질 것처럼 흔들렸다.
“이럴 수가…….”
제임스가 절망에 찬 얼굴로 중얼거렸다. 고통이 상당한 것 같았다. 얼굴은 창백했고, 질끈 깨문 입술은 거의 보랏빛이었다.
나만이라도 도망치게 하려고 마음먹었는지, 그가 거칠거칠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망치시오. 나는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러나 죽어 가는 헌터를 내버려 두고 도망치기엔 양심이 아픈 데다가, 애초에 도망칠 방법도 없다.
‘미음아, 무슨 방법 없어? 미음아!’
나는 마지막 남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미음이를 불렀다.
시스템의 에이전트 어쩌고…… 아무튼 보통 고양이가 아니라고 했으니까.
“키야옹(왜 저런 게 여기에……).”
‘미음아?’
‘…….’
그러나 미음이는 대답이 없었다.
털을 곤두세운 채 동굴흑곰을 보고 신음을 흘렸을 뿐이다.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비밀 스킬이라도 있나 기대했는데, 별다른 방법이 없는 모양이다.
에이전트라며! 보통 고양이가 아니라며!
“왜 저런 게 여기에……. 저건 C급 화염너구리 따위와는 격이 다르다! 지금은 봉인된 상위 존재에 복속하는 저주받은 구도자.”
미음아?
‘저기, 나도 아는 말로 해 주면 안 될까.’
상위 존재니 구도자니 전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완전히 판타지 소설의 세계다.
그리고 몬스터의 발톱에 찢기기 직전인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동굴흑곰은 평범한 몬스터가 아니다. 오래전에 □□가 □□□□를…….’
‘미음아?’
또다. 미음이의 말 일부가 노이즈가 낀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눈앞에 빨간 시스템 창이 깜빡거렸다.
[Warning: 비정상적인 접근입니다.]
[System Error: —. —.—]
[System Error: —. —.—]
미음이도 그렇고 이 시스템 창도 그렇고, 각성으로 얻은 것들은 위기 상황에서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았다.
지나가 여기 없어서 다행이다. 한 명이라도 도망칠 수 있었으니까. 이 모습을 보고 많이 놀라지 않아야 할 텐데.
두 번째 죽음을 각오하려는 순간.
안쪽 벽에서 반짝거리는 붉은빛이 눈에 들어왔다.
이공간으로 이어지는 문에서 붉은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저게 원래 저런 색이었던가? 평소에는 푸른색이었는데.
아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일단 이공간으로 들어가자. 몬스터가 저곳까지 들어오진 못할 테니까, 다른 헌터가 구하러 올 때까지만 버티자.
“…….”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직 죽기엔 이르다. 기껏 회귀까지 했는데 아직 튜토리얼 퀘스트조차 못 깼다고!
“일단 일어나요.”
“나를 놓고 도망치십시오.”
“빨리요. 방어막이 무너지기 전에 움직여야 해요.”
나는 제임스의 겨드랑이 아래 팔을 넣어 몸을 일으켰다. 육중한 몸의 무게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이러는 동안에도 제임스의 낯빛은 시시각각 나빠져만 갔다. 그가 이대로 죽기라도 하는 것이 아닐까 왈칵 겁이 났다.
아니, 아직 시간이 있다. 문을 통에 이공간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살아날 수 있다. 어떻게든 커다란 몸을 부축해서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조금만…….
파지직.
겨우 몇 걸음을 옮기는 순간, 아슬아슬하던 방어막이 파열음을 내며 완전히 깨졌다.
크어어어!
동굴흑곰이 괴성을 지르며 내 쪽으로 달려든다.
붉은빛을 발하는 문이 바로 앞에 있었다. 하지만 늦었다. 문으로 뛰어드는 것보다 동굴흑곰이 나를 찢어발기는 것이 빠를 테다.
“윽…….”
발치에서 미음이가 뭐라고 말했지만, 대답할 여유도 없었다. 그저 이 죽음은 덜 고통스럽기를 기도할 뿐.
“……어?”
우리에게 달려들던 동굴흑곰이 멈칫, 하고 굳었다. 그러더니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여전히 침을 뚝뚝 흘리며 이빨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달려들려는 기색은 없었다.
저게 왜 저러지?
동굴흑곰이 꼭 뭔가를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를, 아니, 정확히는 우리 뒤의 벽을 쳐다보았다.
붉은빛을 뿜어내는 벽의 게이트.
일순 벽 너머에서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졌다. 알 수 없는 감각에 심장이 쿵쾅거린다.
뭔가 있다. 그것도 아주 무서운 것이.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그저 무서운 것이 있다는 원초적인 공포만이 몸을 지배했다.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뚝뚝 흘렀다.
하지만 대체 이 안에 뭐가 있단 말인가. 미음이를 만났을 때는 푸른 하늘에 아늑한 잔디밭이 있을 뿐이었다. 낯선 이공간이라는 것 자체에 당황했었지만 위험한 기색은 없었다.
그때, 머릿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제를 모르고 나의 □□에서 설치는 놈이 있구나.】
시스템 메시지? 아니, 다르다. 시스템 메시지와 비슷하면서도 훨씬 낮게 울리는…… 깊이 전달되는 목소리였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제임스는 듣지 못했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만 들은 건가?
나 혹시…… 병원이라도 가 봐야 하나?
【돌아가라, 구도자여. 이곳은 나의 □□. 네가 발을 디딜 곳은 없다.】
누군가가 웃은 것 같았다.
아주 거칠게.
목소리가 멎는 것과 거의 동시에 번쩍 섬광이 빛나고.
쿵!
동굴흑곰이 쓰러졌다.
“…….”
“…….”
동굴흑곰은 그대로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거대한 몸이 있던 자리는 그을음과 먼지뿐이다.
어떻게 된 거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상황을 잘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몬스터가 사라졌다. 진짜 죽은 거 맞겠지?
의문만이 머리에 가득했는데, 갑자기 청량한 남자의 목소리가 입구에서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