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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19/192)

19화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장비들을 갖춰 입었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공작새 같은 남자였다.

그 뒤로는 비교적 수수한 차림의 헌터가 네 명. 다소 특이한 파티 구성이었다.

“계속 거기서 시간 끌 거면 먼저 좀 갑시다.”

대답도 안 했는데 공작새가 멋대로 몸을 비집고 들어왔다. 공무원은 안 된다며 그를 밀어냈지만 막무가내였다.

에이,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공무원이 곤란해 보여서 그냥 공작새를 먼저 보내 주라고 말했다. 공무원은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피곤한 표정으로 서류에 체크했다.

“네, 지존 파티 입장 확인하겠습니다.”

그런데 익숙한 단어가 귀에 들어왔다.

한 10년 전에나 썼을까 싶은 촌스러운 이름. 최근에 이런 구린 단어를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어디였더라…….

“으하하하! 저런 설명 들을 필요 없어. 이 지존만 믿으면 튜토리얼 따위 금방 깨 줄 테니까. 초보들 빨리빨리 가자고.”

맞다, 닉네임 지존!

헌터 채널의 그 버스 모집 글의 주인이다. F급에게는 루비 100개를 요구했던 악덕 헌터.

“우와, 재수 없어…….”

던전 게이트 너머로 사라지는 지존과 초보 파티를 보며 말했다.

“C급인데도 저렇게 유세를 부리다니, S급 헌터쯤 되면 아주 고개가 천장에 닿겠어요.”

그러나 기유현은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음…….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개인의 인성 문제가 아닐까요. S급이라고 꼭 거만하다고 볼 수는…….”

이상하다. 한국에 10명도 안 되는 S급 헌터 이야기를 하는데, 왜 이 남자가 필사적으로 변명을 하지.

아무튼 다시 우리 차례가 왔다.

던전 입장 과정은 아주 간단했다. 기유현과 내가 원판 위에 올라서고, 공무원이 게이트를 작동시키는 것이 끝이었다.

푸른빛이 나를 뒤덮었고, 눈을 뜨자 웬 들판에 와 있었다.

띠링.

[대던전 《어비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현재 튜토리얼 실시 중입니다.

초보자 여러분의 건투를 기원합니다.]

[크투가가 당신의 방문을 기뻐합니다.]

어, 방금은 뭐였지.

그러나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알림은 사라져 버렸다.

나는 시스템 알림에서 눈을 떼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노을에 붉게 물든 하늘이었다.

듬성듬성 자라난 갈대와 관목을 부드러운 바람이 흔들고 지나갔다. 멀리 반쯤 무너져 내린 건물의 잔해가 보였는데, 꼭 외국 어디에 있는 것처럼 특이한 양식이었다.

던전 내부라기보다는 어느 유적지에 와 있는 것만 같다.

“여기가 그 어비스 안이라고요?”

하늘도 바람도 햇빛도 실감나게 느껴졌다. 살짝 축축한 공기만이 이질적인 정도였다.

그러나 나와는 달리 기유현은 조금도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느긋하게 주위를 살피며 방향을 가늠하는 모습은 오히려 이곳에 익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비스는 진짜 탑이 아니라 이공간이 중첩된 곳이거든요. 하나의 건물이 아니라 각각 다른 이공간이 연결되어 있다고 할까요. 다른 층에는 바다와 눈 쌓인 설원도 있습니다.”

“와……. 가 보셨어요?”

“아니요. 그게……. 들었습니다. 다녀온 사람한테요.”

기유현이 당황하면서 고쳐 말했다. 자세히 알기에 꼭 가 본 적 있는 사람 같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안 보이네요.”

“각각 다른 곳으로 떨어졌을 거예요. 시작 지점도 골인 지점도 각자 달라서 마주칠 일은 없을 겁니다. 자, 갈까요.”

기유현이 성큼 한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 뒤를 허둥지둥 따라가면서 물었다.

“어, 길을 알아요?”

“그게……. 그냥 감입니다.”

하긴 지도도 무엇도 없는 상황인데 일단 어디로든 가 보는 수밖에 없겠지.

그나저나 정말 던전 안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풍경이었다. 갈대도 나무도 전부 진짜 같다. 신기한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느라 걷는 것을 지루하게 느낄 틈이 없었다.

