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192)

18화

기유현은 이번에는 길드 마크가 들어가지 않은 평범한 외투를 걸치고 눈에 띄지 않는 차림이었다. 더군다나 혼자.

그 차림을 보자 한 가지 의심이 머리를 스쳤다.

설마 또 땡땡이 중인가.

“혹시 또 땡땡이 중인가요?”

아, 그만 생각이 그대로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뭐, 그런 셈이죠.”

“다른 데를 가는 게 좋겠어요. VVIP가 온다고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기유현의 어깨 너머로 <헌터 마켓>의 직원이 이쪽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안절부절못하는 태도면서도 이쪽으로 쉽사리 다가오지 못했다. 아까의 위압적인 모습과는 퍽 다른 태도다. 왜 저러지.

뭐,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나는 그쪽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럼.”

땡땡이 무사히 치시길.

꾸벅 인사를 하고 옆으로 몸을 비키려고 했는데, 기유현이 앞을 가로막았다.

반대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나 기유현도 나를 따라 반대쪽으로 몸을 움직인다.

“나한테 무슨 할 말 있어요?”

“좋은 아이템을 사셨군요.”

“네?”

설마 이 모종삽과 잡템 세트를 말하는 건가?

그러나 기유현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방금 할머니에게 받은 반지였다.

“비밀을 하나 말씀드릴까요.”

“……아니요.”

이 남자와 비밀을 주고받을 만한 사이가 된 기억은 없다. 더군다나 대뜸 ‘비밀’이라니 들으면 귀찮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내 비밀도 말 안 해 줄 거고 당신 비밀도 안 궁금하니까 이대로 갈 길 갔으면 좋겠다.

그러나 기유현은 멋대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사람 말을 잘 안 듣는 편인가 보다.

“오늘 방문 예정인 VVIP란 A급 제작계인 장인 김덕이 헌터입니다. 스킬 수련을 한다고 잠적한 이후 십 년 만에 처음이지요. 오랜만에 마켓에 나오는 장인의 아이템을 사기 위해 각 길드의 구매부에서 물밑 싸움이 치열합니다. 장인의 아이템은 부르는 게 값이니까요.”

“……헤.”

“장인이 오늘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왔는데, 이미 늦어 버렸군요.”

기유현은 아깝다는 듯 살짝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미 늦었다니, 내가 위탁 상점에서 입씨름을 하는 사이 왔다 갔나 보다.

“아, 하나 더. 장인이 이번에 내놓은 아이템은 유일품이라는 소문이 있어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고유 아이템이죠.”

조금 흥미로운 이야기이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십 년 간 모습을 감추었던 장인이 오랜만에 만들어 낸 아이템이라니 한 번쯤 구경을 해 보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그만큼 희귀하다면 50루비로는 꿈도 꿀 수 없는 가격일 테니까, 어쩐지 다른 세상의 이야기라는 느낌이었다. 내가 장인의 아이템을 구경이라도 하는 날은 오지 않겠지.

볼일도 끝났겠다, <헌터 마켓>을 나와 가게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기유현이 계속 내 뒤를 따라왔다. 졸졸, 다섯 걸음 뒤에서 따라 걷는데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나는 한숨을 쉬고 뒤를 돌아보았다.

“왜 자꾸 따라와요?”

“……아.”

기유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그렇게 티 나게 따라와 놓고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가. 기가 막혔다.

“이상한 뜻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저도 던전 게이트 쪽에 볼일이 있어서요…….”

“아, 그래요…….”

돌아서서 다시 걷기 시작하자 기유현이 바짝 뒤를 따라와서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리을 씨, 각성자셨군요.”

<헌터 마켓>에 입장할 수 있는 사람은 등록된 각성자뿐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뭐, 그런 셈이죠.”

“그러면 튜토리얼 던전에 참가하시나요?”

“뭐, 그런 셈이죠.”

사실 물만 떠서 나올 생각이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기유현은 건성인 내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말을 이었다.

“저도 튜토리얼 던전에 참가하려던 참인데, 같이 가도 될까요?”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서 서 있던 기유현을 쳐다보았다.

커다란 눈에 길쭉한 몸이 아무래도 약해 보인다.

차가운 헌터 채널의 파티 모집 글들이 떠올랐다. 이 남자도 파티를 구하려다가 여러 번 거절당한 걸까.

