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죄송했습니다. 손을 풀어 드릴 테니까, 가급적 작은 목소리로……. 아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남자가 천천히 내 입을 막은 손을 뗐다.
“사람 살……. 읍, 으읍!”
“하하……. 실은 제가, 쫓기는 중이거든요. 잠시만 숨어 있게 해 주시면 바로 놔드릴게요.”
우와, 이보다 더 수상할 수가 없다.
백주 대낮에 이 가게 앞 담벼락에 숨어서 사람을 피할 만한 이유가 뭐가 있을까.
간첩? 아니면 범죄자?
“범죄자는 아닙니다.”
설마 내 생각을 읽었나?
“그렇게 얼굴에 생각이 다 드러나는 데 모르기가 더 어려울 것 같군요.”
완벽한 포커페이스였는데, 눈치가 빠른 남자였다.
“아무튼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끄덕끄덕.
물론 나는 남자가 손을 떼자마자 밖으로 쫓아낼 작정이었다.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손바닥으로 입이 틀어막힌 동안 자연히 남자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게 되었다.
두꺼운 안경테에 가려졌지만 얼굴선이 꽤 곱다. 눈매도 잘 빠졌고, 긴 속눈썹이 색이 짙고 반짝반짝한 눈동자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처음에 허여멀겋다고 생각했던 피부는 가까이서 보자 생기 있는 우윳빛이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 남자는…… 잘생겼다. 예쁘장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이성은 당장 소리를 질러야 한다고 말하는데, 감성이 나를 가로막았다.
그도 그럴 것이 현실에서 잘생긴 남자를 구경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는가. 이 정도면 우연히 길에서 마주쳤을 때 친구한테 한 시간 동안 카톡으로 자랑할 정도란 말이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것은 싫다.
범죄자 같지는 않았지만 쫓기는 중이라니, 무슨 사정인지 몰라도 남자는 귀찮은 일의 덩어리나 마찬가지였다.
죽음에서 돌아온 내 좌우명이 바로 이것이다. “귀찮은 일은 피하자.”
방금 전에 정한 좌우명이지만, 아무튼.
진짜 쫓아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천천히 남자가 내 입에서 손을 뗐다. 눈이 마주친다.
엄청난 미모였다.
“……일단 안으로 들어와요.”
결국 이긴 것은 감성 쪽이었다.
그래, 사람이 너무 그렇게 매번 이성적으로 살 필요는 없는 법이다.
* * *
“미음아, 손님 왔어.”
“이야오옹(갑자기 무슨 소리냐)?”
“그런 게 있어.”
안으로 들어온 남자가 테이블 앞의 빈자리에 앉았다. 묘하게 허물없이 구는 남자였다.
나는 그런 남자를 향해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청라 길드> 사람이 왜 거기 숨어 있었어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밝히자면, 내가 오직 남자의 희귀하고 반짝거리는 외모 때문에 안으로 들인 것만은 아니었다.
입을 틀어막혔을 때 외모 다음으로 남자의 코트 깃에 새겨진 마크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내 말을 들은 남자가 움직임을 뚝 멈췄다. 신중한 눈빛으로 나를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왜 놀라요? 그 옷에 그거, <청라> 마크 맞잖아요?”
나는 코트의 푸른색 자수를 가리켰다. 푸른색 덩굴 모양은 확실히 <청라>의 마크가 맞았다.
소속 길드란 다른 무엇보다도 확실한 신분 증명이 된다. 길드에서는 소속 헌터를 관리 감독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사소한 분쟁들은 소속 길드로 신고하면 바로 처리해 주었다.
즉, 신원이 확실한 사람이다 이 말이다.
“알아보시는군요. 이거, 아무거나 걸치고 나왔더니.”
“뭐예요, 사칭이에요?”
나는 슬그머니 주머니 속에 든 핸드폰을 붙잡았다. 헌터 길드 사칭은 중죄다. 사칭이라고 하면 당장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었다.
“아, 맞습니다. 맞아요. 사칭 아닙니다.”
당황한 남자가 손을 내저으며 자신에 대해 밝혔다.
“기유현이라고 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청라 길드> 소속 헌터입니다.”
“그런데 왜 거기 숨어 있었어요?”
“그건……. 하하,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요. 저를 찾는 사람이 너무 많다 보니, 잠깐만 몸을 피하려고 했다고 할까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땡땡이다 이거군.
나는 기유현을 빤히 보았다.
