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하지만 어느덧 늦은 오후다. 지금 바로 <던전관리청>에 갔다가 혼잡한 압구정까지 갈 생각을 하니 아무래도 좀 귀찮았다.
<헌터 마켓>에는 내일 가기로 하고 일단 50루비를 인벤토리에 잘 넣어 두었다.
다음으로는 새 스킬이었다.
[바리스타의 추출(D)
상세: (Lv.1) 원두 가루에서 에스프레소를 추출한다.]
하긴 아메리카노를 만들기 위해서는 원두 가루에서 에스프레소를 추출해야 하니까. 그걸 위한 스킬인가.
문제는 바로 그 아메리카노 레시피였다. 믹스커피 때와 달리 레시피를 선택하자 상세 내용이 떴는데, 그 내용이란 것이 바로…….
[레시피: 아메리카노
재료: 건조한 위그드라실의 열매, 뜨거운 물.]
첫 줄부터 이해할 수 없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네? 커피 원두 가루가 아니라요? 예가체프나 케냐AA 같은 원두 종류 이름인 걸까. 위그드라실이라는 원두도 있던가.
“잠깐……. 위그드라실이라고?”
최근에 비슷한 단어를 들은 기억이 나는데. 어디서였더라. 위그드라실, 위그드라실…….
“저 나무 아니냐.”
그때 미음이가 테이블 한쪽을 가리켰다.
테이블 위에는 얼마 전 업적 보상으로 얻은 나뭇가지가 놓여 있었다. 인스타에서 본 내추럴 인테리어를 따라 해 보려고 꺼내 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름이 그랬던 것도 같다.
그냥 인테리어용인줄 알았는데 쓸모가 있었구나.
하지만 위그드라실의 가지에는 푸른 잎사귀가 몇 장 달려 있을 뿐 열매는 열려 있지 않다. 열매는 어떻게 구하지?
그때 새로운 알림 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축하드립니다.
튜토리얼 퀘스트를 마친 적격자님, 에테르-위키에 접속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했습니다.
에테르-위키는 사용자의 기여로 완성되는 백과사전입니다.
많은 정보를 모아 에테르-위키의 내용을 채워 보세요.
지금 접속하기☜]
이건 뭔데.
일단 알림 창을 끄려 했는데 꺼지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접속하기’ 부분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꼭 지금 접속해 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눌러 볼까 말까. 망설이는데 시스템 메시지의 내용이 바뀌었다.
[제발 접속해 주세요 ( ˃̣̣̥᷄⌓˂̣̣̥᷅ )]
[정말 접속 안 하실 거예요? ( ._.)]
왜……. 왜 갑자기 불쌍한 척하는 건데.
[에테르-위키가 적격자님을 기다리고 있어요. 。゚(゚´Д`゚)゚。)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거리는 알림 창에 부담스러운 이모티콘이 나를 압박했다. 꼭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결국 나는 백기를 들고 그 위키란 것에 접속했다.
[자격을 확인 중입니다. ……완료.]
[적격자: 권리을 확인되었습니다.]
[에테르-위키]
[적격자님이 가꾸어 나가는 차원의 백과사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정보 수집률: 0.05%]
[열람 가능 항목: ■■ ■■■ ■■■…….]
엥, 이게 뭐람.
간단한 설명 아래로는 거의 다 검은색 블록 처리되어서 읽을 수가 없었다. 온통 검은색 네모의 향연이다.
뭐 대단한 기능이라도 있나 기대했는데, 이래서는 그다지 쓸모가 없어 보인다. 쳇, 이런 걸 왜 보라고 한 거지.
곧장 위키를 끄려고 하는데 다시 시스템 알림이 떴다.
[퀘스트를 진행해 정보를 모으면 더 많은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니, 됐다니까…….
안 볼 테니까 그냥 나를 내버려 뒀으면 좋겠다.
“미음아, 시스템 알림을 끄는 방법은 없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당연히 없다!”
무슨 ‘알림 안 받기’ 기능도 없는 시스템이 다 있어. 그럼 이 메시지를 계속 보는 수밖에 없다는 건가.