“유현 씨는 <청라 길드> 소속이잖아요. 길드원 중에 같이 갈 사람 없어요?”

“아하하……. 다들 바쁘다고 안 된다고 해서요.”

매정하기도 하지.

보통은 같은 길드 소속끼리 파티를 짜는 법인데, 아무리 기유현이 약해 보인다고 해도 파티도 짜 주지 않는다니. 빅3 길드가 대단하다지만 같은 길드원에게 너무 매정하다.

나는 각성자라는 사실 외에는 등급과 직군 무엇도 이 남자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이 남자는 나 같은 사람까지 붙잡을 정도로 절박한 상황으로 보였다.

“그래서…… 리을 씨만 괜찮으면 파티를 맺고 싶은데요.”

“하지만 나는 비전투계라 도움이 안 될 걸요.”

“상관없습니다. 같이 가 주시기만 한다면.”

“전 도중에 나올지도 모르는데요.”

“괜찮습니다.”

기유현은 가능한 한 내 편의를 봐주겠다며 나를 설득했다.

이야기를 듣자니, 2인 파티로 참가 신청을 했는데 함께 가려던 헌터가 약속을 깼다는 것이다.

“취소하고 다시 신청하면 되잖아요.”

“그게……. 하하, 수수료가 만만찮거든요…….”

저런…….

기유현의 애원하는 눈빛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미심쩍기는 하지만…….

원하던 은신 망토를 사지 못했으니 나 역시 곤란한 상황이기는 해서, 파티원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뭐……. 같이 가요, 그럼.”

“정말요? 감사합니다!”

기유현이 환하게 웃었다. 정말로 기뻐 보이는 표정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이 있습니다.”

“뭔데요?”

“전에 주신 커피를 한 번만 더 마시고 싶습니다. 정말 맛있었거든요.”

“그건 다 떨어졌어요.”

맛있었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기유현은 눈에 띄게 낙담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아메리카노를 만들 생각이니까.

“대신 새 커피를 만들 테니까 그때 마시게 해 드릴게요.”

* * *

다음 날,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번쩍 눈이 떠졌다. 어제 일찍 자기는 했지만 드문 일이었다.

어쩐지 아까운 기분이라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지만 한번 깬 정신은 말똥말똥하기만 했다.

결국 그냥 일찍 일어나기로 했다. 침대 옆에서 고로롱거리며 자고 있는 미음이가 깨지 않도록 발소리를 죽인 뒤 1층으로 내려왔다.

1층의 커다란 창문으로 《어비스》의 모습이 보였다.

하늘을 향해 끝없이 솟아오른 던전은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했다.

대체 몇 층까지 있는 걸까.

지금도 여러 길드에서 아이템 파밍이나 수련을 위해 공략을 진행하고 있지만, 저 던전의 정체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다.

아주 강한 몬스터가 있다느니, 공략을 끝내면 신이 될 수 있다느니, 다른 세계로 이어진다느니 추측만 난무하는 상태.

오늘 내가 저기를 간다 이거지. 새삼 실감이 나면서 살짝 긴장이 되었다.

나는 재빨리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기유현과 만나기로 한 시각까지는 아직 넉넉했지만, 출발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게 다 뭐냐?”

약 두 시간 뒤, 잠에서 깬 미음이가 계단을 내려오면서 물었다.

“왜오오옹, 이상한 냄새가 나는구나.”

“이상한 냄새가 아니라 참기름 냄새야.”

“여기서 참기름 냄새가 대체 왜 나느냐!”

고소한 냄새가 싫은지 미음이가 털을 쭈뼛 세우고 아르르거렸다.

나는 신경도 쓰지 않고 하던 일에 열중했다. 바로 김밥을 싸는 일이었다.

“으악, 터졌다. 어떡해.”

속 재료를 너무 많이 넣는 바람에 김밥의 허리 부분이 터지고 말았다. 이건 어쩔 수 없이 내가 아침으로 먹어야겠다.

다시 김을 깔고 밥을 올린 뒤 속 재료를 놓았다. 이번에는 딱 적당한 크기로 보기 좋게 김밥을 썰 수 있었다. 나는 도시락 통에 줄을 맞추어 김밥을 착착 담았다.

