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192)

16화

화면이 다음 소식으로 넘어가기 전, 휴대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신미라: 권리 뭐함?]

[신미라: 요새 왜 톡이 없음 야근중?]

[신미라: 맞다 권리 퇴사했댔지 와 진짜 부럽다 ㅠㅠ]

고등학교 친구 신미라의 카톡이었다. 그러고 보니 퇴사 소식까지는 이야기했는데, 각성이다 뭐다 정신 없는 통에 한동안 연락을 못 했다.

“인간, 너 친구도 있었냐.”

이 고양이는 나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내가 게으름피우기를 좋아하기는 해도, 이래 봬도 친구는 있다. 거의 카톡으로만 생존 신고를 하기는 했지만.

회귀 전에 만난 것이 마지막이니 만난 지 오래되기는 했다.

[나: ㅇㅇ 님도 퇴사 추천 건강에도 좋은 퇴사]

[나: 님 덜바쁠 때 함 봐여]

[신미라: ㅇㅋㅇㅋ]

나는 카톡 답장을 한 뒤 씻고 침대에 누웠다.

내일이면 그 나뭇가지에 열매가 열린다 이거지.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 * *

“전혀 안 자랐는데?”

다음 날 아침, 나무를 확인하러 간 나는 깜짝 놀랐다.

열매가 열리기는커녕, 위그드라실의 나무는 어제보다 시들시들한 상태였다. 초록색이던 이파리는 끝이 노랗게 변색되기까지 했다.

팔랑.

아, 이파리가 떨어졌다.

나머지 이파리도 조금만 더 시들면 우수수 떨어져 내릴 것 같았다.

“이거 하룻밤이면 금방 자란다며?”

항의했지만 시스템 메시지는 묵묵부답이었다.

어제는 눈이 아플 정도로 불쌍한 척하는 알림을 띄워 대더니, 모른 척하는 거냐.

대신 미음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깥에 방치된 동안 나뭇가지가 힘을 많이 잃었다. 그래서 평범한 물로는 나무를 자라게 할 수 없는 거 같다. 왜오오옹…….”

“그럼 무슨 물을 써야 해?”

에테르-위키에 적혀 있던 설명은 ‘신선한 물’이었다. 수돗물로는 안 되는 건가. 에비앙이라도 사서 부어 줘야 하나?

“에테르 농도가 높은 물이 필요하다.”

“그건 어디 있는데?”

미음이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나를 빤히 보았다.

아. 나는 이제 이 고양이가 이런 표정을 지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안다. 분명 엄청나게 귀찮은 일을 시키려는 거다.

그만, 대답 안 해도 돼. 못 들은 걸로 할래.

“던전에서 나는 에테르수를 떠서 부어 주면 살아날 거다.”

나는 귀를 막았다.

“안 들린다. 나는 아무것도 안 들린다…….”

“튜토리얼 던전에 참가해라.”

“여기서 갑자기?!”

“《어비스》의 1층, 튜토리얼 던전에 강이 있다. 그곳에서 물을 떠 오면 된다.”

그럴 줄 알았다.

어째 말려드는 기분이더라니. 미음이랑 시스템이 짜고 나를 던전에 집어넣으려는 수작을 부리는 게 분명했다.

자꾸 보상을 준다고 하고 쉽다고 할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다.

이거 그거지.

이웃 마을에 심부름을 다녀오려는 것뿐이었던 RPG 게임 주인공이 결국 귀찮은 일에 휘말린 끝에 마왕과 싸우게 되는 스토리.

응, 안 해. 시스템이 RPG 게임이라면 내 역할은 주인공을 배웅하는 초보자 마을의 여관 주인 정도라고.

나무에 물을 주려고 했던 것뿐인데 귀찮은 일에 휘말린 끝에 던전에 들어가게 되는 스토리는 사양한다.

“진짜 안 들린다. 아하하, 미음아, 무슨 말인지 전혀 안 들린단다.”

“키야오옹!”

미음이가 뒷발 두 발로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냥냥 펀치를 날렸다. 고양이의 앞발 공격이 꽤 아프다.