십여 분 남짓 들판을 걸으니 앞에 웬 젤리처럼 생긴 초록색 덩어리가 나타났다. 동시에 띠링 하고 시스템 알림이 울렸다.

[초보자용 그린 슬라임(F)이 나타났습니다.]

슬라임은 얼마 전 가게를 습격한 동굴흑곰과는 딴판으로 생겼다.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도 달려 있지 않았고, 반투명하고 매끈한 몸체가 부들부들 떨렸다.

한마디로 귀엽게 생겼다 이 말이다.

“뀨우우…….”

슬라임은 울음소리마저도 귀엽다.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나도 모르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간 순간이었다.

슬라임의 동그란 몸체가 순식간에 막처럼 넓게 퍼지더니 나를 덮치려 들었다.

“으아아앗!”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는데, 번쩍 하고 빛이 비쳤다. 눈을 뜨자 슬라임은 스르륵 녹아내린 다음이었다.

“어……?”

방금 뭐였지. 마법계 스킬이라기엔 주문을 외우지 않았고, 공격계 스킬이라기엔 손동작조차 보이지 않았다.

[파티원: 기유현이 초보자용 그린 슬라임(F)을 처치했습니다.]

[경험치 10exp를 얻었습니다.]

띠링, 하고 눈앞에 나타난 알림 창만이 방금 기유현이 해치웠다는 사실을 전했다.

“리을 씨, 괜찮아요?”

“네, 저야……. 방금 유현 씨가 해치운 건가요?”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기유현을 보며 물었다.

아까부터 혹시나 했었는데, 던전에 들어오고 난 다음부터 의심이 점점 짙어졌다.

이 사람…… 혹시 센가?

여유로운 태도며, 순식간에 슬라임을 녹여 버린 거 하며.

충분히 의심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기유현은 자기도 놀랐다며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하하……. 초보자용이라 그런가 난이도가 쉽게 설정되었나 봐요.”

자기가 세다는 걸 아직 모르는 건가. 말로만 듣던 힘숨찐? 아니면 하하 버스?

나도 모르게 ‘초보 헌터인 내가 너무 강함’의 세계에 들어온 걸까. 이거 사실 빙의물이었나요?

어느 쪽이건…….

‘친하게 지내야겠다.’

훗날 기유현이 유명해지면 ‘기유현하고 튜토리얼 던전 깬 썰 푼다.’ 같은 글 올려야지. 가게에 사인을 걸어 두고, ‘기유현이 마신 메뉴’라며 수십만 원짜리 커피를 파는 거다.

‘후후후…….’

“리을 씨.”

잠시 속물적인 생각에 빠진 내게 기유현이 말을 걸었다.

“아, 네, 네?!”

“조심하세요. 슬라임은 그렇게 위험한 몬스터는 아니지만……. 닿지 않는 편이 좋아요.”

“독이라도 있나요?”

“만지면 피부가 붓고 간지럽습니다.”

“윽…….”

그건 큰일이지. 조심해야겠다.

지나는 길에 계속 색색의 슬라임이 나타났다. 초록색, 파란색, 노란색 등 다양한 슬라임을 기유현은 간단하게 해치웠다.

주르륵, 녹아내린 슬라임이 땅에 흡수되어 사라져 갔다.

그 바람에 눈앞에는 시스템 알림이 연달아서 뜨는 중이었다.

[경험치 10exp를 얻었습니다.]

[경험치 10exp를 얻었습니다.]

[경험치 10exp를 얻었습니다.]

…….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경험치만 얻는 상태다.

이거 좀…… 개이득인데?

이대로라면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레벨 업이 가능할 것 같다. 이만하면 던전도 들어올 만한데?

슬라임을 팍팍 녹여 가며 걷다 보니 수풀에 뒤덮인 갈림길이 나왔다. 그때 가까운 곳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헉, 공짜 경험치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원래 목적을 잊을 뻔했다.

“유현 씨, 저 잠깐…….”

애초에 던전에 들어온 용건인 에테르수를 뜨러 가겠다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으핫핫핫! 지존 검법!”