“미음아, 너도 김밥 먹을래?”

“왜오오옹…….”

시선이 따갑다. 미음이는 내 모습을 기가 막힌다는 듯 쳐다보았다.

하지만…… 개인차가 있지만 튜토리얼 던전은 한나절은 걸린다고 한다. 최대한 빨리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오후가 될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도시락이 필요하고, 도시락이라면 김밥이 국룰이잖아.

터진 김밥으로 배를 채우고 나니 딱 출발할 시각이었다. 나는 미음이의 그릇에 넉넉하게 시리얼을 부어 준 뒤 짐을 꾸렸다.

짐이라고 해도 별다른 것은 없었다. 인벤토리에 에테르수를 담아 올 1ℓ짜리 물병과 <헌터 마켓>에서 산 하급 아이템 세트를 담았다.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모종삽도 챙기고, 초보자용 하급 바람막이를 걸쳤다. 방어력 2짜리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마지막으로 김밥을 챙기고 나자 소풍이라도 가는 것 같아서 약간 들뜬 기분이 되었다.

“그럼 미음아, 집 잘 지키고 있어.”

“……왜오옹.”

그릇에 고개를 박고 아침을 먹던 미음이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인사했다. 나는 문을 잠근 뒤 던전을 향해 출발했다.

약 3분 정도 걸으니 《어비스》의 던전 게이트에 도착했다.

코앞이지만 던전 게이트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관광지도 아닌데 굳이 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커다란 원탑 형태의 던전 앞에 푸른색 빛으로 반짝거리는 원판이 있었다.

원판 주위는 평소와 달리 튜토리얼 던전에 들어가려는 신인 헌터들로 북적거렸다.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나는 던전 게이트 근처를 서성거리며 기유현을 찾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연락처를 알아 둘 걸 그랬나.

“아, 여기예요!”

다행히 어렵지 않게 기유현을 찾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위로 솟아 있었기 때문이다.

크게 소리쳐 부르자, 기유현 역시 금방 나를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리을 씨, 안녕하세요.”

기유현은 겉에 검은 코트를 걸친 간편한 차림이었다. 주변의 헌터들이 번쩍번쩍 본격적인 장비를 갖춘 것에 비하면 대조적이었다. 깔끔한 옷차림 가운데 유일한 액세서리인 은빛 시계만이 눈에 띄었다.

“무기는 따로 없어요?”

“아하하……. 평소에 쓰던 무기가 고장 난 상태라서요.”

어째 불안한데…….

뭐, 튜토리얼이니까 괜찮겠지.

[파티를 맺었습니다.

파티원: 권리을, 기유현

경험치 분배 방식: 균등 분배.]

기유현이 준 파티 생성용 스크롤을 받는 순간 눈앞에 시스템 알림이 떴다. 파티를 맺는 동안 몬스터를 처치하면 경험치가 둘 모두에게 분배된다고 써 있었다.

“그럼 갈까요.”

입구에 오래 머무를 이유는 없었다. 기유현과 나는 곧장 던전 게이트 앞에 줄을 섰다. 다행히 줄이 금방금방 줄어들어 우리 차례가 왔다.

“권리을 씨, 기유현 씨 파티 맞으시죠.”

“네.”

“여기 튜토리얼 팔찌 받으세요.”

던전 게이트 앞을 지키던 공무원이 팔에 종이로 된 팔찌를 채워 주었다. 꼭 콘서트장 입장용 팔찌처럼 생겼다.

“위기 시에 이 팔찌를 찢으면 던전 내부에 대기하고 있던 헌터가 도와주러 갈 겁니다.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사용해 주십시오.”

공무원이 피로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튜토리얼 던전은 어디까지나 신인 헌터의 훈련을 위한 퀘스트 던전으로, 내부의 몬스터는 헌터의 능력에 맞추어 난이도가 조정되어 있다.

그러니 위험한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겠지만, 만약의 사태 때는 꼭 도움을 요청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밖에 안에서 길을 찾는 법이나 클리어하는 법 등의 설명이 거의 끝나 갈 무렵,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거 빨리빨리 좀 합시다. 기다리다가 속 터져 죽겠네. 그런 설명은 초짜들이나 듣는 거 아니요.”

돌아보자 비딱한 자세에 화려한 차림을 한 헌터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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