‘조만간에 목욕탕에 집어넣고 말겠어.’

나는 속으로 복수를 다짐했다.

“왜오옹! 무슨 꿍꿍이가 있는 표정이구나!”

귀신 같이 내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미음이가 풀쩍 뛰어 내 무릎 위로 와락 달려들었다. 살이 투실투실하게 올라 무거운 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뛰어오르는 동작은 날쌨다. 그 묵직한 공격에 비틀거리면서 귀를 막은 손이 떨어지고 말았다.

띠링띠링.

그때 선명한 효과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제껏 묵묵부답이던 시스템이 알림 창을 띄운 것이다.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이젠 이 수법에는 안 속는다.

여관 주인은 오늘 500만 원을 환전하러 가야 해서 바빠. 퀘스트 같은 걸 확인할 시간은 없다고.

그러나 시스템은 멋대로 퀘스트 상세 화면을 들이밀었다.

[서브 퀘스트: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이런, 소중한 나뭇가지가 에테르 부족으로 말라 죽을 위기입니다.

에테르가 흐르는 물을 주어 나무를 다시 푸르게 가꿉시다.

필요 아이템: 에테르수 1ℓ

나뭇가지에 에테르수를 붓기 0/1

보상: 황금 뽑기 티켓 3장]

어, 황금 뽑기 티켓?

뽑기라고?

인류가 만들어 낸 최악의 문명. 0.1%나 0.5% 따위의 극악한 확률에 헛된 꿈을 꾸게 하고 절망을 안겨 주는 그 뽑기?

“…….”

헉. 무심코 넘어갈 뻔했다.

뽑기만 보면 참지 못하던 옛날 버릇 때문에 그만.

아니, 아니다. 안 할 거다. 안 한다고.

* * *

번화한 압구정 헌터 마켓역 2번 출구 앞 사거리.

서울에서 땅값 비싸기로 유명한 그곳에 <헌터 마켓> 압구정 지점의 번쩍거리는 간판이 보였다. 커다란 건물 외관과 세련된 인테리어는 척 보기에도 ‘뜨내기는 가라’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오후, 나는 예정대로 이곳 <헌터 마켓>에 왔다.

그러나 목적지는 같지만 용건은 완전히 달라졌다. 500만 원을 환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던전에 들어가기 위한 아이템을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하아…….”

정말 퀘스트를 할 생각은 없었다.

없었던 게 맞는데…….

나는 마음이 약해서 문제다.

나뭇가지는 금방이라도 말라죽을 듯 시들시들했고, 한 번 시작한 퀘스트는 끝을 봐야겠다는 마음도 들었다.

황금 뽑기 티켓도 준다잖아.

절대 황금 뽑기 티켓에 넘어간 게 아니다.

그냥 말라 죽어 가는 나뭇가지를 불쌍하게 여긴 것뿐이다. 어째 설득력이 없게 들리지만 진짜다.

물론 무작정 던전으로 뛰어들 생각은 없었고, 처음에는 나름의 계획을 세웠다.

에테르수는 《어비스》의 1층에 있는 강, 즉 튜토리얼 던전에서 채취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튜토리얼에 참가하는 헌터와 파티를 맺고 들어가서 물만 떠 오면 되지 않을까? 아니면 돈을 주고 물을 좀 떠 와 달라고 부탁하거나.

그런 생각으로 튜토리얼 던전 신청 사이트의 파티 매칭 서비스에 들어갔다.

이곳은 파티를 맺어 참가하고 싶은 헌터를 위한 중개 사이트였다. 마법사나 힐러, 보조계 등 혼자서 던전을 클리어하기 힘든 사람은 파티를 맺어 참가하곤 했다.

장문의 설명을 몽땅 스킵한 뒤에 신청란에 인적 사항을 입력했는데, 삐 소리와 함께 에러가 떴다.

“어? 왜 이러지?”

/System Error/

전투계 헌터 E급 이상, 비전투계 헌터 D급 이상 서비스 이용 가능.

(이하 등급은 별도 문의 바랍니다. [email protected])

F급 서러워서 살겠나!