[궁금한 항목을 검색해 보세요.]
정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나는 마지못해 눈앞에 나타난 위키 화면에 ‘위그드라실의 열매’를 입력했다. 0.05%의 정보 중에 이 항목이 있었는지 곧 페이지가 열렸다.
《위그드라실의 열매》
종류: 식물>열매
설명: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가지에서 열리는 열매. 과육을 벗겨 낸 뒤 말리면 커피 원두를 만들 수 있다.
얻는 법:
1) 위그드라실의 나뭇가지를 에테르가 흐르는 흙에 심는다.
2) 신선한 물을 준다.
3) 하룻밤이 지나고 확인하면, 뿌리가 내리고 열매가 열린다.
4) 열매를 수확한다.
참 쉽죠?
연관 항목: 커피 원두 만드는 법
항목을 읽은 뒤 가장 처음 든 느낌을 솔직히 말하자면…….
‘귀찮은데.’였다.
커피도 아니고 열매를 얻기 위해서 저 나뭇가지를 심고 물을 줘야 한다니, 너무 할 일이 많았다. 그 열매로 다시 커피를 만들기까지도 만만찮게 귀찮으리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믹스커피 100잔을 타는 일만 해도 충분히 귀찮았는데 말이다.
열심히 일하고 싶지 않다. 아메리카노 레시피가 궁금하기는 했지만 직접 열매를 수확해서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
이미 500만 원을 받았는데 더 퀘스트를 열심히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느긋하게 지내고 싶은데. 평범한 커피로도 카페를 운영하는 건 가능하잖아.
지난번에는 어쩌다 시스템에 말려들었지만 내 처음 계획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카페였다.
정확히는 평범한 카페를 운영하며 적게 일하고 많이 쉬기.
그런 내 결심을 비웃듯 곧장 띠링띠링 하는 효과음이 울렸다.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퀘스트: 아메리카노 만들기(0/1)를 시작합니다.]
아니, 안 한다니까. 그냥 이제 느긋하게 지내고 싶다니까.
글쎄, 한 두어 달 정도 더 빈둥거리고 나면 할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은 아니야. 돌아가.
[퀘스트를 확인하세요.]
[퀘스트를 확인하세요.]
[진짜 확인 안 하실 거예요? ㅠ~ㅠ]
이 시스템은 이제 불쌍한 콘셉트로 내 양심을 자극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불쌍하게 애원하는 메시지가 계속 눈앞에 깜빡거렸다.
그래, 알았어. 열어 보면 될 것 아냐. 열어 본댔지 꼭 한다는 뜻은 아니니까.
나는 눈앞에서 깜빡이는 퀘스트 창을 열었다.
[메인 퀘스트: 바리스타의 길 (1)
축하합니다.
이제 바리스타의 길을 나아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아메리카노를 제패한 자, 카페를 제패한다.
아메리카노 만들기: 0/1
보상: 경험치(200exp), 100루비, 랜덤 레시피]
꼭 한다는 뜻은 아니니까.
아니니까…….
아니긴 한데…….
100루비를 환전하면 1000만 원이다. 계산을 하는 순간 1000만 원으로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500만 원도 큰돈이지만, 1500만 원이 있으면 앞으로가 더 안심되지 않을까.
“으음…….”
내가 이렇게 쉬운 사람이었나.
약간 자괴감이 들었지만, 1000만 원의 유혹은 자괴감 따위 쓰레기통에 처박고도 남을 만했다.
‘에라, 모르겠다. 한번 해 보지 뭐.’
나는 용맹한 태도로 테이블 위의 나뭇가지를 움켜쥐었다. 좋아, 이걸 심고 하룻밤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이거지.
그런데 에테르-위키에서 의아한 단어가 눈에 띄었다.
바로 위그드라실의 가지를 ‘에테르가 흐르는 흙’에 심어야 한다는 부분.
에테르가 흐르는 흙은 뭐지. 평범한 땅에서는 안 된다는 뜻인가?
“미음아, 에테르가 흐르는 흙은 어디 있는 거야?”