반짝거리는 외모에 비해 차림새는 수더분한 데다 어쩐지 비실비실해 보인다. 도무지 저 비실비실한 모습으로 던전에서 몬스터를 해치우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래, 알겠다.
<청라> 소속 헌터이지만 완전 약한 말단 헌터인 거겠지.
그리고 말단에게는 말단 나름의 고충이 있는 법이다. 잡일을 떠맡기도 하고 상위 랭킹 헌터의 갑질에 당하기도 하고 고생이 많을 거다.
헌터라고 해도 다 같은 헌터가 아니니까.
나 역시 한때 월급 노예였던 만큼 기유현의 사정이 빤히 손에 잡힐 듯이 그려졌다.
그런 처지라면 사람의 눈을 피해 숨고 싶을 만도 하지. 나도 졸려서 죽을 것 같을 때는 화장실에 처박혀 있다 나오곤 했다.
내가 속으로 불쌍하게 여기는 동안, 기유현이 가게 안을 둘러보고는 말을 걸었다.
“이런 곳에 카페가 있는 줄은 몰랐군요.”
“…….”
“…….”
그리고 정적.
자연스럽고 사교적인 대화의 흐름이라면 여기서 커피를 권해야겠지.
‘그렇답니다. 커피 한잔 드릴까요?’
‘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는데.’
‘아니에요. 커피 정도는 대접해 드려야죠.’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이런 식으로.
하지만 나는 오늘 아침에야 호텔에서 가게로 돌아왔다. 막 수리를 마친 만큼 자연히 냉장고는 텅 비어 있는 상태.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라고는 마시기 직전이었던 100번째 믹스커피밖에 없었다.
이거라도 줘야 하나?
하지만 100번째 커피는 내가 퀘스트 완료를 자축하며 음미하려고 했는데!
고작 믹스커피가 아까운 것은 아니다. 나 그렇게 쩨쩨한 사람 아니다. 다만 퀘스트의 완료를 앞둔 이 역사적인 순간을 온전히 만끽하지 못하는 것이 슬펐다.
꼭 보스 몹 HP를 99%까지 깎아 놓고 막타를 빼앗기는 기분이라고 할까.
“…….”
기유현이 반짝거리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꼭 잡일에 시달리다 잠시 땡땡이 중인 가여운 말단 헌터에게 커피 한 잔 줄 수 없냐고 애달파하는 눈빛 같았다.
그는 그냥 쳐다본 걸지도 모르겠지만, 곱게 뻗은 눈매와 깊은 눈동자를 보자 머릿속이 멋대로 그런 사연을 지어냈다.
윽, 견디기 힘든 눈빛이다. 이런 게 경국지색이라는 걸까.
“이야오옹(경국지색이라기엔 스케일이 너무 작은데)?”
‘조용히 해, 미음아.’
나는 미음이를 노려봐 주었다.
나라까진 아니더라도 이 가게는 기울이고도 남을 것 같다.
“크, 크흠, 지금은 믹스커피밖에 없지만……. 한잔 드세요.”
“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는데……. 잘 마시겠습니다.”
그렇게 나의 사교성을 위해 마지막 믹스커피가 내 손을 떠났다.
기유현이 종이컵을 받아 들고 한 모금을 마셨다.
“이건…… 엄청나게 맛있군요.”
입가에서 생글거리는 웃음이 걷히고, 살짝 놀란 표정으로 다시 한 모금.
“정말 맛있어요.”
약간 식었지만 아직은 [상태: 좋음]인 4성 믹스커피다. 맛있어 하는 모습을 보니 약간 뿌듯하기는 했다. 기유현은 금방 종이컵 하나를 다 비웠다.
이제 퀘스트 완료 알림이 뜰 차례인데…….
어라?
이상하다. 한참을 기다려도 퀘스트를 완료했다는 알림이 뜨지 않았다.
렉인가? 시스템에도 렉이 있나? 이거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거였나?
당황한 나는 황급히 퀘스트 창을 열어 보았다.
‘퀘스트.’
열리지 않았다.
‘퀘스트.’
여전히 묵묵부답.
‘퀘스트 창 열어 달라고!’
“왜 그러세요?”
내가 말없이 허공을 노려보자 기유현이 말을 걸었다.
“크흠, 흠.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깐 벌레가 있는 것 같아서.”
일단 나중에 생각하자. 내가 각성한 사실은 아직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은 비밀이다. 허공을 쳐다보며 혼자 중얼거리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건 피하고 싶다.
“그보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나는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꺼내면서 화제를 돌렸다.
