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제임스는 꼭 펜팔하자는 말을 남기고 귀국했다.
남은 시간 동안은 침대 위에서 텔레비전이나 보면서 뒹굴뒹굴했다.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생활…… 정말 최고다. 놀면 지루하다는 사람도 있다던데 내게는 해당 없는 이야기다. 놀수록 더 놀고 싶어져서 영원히 놀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고 오늘, 지나에게서 가게 수리가 끝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유유자적한 호텔 생활도 어쩔 수 없이 끝났고, 나는 호텔에서 나와 가게로 돌아왔다.
그런데 가게가 낯설었다. 여기가 정말 우리 가게가 맞나?
바닥에는 먼지 한 톨 없었고 벽지부터 안의 가구까지 모든 것이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심지어 커피 머신과 각종 집기까지 깨끗하게 정리된 상태였다.
이 정도로 싹 바꿔 주다니, 몬스터에게 습격당하는 것도 해 볼 만한 경험이다.
아니, 농담. 농담이다. 취소. 말이 씨가 될라. 아무리 그래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이다.
그중 새로 놓은 테이블은 아주 세련되어서, 꼭 인스타에서 인기 있는 유명 카페에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위그드라실의 가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초록색 이파리가 실내에 내추럴한 분위기를 더했다.
‘이 나뭇가지 진짜 인테리어 용품이었구나.’
어떡하지. 인테리어가 예쁜 카페로 소문나서 손님이 갑자기 많아지면 곤란한데.
내가 이런 허황된 망상을 하며 들떠 있는 동안, 사라졌던 미음이가 가게 안쪽에서 슬그머니 나타났다.
“미음아, 어디 갔었어?!”
“잠깐 불려 갔었다.”
“어디에?”
“그건…… 시스템이 불러서.”
아무래도 수상한데. 시스템의 에이전트라서 나를 도와준다더니, 몬스터가 나타났을 때 혼자서만 살려고 도망쳤다가 변명하는 건 아니겠지.
“그때 한 말은 뭐야?”
“……이야오옹.”
미음이가 딴청을 피웠다.
“왜, 저주받은 구도자가 어쩌고 했었잖아.”
“키야오옹, 배가 고프다.”
더 닦달하고 싶었지만 미음이가 시무룩해 보여서 그만두었다.
뭐, 어쨌건 몬스터는 죽었고 무사히 돌아왔으니까, 별일 아니겠지.
이제는 진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소원이니까 제대로 된 카페를 열 때까지 한적하고 평화롭기만 했으면.
* * *
그러나 결국 내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
마지막 100잔째의 믹스커피를 마시려는 순간, 수상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2장. 아메리카노도 한 걸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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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랭킹, 길드 추노 금지. 현피는 던전에서
[잡담] 무원이 그렇게 쎈가? (377)
추천: 39 / 비추: 488
작성자: 김치만두053
(사진)
오늘 헌터티비 라이브에 나온 랭킹 2위 최세드릭 공략 영상이랑 스펙 캡쳐임ㅇㅇ
최세드릭 스펙으로도 1위 못 따나 좀 의아해서…….
솔직히 랭킹 1위라고 해도 나타나지도 않는데ㅇㅇㅋㅋㅋㅋ 진짜 있는 사람은 맞냐??? 청라 길장이라고 인정해 주는 느낌
활동을 해야 1위 의미가 있지ㅋㅋㅋㅋㅋㅋㅋㅋ 난 최세드릭이 낫다고 본다
사과당근주스: 이건 또 새로운데;ㅋㅋㅋㅋㅋ
arc***: 저는 3점 드립니다 너무 하급 어그로네요
ㅇㅇ: 미친 살다 살다 무원에 최쎄를 비비는 새끼를 다 보네ㅋㅋㅋㅋㅋㅋㅋㅋ 눈깔 점검 좀
└김치만두053: 왜 최세드릭 군산 B급 퀘스트 던전 풀 보상 기여도 60%으로 깬 거 못 봄????? 무원이 이런 적 있음????