“그런 건 상식이다. 그것도 모르느냐, 키야오옹!”
“너랑 나랑 상식의 범위가 좀 다른 것 같아.”
“흥, 특별히 설명을 해 주마. 에테르가 흐르는 흙이란 당연히 던전 안을 의미한다.”
……뭐?
던전이라는 말에 당장 나뭇가지를 내팽개치려고 했다.
“왜 그렇게 놀라느냐. 바로 가까이에 에테르가 흐르는 흙이 있지 않느냐.”
“그게 어딘데?”
갑자기 미음이가 몸을 일으키더니 안쪽으로 종종 걸어갔다. 미음이가 향한 곳은 바로 가게 1층 안쪽의 벽 앞이었다.
그러니까 맨 처음 미음이를 발견했던 그 이공간으로 연결되는 문 말이다.
일부러 애써 못 본 척하고 있었는데!
“이 안의 흙에 나무를 심고 물을 주면 뿌리가 내릴 거다.”
“다른 데는 없어?”
“던전에 들어가면 된다, 키야오옹.”
“…….”
그래도 던전보다는 이 이공간이 낫겠지.
지금은 이상한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수상한 붉은빛 대신 평범한 푸른빛을 내뿜고 있었다. 위험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 별일이야 있겠어.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다음 미음이의 뒤를 따라 푸른색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게이트 안은 마지막으로 들어왔을 때와 달라진 부분이 없었다.
동그란 구름이 떠다니는 푸른 하늘, 따사로운 햇볕, 연두색 잔디가 넓게 펼쳐진 숲.
이공간이 아니라면 도시락을 싸서 소풍이라도 오고 싶을 정도로 안락하고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괜한 걱정을 했나 보다. 평화로운 풍경을 보고 그제야 안심한 나는 나뭇가지를 심을 만한 적당한 땅을 찾았다.
마침 햇볕이 잘 들고 흙이 부드러운 곳이 있었다. 삽이 없어 손으로 흙을 적당히 파낸 뒤 나뭇가지를 꽂았다. 그리고 들고 온 생수병의 물을 붓고 나니 끝이었다.
시들시들하던 이파리에 살짝 생기가 도는 것처럼 보였다. 이대로 하룻밤만 지나면 된다 이거지.
할 일을 마치고 나니 벌써 저녁 시간이었다.
난 곧장 이공간을 나와 적당히 저녁을 먹고 2층의 방으로 올라왔다.
넓지는 않지만 침대와 가구가 있어 지내기는 충분한 방이었다.
창문 밖으로는 《어비스》의 끝없이 이어지는 벽이 보인다.
리버뷰도 오션뷰도 아닌 던전뷰. 그래도 집세가 따로 안 들어서 좋다.
편의점이 멀리 있는 데다 배달 음식을 시킬 수 없다는 것이 불편한 정도일까.
아직 잠들기에는 이른 시각이라 텔레비전을 틀었다.
-안녕하세요, 오늘의 헌터 소식을 가장 빨리 전해 드리는, <헌터TV 라이브>의 리포터 세라입니다! 곧 연기되었던 튜토리얼 던전이 재개된다는 소식이 접수되었는데요. 어떠신가요?
-네, 지난주 몬스터 습격으로 예상 일정보다 한 주 연기되었는데요. 헌터계는 올해의 신인 헌터들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튜토리얼 던전은 저레벨 헌터의 성장에 많은 도움이 된답니다. 유명하신 강현우 헌터님도 튜토리얼 던전을 1위로 클리어했죠!
-아직 추가 모집을 받고 있다고 하니까요. 올해 각성하신 헌터님들, 많은 참가 부탁드립니다.
-네, 그럼 다음 소식입니다…….
<헌터TV>에서 튜토리얼 던전에 대해 한창 설명 중이었다.
나와는 별 관련이 없는 이야기였다. 난 F급의 카페 주인이니까.
전투계 헌터가 아니라면 튜토리얼 던전은 반드시 참가할 필요가 없다.
물론 나도 전혀, 조금도, 요만큼도 참가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카페 주인이 던전에서 얻을 게 뭐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