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나는 50루비로 은신 효과가 있는 망토를 구입할 생각이었다.
종잇장 같은 F급 물 몸만으로 몬스터와 싸울 생각은 당연히 없었기 때문이다. 기껏 번 루비가 아깝기는 했지만, 퀘스트를 깬 뒤 아이템을 되팔면 된다.
미음이는 데리고 오지 못했다. <헌터 마켓>에 고양이를 데리고 들어가도 되는지 알 수 없었거니와, 이동용 캐리어도 없었기 때문이다.
낯선 <헌터 마켓>. 옆에서 떠들어 대는 고양이가 없으니 조금 불안했다.
안 돼, 나약한 생각을 할 틈 따위는 없다.
나는 단단히 각오를 다진 뒤 <헌터 마켓>의 1층 출입구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번쩍번쩍한 외관에 비해 안은 생각보다 친근한 분위기였다. 다만 손님이 적은 시간대인지 로비는 텅 빈 상태였다. 입구 근처에 있던 직원이 친절한 웃음과 밝은 목소리로 나를 반겨 주었다.
“아, 저, 장비를 좀 구입하려고 하는데요. 어디로 가야 하나요?”
“처음 방문하셨나요? 그럼 먼저 이쪽의 등록 카드를 작성 부탁드립니다. 아, 저쪽의 소파에 앉아서 편하게 작성하세요. 여기 펜 빌려 드릴까요?”
그러나 그 친절도 내가 등록 카드를 제출하는 순간 끝이 났다.
등록 카드의 헌터 등급란에 직원의 눈이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직원의 낯빛은 얼음보다 차가웠고 겨울처럼 추웠다.
“저…… 저기요?”
“오늘 VVIP께서 방문 예정이시라 직원들이 다 바쁩니다. 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더니 직원이 제일 끝쪽 방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란 이야기인가?
“고객님한테 맞는 물건은 저기 있어요. 그럼.”
나를 남겨 두고 직원이 뒤의 스태프 룸으로 들어가 버렸다. 불렀지만 돌아보지도 않는다.
그럼 그렇지. 헌터들 사이에서는 등급이 깡패라고 하니까. 승자 독식. 다른 말로 센 놈이 제일이다.
그래, 헌터계라는 비인간성의 세계에 들어온 인간성 좋은 내가 참는다.
딱히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아이템이나 구경하면서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나는 직원이 가리킨 제일 끝 쪽 방을 향했다.
혹시 무슨 골방 같은 데인가 했는데, 방은 제법 넓고 세련된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다. 역시나 나 말고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방범 장치가 걸린 유리 쇼케이스 안에 다양한 장비와 아이템이 진열되어 있었다.
“으음, 가격이…….”
직원의 태도로 보아 제일 저등급 아이템을 모아 둔 구역일 텐데도 전부 가격이 어마어마했다.
방어력 10 증가 셔츠, 회피 확률 10% 증가 반지 등 제일 싼 아이템도 루비 100개부터 시작했다. 이 안에서 내가 찾는 은신 망토를 루비 50개로 사는 게 가능할까 살짝 불안해졌다.
“으음…….”
쇼케이스 안의 아이템을 전부 구경했지만 직원은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아무리 VVIP가 어쩌고 했다지만 좀 심한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람.
그때 복도 반대쪽에서 어떤 소란이 들려왔다.
문 바깥으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살펴보자, <헌터 마켓>의 직원이 누군가에게 뭐라고 소리를 치고 있었다. 어찌나 목소리가 큰지, 반대쪽까지 다 들릴 정도였다.
무슨 일이지?
소리가 난 쪽은 위탁 상점이 모여 있는 구역이었다.
위탁 상점이란 <헌터 마켓>에 일정 수수료를 지불하고 제작계 헌터들이 직접 아이템을 파는 상점을 말한다.
주로 제작 스킬을 수련하느라 만든 잡다한 아이템을 팔았는데, <헌터 마켓>에서 정식 판매하기에는 능력치가 그저 그런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잡템이라고 해도 낮은 등급 헌터에게는 충분히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가격이 싸서, 가난한 헌터들이 애용하는 구역이었다.