└ㅇㅇ: ㅅㅂ기껏 근거로 대는 게 B급 풀 보상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무오옹: 보나마나 씨앤엘에서 막타 몰아줬겠지ㅋㅋㅋㅋㅋㅋㅋ
└김치만두053: 아니 웃지만 말고 설명을 해 달라고 무원이 이런 적 있냐고
└ㅇㅇ: 병먹금ㅡㅡ
생명체: 최쎄 본인이세요?
sus***: 최쎄야 헌챈 그만하고 잠이나 자라
힐러구인중: 최쎄 빠는 새끼들은 왜 가만있는 무원을 걸고 넘어지냨ㅋㅋㅋㅋㅋ
└10년차헌터: 최쎄가 콩라인이라 도라버림ㅋㅋ
파김치치: 오늘 월루는 이거다
└ttl***: 아저씨 일하세요;
ㅎㅎ: 무원이 청라빨 받는다는 헛소리 쳐하는거 봐서 알못 어그로 빼박임ㅇㅇ 청라를 무원이 키운거예요 등신아
차차영: 그렇게 이상한 글인가? 솔직히 맞말 같은데?? 최쎄 노관심인데 B급 60% 대단한 건 맞잖아
└rrr***: 그니까ㅋㅋㅋ
└ㅇㅇ: 이런 거 쓰고 얼마 받냐?ㅋㅋㅋ
플라이트: 어그로 빡쳐서 설명충짓 함한다ㅡㅡ 최쎄가 쎄긴 하지 A급으로 각성해서 스급 만들고 2위 땄으니까ㅇㅇ 근데 헌챈에서 최쎄한테 짠건 다 이유가 있음 씨앤엘에서 최쎄한테 얼마나 몰아줬냐 랭킹20위가 씨앤엘 나간 것도 그래서라는 소문 있음
플라이트: 이어서. 지금 던전관리청 체제 만든것도 무원인건 암?
└골렘사줘: 그게 뭔솔???? 공뭔도 아닌데?
└라임사랑단: 관리청 생기기 전엔 각성자센터였음ㅇㅇ 지금처럼 길드 못 세우고 헌터는 무조건 공노비 되는거ㅋㅋㅋ
플라이트: 라임이가 맞다ㅇㅇ 비리도 많고 헌터 착취 심했음. 라떼는 헌챈에 입 잘못 털면 잡혀갔음ㅋㅋ
└라임사랑단: 지하로 불려가서 이런 글 왜썼냐고 지우라고 압박줌ㅋㅋ 광석 할당량 있어서 던전 가서 광석 캐다 바쳐야함
└ㅎㅎ: 아이템 얻어도 무조건 센터꺼,,,,헌터가 손도 못댐,,
└10년차헌터: 여기 틀딱들 많네 센터에서 무슨 실험도 했다는 거 찐임?;;
└두둥딱딱: 그런 소문이 있긴 했음,,, 각성자센터에서 각성자 만들려고 무슨 짓 했다고,,,찐인지는 몰라
└ㅇㅇ: 진짜야 지금은 증거 다 삭제된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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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이트: 암튼ㅇㅇ 무원이 거기 반발해서 센터놈들 족치고 나가서 길드 세운 거임 10년전에. 각성자센터는 그때 망하고 관리청 생김
└cba***: 그게 말이됨?;;;; 헌터 한명이 뛰쳐나갔다고 센터가 없어진다고? 띠용??
└ㅎㅎ: 그 헌터 한명이 랭킹1위면 어쩌겠음ㅋㅋㅋㅋ이민이라도 가면 그대로 1위 뺏기는 건데
플라이트: ㅎㅎ마즘 그래서 무원이 정체 감춰도 관리청에서 손 못대는 거임
└닉넴뭐하지: 고마워요 설명충
└골렘사줘: 헐… 갓-무원이네 공노비 안하게 해주다니ㅇㅇㅋㅋㅋ
방구석헌터: 느그최쎄 2년 전에 춘천 A급 던전 공략 포기하고 ㅌㅌ한거 까먹었냐???ㅋㅋㅋㅋㅋㅋㅋ 그거 누가 수습함?? 별로 하는일 없다는 무원이 수습했다
└저격요정: 유명했지ㅋㅋㅋㅋㅋㅋㅋㅋ 최쎄의 대탈출
└ㅇㅇ: 고작 A급이라고 실드칠까 하는 소린데ㅋㅋㅋㅋ 그거 안에서 스급으로 변이된거 알지???? 춘천호로록 될뻔한거 막아줬더니 뭐??ㅋㅋㅋㅋㅋ
김치야어디감: 김치만두새끼 춘천던전 얘기 나오니 닉변하고 튀네 쫄리냐??ㅋㅋㅋㅋㅋ
└슈퍼갓김치: 가만 있으면 묻어줄 텐데 꼭 최쎄빠들이 긁어댐
del***: [링크] 춘천던전 무원 영상임 이거 보면 A급 데몬이 무원 필드에 들어가는 순간 녹는거 보임
└설탕할짝: ???저게 된다고??