나는 이럴 때 ‘별도 문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문의하면 좋은 말로 돌려서 등급이 낮아서 파티를 맺기 어렵다고 할 것이다.

‘헌터님의 등급으로는 아무래도 좀……. 원하시는 등급의 헌터와 참여하시기 어려우세요.’

고작 이런 답변이나 내놓겠지.

어쩔 수 없이 헌터 커뮤니티의 모집 글을 찾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모집] 튜토 파티원 구함 E급 이상 힐러 우대

[모집] 튜토던전 같이 하실 분!! D급부터

[잡담] 파티 구인글에 F급이 신청하는 건 좀;;

[모집] 튜토 4인팟 구인 클래스 무관 (E급 사절)

아무리 찾아도…….

[모집] 튜토 버스 태워 드림

아, 이건 괜찮겠다. 무리해서 들어갈 만한 파티를 찾을 게 아니라, 그냥 센 헌터에게 먼지처럼 얹혀 간 다음 물만 떠오는 거다.

이런 생각으로 글을 클릭해 봤더니.

[모집] 튜토 버스 태워 드림

추천: 13 / 비추: 1

작성자: 지존

파티장 C급 레벨 20 검사

레벨 인증 가능함

C급 검사 장비 풀셋 보유 중

공략법 숙지함 빠른 클리어 보장

하급 비전투계 헌터도 환영합니다^^

이 지존이 책임지고 아무리 하급 뉴비라도 튜토리얼 던전 클리어 가능하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초반 렙 업에 튜토리얼 던전이 중요한 거 다들 아시죠?

하급끼리 뺑이 치지 마시고 미리미리 진짜 능력 있는 헌터를 선택하세요^^

지금 세 자리밖에 안 남았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 빨리 쪽지 부탁드립니다.

※주의※

버스비 네고 안 됩니다—

자꾸 네고해 달라 하시는데 최저가로 서비스하는 겁니다ㅋ

네고 문의 답장 안 합니다.

——버스비——

D급 루비 10개

E급 루비 30개

F급 루비 100개

…….

뭐, F급한테는 루비 100개씩이나 받는다고? 1000만 원?

이런 악덕 헌터를 봤나. 심지어 지존이라니 닉네임도 구리다. 나는 비추천 버튼을 꾹 누른 뒤 창을 껐다.

[모집] F급끼리 튜토 같이 돌아요

그래, 센 헌터한테 얹혀 가는 것보다는 비슷한 각성 등급끼리 파티를 짜는 쪽이 나을 테다.

[모집] F급끼리 튜토 같이 돌아요

추천: 5 / 비추: 0

작성자: 프급

안녕하세요^^

F급으로 각성하신 신규 헌터님들 파티 구하기 어려우시죠ㅠㅠ

F급도 뭉치면 충분히 여유 있게 튜토 깰 수 있어요~!!

같이 가실 F급 헌터님들 모십니다.

제가 원거리 공격형 마법사라 방어형이나 검사직군으로 모집합니다.

전투계 아니신 분들은…… 죄송합니다^^;;;;

그리고 장비는 최소 E급 템셋은 맞춰 주시는 게 매너인 거 아시죠?

쪽지 주세요~!!!

네, 죄송합니다…….

이렇게 여러 번 거부당하고 나자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오기가 피어올랐다. 원래 내가 가기 귀찮은 곳이라도 입장에서 잘리면 기분이 나쁜 법이다.

권지운에게 이야기하면 에테르수 정도는 구해 주겠지만…….

“헌터 따위에 관심 보이지 말고 평범하게 지내라.”

그 말을 떠올리면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데면데면한 사이인 데다, 지난번 그 흑곰 사건으로도 귀찮게 했다. 아직 각성했다는 사실도 말하지 않은 채고.

그러니 어떻게든 혼자서라도 던전 안으로 들어가서 퀘스트를 해치우고 말겠다. 누가 못할 줄 알고!

“이야오옹? 왜 그러느냐, 인간? 눈빛이 무섭다.”

“미음아, 나 말리지 마.”

“왜오오옹……?”

그래서 이곳 <헌터 마켓> 압구정점에 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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