나 역시 처음에는 위탁 상점에서 은신 망토를 사려 했다. 그러나 내부 수리라도 하는지 위탁 상점 구역은 텅 비어 있었다.
아니, 이제 보니 가장 구석 자리에 딱 하나 영업하는 위탁 상점이 있었다.
큰 소리는 그곳에서 들렸다.
‘싸움이라도 난 건가?’
직원은 올 기미도 없고, 심심한 나머지 호기심이 들었다. 살짝 무슨 일인지만 보고 올 생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여기서 영업하면 안 된다고 했을 텐데요.”
귀가 아플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헌터 마켓>의 직원이 구석진 곳의 위탁 상점을 향해 소리쳤다. 위탁 상점의 주인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직원의 기세에 눌려 어깨를 움츠렸다.
“오늘 VVIP 방문 예정이시라 비워 달라는 말 못 들었습니까? 얼른 정리하세요.”
“하지만……. 여기 위탁 상점 허가서도 있는데……. 제대로 허가받았어요.”
할머니가 허리에 찬 가방 지퍼를 열고는 꼬깃꼬깃하게 구겨진 허가서를 꺼냈다. 확실하게 <헌터 마켓>의 인장이 찍힌 정식 허가서였다.
그러나 직원은 허가서를 보고도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그깟 허가서 가격 환불해 드리겠습니다. 얼른 치우지 않으시면 가드를 부르겠습니다.”
딱딱한 직원의 태도에 할머니가 움찔 놀랐다. 마르고 작은 키의 할머니 앞에 덩치가 큰 직원이 서 있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위협적이었다.
내 안의 유교 걸을 일깨우는 안쓰러운 모습이었으나 직원은 강경했다.
“그, 그래도 이건 튜토리얼 던전에서 유용한 아이템이에요……. 튜토리얼 던전 전까지 팔아야 하는데 지금 나가라고 하시면…….”
“하하, 뭐라고요?”
직원이 픽, 비웃음을 흘렸다.
“VVIP가 오는데 이런 허접한 잡템을 누가 살 것 같습니까? 이런 거에 눈길이라도 줄 것 같아요? 가드!”
직원이 손짓으로 <헌터 마켓>의 가드를 불렀다. 다가온 가드들이 당장이라도 저 약해 보이는 할머니를 밀치고 끌고 갈 것만 같았다.
“자, 잠깐만요!”
나는 나도 모르게 외치며 끼어들었다.
위탁 상점의 할머니가 꼭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 할머니라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여? 눈 똑바로 뜨고 보소. 여기, ‘영업을 허가함’ 이라고 딱 박혀 있는 거 안 보이는 기여? 벌써 돈도 다 냈는데 나가라 이거여? 노인네 돈이라 우습게 보이나 배. 팔리든 안 팔리든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시오. 내 가게에 내가 드러눕는 데 무슨 문제 있소? 끌어내 보든가!”
……라고 했겠지.
어디 가서 지는 성격은 아니셨으니까.
아무튼.
“고객님, 왜 그러시죠?”
일단 말투는 경어이긴 했는데, 눈빛은 딱 욕을 하는 눈빛이었다.
‘아까 그 F급이잖아. 하, 오늘 일진 사납네. 뜨내기가 조용히 구경이나 하다 집에 갈 것이지 왜 끼어들고 난리야.’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나는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거 제가 사려고 했거든요.”
“뭐라고요?”
“할머니, 그 아이템 얼마예요?”
나는 슬쩍 위탁 상점의 매대 위에 올려진 아이템 뭉치를 확인했다. 가격표에 ‘전부 50루비’라고 적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이다. 기껏 나섰는데 돈이 모자라서 물러나야 하는 상황은 되지 않아서. 사람이 자존심이 있지.
인벤토리에서 50루비를 꺼내 매대 위에 탁, 하고 올려놓았다.
“여기 50루비 받으세요.”
“아이고, 학생, 안 그래도 돼.”
“아니요. 마침 그 아이템이 필요하던 참이었어요. 얼른 받으세요. 멋대로 사람 쫓아내는 이런 데 더 계실 필요 없어요.”