└레전드11: 저런 개씹사기스킬에 최쎄를 비비냐ㅋㅋㅋㅋㅋㅋ
└cba***: 흔들려서 얼굴은 안보이네ㅠ
└골렘샀음: 아ㅅㅄㅂ 영상삭제됨ㅡㅡ 또놓쳤네;;;ㅠㅠㅠㅠㅠㅠㅠㅠ
└ㅠㅠ: 청라 쩨쩨한 새끼들아 같이보자좀ㅜㅜㅜㅜㅜㅜ
더블두개: 근데,, 무원은 진짜 왜그렇게 정체를 숨김? 얼굴 안찍힌 영상도 칼삭되네;;;
└제주길드1군: 랭킹 1위쯤 되면 자랑하고 다닐만한데
└카노짱: 너처럼 관종이 아닌가 보지;
└ㅁㅁ: 못생긴 거 아님???;;;;;;
└lI1l1Il: 헌터 각성하면 외모 보정되잖아????
└ㅇㅇ: 그걸로도 구제가 안 되나 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마요마요: 한이성은 무원 얼굴 알겠지,, 잘생겼는지,,못생겼는지만 말해 줬으면,,,,
* * *
휙, 검은 그림자가 창문 너머로 사라졌다.
“미, 미음아, 저거!”
“이야오옹?”
방금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분명 창가에 누가 서 있는 걸 봤는데?
내 호들갑과 달리 미음이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배를 깔고 누워 바닥만 긁을 뿐이었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사실 호텔에서 쉬는 동안 나는 곰 노이로제 상태였다. 텔레비전에서 북극곰 다큐멘터리만 봐도 놀랐고, 기념품 숍의 대형 곰 인형을 봐도 가슴이 두근거렸으며, 카톡의 곰 이모티콘만 봐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진짜 죽을 뻔했으니까. 그만큼 후유증이 심했다 이 말이다.
설마 또 몬스터가 나타난 건…….
아니, 아니다. 그럴 리가 없지. 진정하자. 그렇게 운이 나쁜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래,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잎을 잘못 본 거겠지.
“오늘따라 바람이 심하게 부네.”
“키야옹?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날씨 좋은데?”
바람……이겠지?
“으음…….”
“왜 그러느냐.”
“으으음…….”
“화장실 급하면 갔다 와라.”
“그게 아니라!”
역시 안 되겠다. 나는 고민 끝에 마지막 믹스커피가 든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퀘스트 완료를 앞둔 이 역사적인 순간에 찜찜함을 남길 수는 없지.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잎이 맞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분명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재깍 확인하고 속 시원한 마음으로 500만 원을 받는 거다.
나는 문을 열고 앞마당으로 나갔다. 마당이라고 해도 담벼락과 가게 사이의 좁은 공간이 전부라 한 바퀴 둘러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거 맞지?’
안심한 마음으로 도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물컹.
‘물컹?’
발에 낯선 감촉이 느껴졌다. 뭐지? 발로 다시 꾹 바닥을 딛는 순간, 아래쪽에서 짧은 비명이 들렸다.
그쪽을 보자 담벼락 아래에 몸을 웅크리고 숨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내 왼발에 짓밟힌 자기 발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아야야……. 저기, 발을 좀 치워 주시면…….”
“으아아아악!”
사람이다. 사람이 나타났다.
잠깐, 사람? 휴, 몬스터인 줄 알았네. 왜 헷갈리게 이런 데 사람이 있는 거지?
“쉿, 저기, 잠시만 목소리를 낮춰 주시면…….”
담벼락에 숨어 있던 것은 부스스하게 흐트러진 머리에 테가 두꺼운 안경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였다. 낯빛은 허여멀겋고 헤실헤실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초면에 생글거리는 남자를 조심하라고.
사실은 그런 말씀 하신 적 없지만.
아무튼 한눈에 보기에도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누…… 누구신데요?!”
“그러니까 목소리를 좀 작게…….”
“설마…… 잡상인?”
“그건 아닙니다만…….”
그때 담벼락 너머에서 인기척이 났다. 저편에서 여러 명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듯했다.
남자가 손으로 내 입을 막고는 담벼락에 몸을 숨겼다.
“신문 안 봐요. 수도관도 멀쩡하고요. 치약도 많이 있……. 으읍?!”
“쉿, 조용히.”
“으읍, 읍, 읍! 으읍읍(쉿은 뭐가 쉿인데, 이 미친 자식아)!”
“잠깐만, 이대로.”
“……으읍(이거 놔요)!”
버둥거렸지만 남자는 손을 풀어 주지 않았다.
“어디로 갔지?”
“저쪽으로 가 봐!”
“잡히기만 하면, 정말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잠시 뒤, 말소리가 멀어져 갔다. 완전히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뒤에야 남자는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