“기유현 씨는 그, 아, 그러니까! <청라> 길드장 실물 본 적 있어요?”
“……네?”
이런. 너무 아무 말이나 해버렸네.
당황한 나머지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한 말이지만 궁금한 것은 진짜였다.
<청라 길드>의 길드장이라면 바로 그 베일에 싸인 랭킹 1위의 헌터 무원이다.
최초이자 최고의 S급 헌터. 탑의 자리에 오른 뒤 단 한 번도 내려오지 않은 헌터. 떠도는 소문만이 무성할 뿐.
완전히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이다. 사람이라면 궁금한 게 당연한 법이지.
“계속 정체를 감추고 있잖아요. <청라> 소속이시면 본 적 있을까 해서요.”
답을 기대하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같은 길드원이라고 해도 말단인 이 사람이 그런 중요 인물을 만났을 가능성은 낮을 테니.
그런데 기유현은 대답 대신 어쩐지 복잡한 표정으로 뜬금없는 말을 했다.
“저희 길드장에게 관심이 많은가 보군요.”
“으음……. 아니요.”
“그럼 왜 묻습니까?”
“그냥 계속 정체를 감추는 게 신기해서요. 봐요, 나라면 여기저기 내가 바로 그 랭킹 1위라고 자랑하고 다닐 텐데.”
“그런……가요?”
“그렇죠. 못생겨서 정체를 숨긴 거라는 소문도 있던데, 그건 아닌 거 같…….”
“…….”
순간, 사슴처럼 반짝거리는 기유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이건 꽤 유명한 소문이다.
권지운만 해도 얼마나 미디어 노출이 많이 되었는데. 수많은 취재 요청 및 방송 출연 요청을 일일이 거절하는 것도 번거로울 지경이라고 했다.
더군다나 <던전관리청> 역시 국민들은 안심시킨다는 명목으로 상위 랭커들을 홍보에 써먹곤 했다.
현 랭킹 2위 <씨앤엘 코퍼레이션> 소속 최세드릭이란 헌터만 해도 그렇다. 공익 광고, 잡지, 방송 등 온갖 데 다 얼굴을 비추었고, MD 상품도 어마어마하다.
그러니 랭킹 1위가 정체를 감추는 건 어떤 구린 이유가 있다는 소문. 뭐, 대부분은 열등감으로 지어낸 것 같지만.
“나라면 시간 확인하는 척 슬쩍 소매 걷어서 랭킹 1위 손목시계도 보여 줄걸요?”
“아하하하…….”
기유현이 옷소매를 잡아당기면서 슬쩍 손목시계를 가렸다. 랭킹 1위이자 S급 헌터의 신분 증명인 손목시계 이야기를 하는데 왜 그가 신경을 쓰는지 모르겠다.
“유감스럽지만 잘 모르겠군요. 만나 본 적이 없어서.”
“그래요…….”
하긴 기유현은 척 보기에도 말단 오브 말단처럼 생겼는데 그런 일급비밀을 알 리가 없지. 나도 참, 호기심에 괜한 사람한테 물어봤네.
그때, 갑자기 기유현이 테이블 아래로 몸을 숙였다.
“어, 왜 그래요?”
곧이어 창밖으로 아까 들은 것과 같은 말소리가 들렸다.
“대체 어디 숨은 거지?”
“빨리 나오십쇼!”
“저쪽! 저쪽에 숨은 거 아냐?”
엄청난 반응 속도였다. 과연 땡땡이를 치려면 이 정도로 재빨라야 하는군.
나는 마음속에서 기유현을 땡땡이의 달인으로 명명했다.
기유현은 테이블 아래를 무릎걸음으로 기어서 반대쪽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럼 다음에 또 뵙죠.”
후다닥 기유현이 창을 넘어서 사라지는 순간, 눈앞에 시스템 알림 창이 떴다.
[축하합니다! ‘튜토리얼 퀘스트: 커피는 나의 꿈’을 완료했습니다.
보상을 수령해 주세요.]
드디어 렉이 풀렸나 보다.
* * *
던전 게이트 3가 16로에 위치한 작은 카페.
가게의 모습이 작아질 때까지 거침없이 걸어간 뒤 기유현은 테가 두꺼운 안경을 벗었다.
생글거리는 웃음은 입가에서 지워진 지 오래.
부스스하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기자, 아까의 어설프고 어수룩한 인상의 헌터는 더 이상 없었다. 오히려 긴 속눈썹 아래로 드러난 검은 눈동자는 서늘한 빛을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