그리고 할머니가 건네는 아이템 세트를 받아 들고 휙 몸을 돌렸다.
<헌터 마켓>의 직원과 가드에게 어깨를 부딪치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손님을 무시하는 이런 가게 다시는 오지 않겠다는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스무 걸음을 간 뒤 나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싸맸다.
“으으…….”
일 쳤다…….
이걸 사려던 게 아니었는데…….
던전에서 물만 떠올 생각이니까 저렴한 은신 망토를 사려던 것뿐이었는데…….
나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 받아 온 아이템 세트를 확인해 보았다.
[초보자용 하급 바람막이(★☆☆☆☆)
종류: 방어구
방어력: 2
비고: 간절기에 입기 좋다.]
[초보자용 하급 모종삽(★☆☆☆☆)
종류: 무기
공격력: 2
비고: 땅을 파는 데 유용하다. 밭농사의 친구.]
[초보자용 하급 아이템 세트(★☆☆☆☆)
종류: 소모품
붕대, 밴드, 신호탄, 연막탄, 약초 포함.]
…….
아니, 아니다. 후회하지 말자.
비록 사려던 아이템과 전혀 다르기는 하지만, 50루비를 써 버리고 원점으로 돌아왔지만, 내 안의 유교 걸이 외쳤단 말이다. 이게 옳은 길이라고!
할머니한테 그러는 건 아니지. 암.
마음 정리를 마친 뒤 돌아가려는데 뒤에서 할머니가 나를 불렀다.
“학생, 잠깐만요.”
“아, 네, 왜 그러세요?”
가까이서 본 할머니는 아까와 조금 인상이 달랐다.
아까는 연약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머리가 하얬지만 어쩐지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입가에는 인자한 미소가 걸렸지만 눈빛이 형형하고 자세에 빈틈이 없었다.
“이걸 빠뜨렸네요.”
“네?”
할머니가 내민 것은 웬 반지였다. 단조로운 금색 링에 붉은색 알이 박혀 있었다.
“받아요. 이것도 같이 파는 건데 빼먹고 줬네요.”
“아니에요. 안 주셔도 되는데…….”
“이 반지는 어울리는 사람의 손에 있어야 해요. 그게 학생 같군요.”
“아, 네…….”
얼결에 반지를 받아 버렸다.
이건 대체 뭐지?
겉모습만 봐서는 평범한 반지처럼 보였다. 무슨 특별한 능력치라도 있는 걸까. 나는 반지의 상세 창을 확인했다.
[크투가의 반지
종류: 액세서리
효과: 사용할 수 없음.]
그런데 아이템 설명이 무척 간결했다. 이름은 나와 있었지만 등급에 능력치도 불명. 효과는 뭔지도 알 수 없는 데다 사용할 수 없는 상태.
제작 스킬 수련용 실패작인가?
그래도 반지 모양이 꽤 예뻐서 마음에 들었다. 이왕 받았으니까 끼고 다닐까 하고 손에 반지를 끼워 넣었다.
“역시 잘 어울리는군요.”
“어, 감사합……. 할머니?”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이미 할머니는 저만치 떠난 다음이었다.
그 뒷모습을 보자 다시 우리 할머니가 떠오르면서, <헌터 마켓>의 횡포에 화가 치솟아 올랐다.
그래, 잘한 거다.
원점이라고 낙담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렇게 된 이상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100루비를 벌고 말 테다.
그렇게 전전긍긍하는 VVIP가 대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두고 보자.
혼자서 의욕을 불태우느라 앞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헌터 마켓>을 나가려던 나는 그만 앞에서 오던 사람과 부딪치고 말았다.
“으앗, 죄송합니다……. 어?”
큰 키에 테가 두꺼운 안경으로 가린 깊고 짙은 눈동자, 그리고 반짝거리는 얼굴.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 그때 그 땡땡이의 달인.
나와 눈이 마주친 기유현이 생긋 웃음 지었다. 잘생긴 얼굴 위에 웃음이 피어오르자 더욱 잘생겨 보였다.
“여기서 또 만날 줄은 몰랐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