맞은편에서 나타난 공작새…… 아니, 지존이 손에 든 검을 휘둘렀다.

그의 뒤에는 지친 표정의 초보가 여전히 네 명.

지존은 주변의 슬라임을 쓸어버린 뒤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지존님의 지존 검법에 걸리면 한 방이지! 으하핫!”

어떡해, 스킬명도 구리다…….

그리고 스킬을 쓸 때 소리는 왜 지르는 거지?

나는 기유현에게 눈짓했다.

‘만날 일은 없다면서요.’

‘운이 나빴군요.’

“여기는 이 지존님의 사냥터다! 잔챙이들은 걸리적거리기만 하니까 빨리 꺼지쇼.”

하필이면 많은 헌터 중에 저놈과 마주치다니, 귀찮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무시하고 슬그머니 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쿠우우웅, 쿠우우웅.

땅울림과 진동에 일순 몸이 휘청거렸다. 뭐지, 지진이라도 일어난 건가?

기유현 역시 이 상황은 예상 밖이었는지 놀란 표정이었다.

곧 눈앞에 시스템 알림 창이 나타났다.

[Warning!

튜토리얼 던전은 초보자 여러분의 성장을 돕기 위한 특별 던전입니다.

자신에게 맞는 난이도의 던전을 이용해 주세요.]

[강자 출현으로 튜토리얼 던전의 난이도가 변화합니다.

튜토리얼 던전―Special Hard가 시작됩니다.

더 강한 몬스터를 해치우고 더 많은 경험치를 얻어 보세요.]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망연자실하게 알림 창을 읽는데,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런, 이런……. 으핫핫핫!”

지존이었다.

“이거 미안하게 됐군. 초보자 여러분을 도와주려고 했지만…… 여기 들어오기에는 내가 너무 강한 모양이야. 나 때문에 던전 난이도가 올라가서 미안하게 됐수다.”

아닌 것 같은데.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때, 꼭 시간을 빨리 감기 하는 것처럼 서쪽 하늘의 해가 사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하늘 한가운데 뜬 붉은 달이 불길한 빛을 뿜어내는 것이, 딱 보기에도 이변이 일어났다는 느낌이 팍팍 들었다.

쿵, 쿵, 쿵-.

규칙적으로 이어지던 땅울림이 멎는 순간.

[던전 난이도 상승. 숙련자용 거대 슬라임(???)이 나타났습니다.]

거대 슬라임이 통, 통 자기 몸을 튕기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수풀을 젖히고 나타난 몸체는 어림잡아 5m도 넘어 보였다. 어둠 속에서 몸체가 형광 초록으로 빛났다. 딱 보기에도 닿으면 피부에 안 좋을 것 같다.

그 기괴한 광경에 몸을 뒤로 물리는데 지존이 나섰다.

“으하핫! 걱정 마십쇼. 크다고 해 봤자 슬라임. 이 지존이 해치우겠수다.”

오, 지금은 좀 멋있었다.

“이야압…… 지존 검법!”

지존이 손에 든 검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나 거대 슬라임은 통, 하고 가볍게 검을 튕겨 냈다. 그 바람에 지존이 손에서 검을 놓쳤다.

하지만 지존은 굴하지 않았다.

“큭……. 제법 단단하군. 하지만 내겐 아직 이 스킬이 남아 있다. 궁극기…… 지존의 아이언 팡!”

흐아아아압, 하는 기합을 외치는 순간 지존의 주먹에 어마어마한 힘이 응축되었다. 지존은 날렵하게 뛰어오르더니 거대 슬라임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퉁-.

그러나 지존의 주먹은 거대 슬라임의 매끈한 몸을 뚫지 못했다.

통, 하고 튕겨 나간 지존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윽.”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킨 지존은 결연한 표정으로 거대 슬라임을 노려보더니.

도망쳤다.

“어?”

어찌나 빠른지 금방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정도였다.

“자…… 잠깐, 같이 가요!”

파티 리더인 지존이 도망치자 당황한 초보자 무리도 후다닥 뒤를 따랐다.

순식간에 이곳에 기유현과 나, 그리고 거대 슬라임만이 남았다.

거대 슬라임은 번쩍번쩍 빛을 발하며 몸을 튕겼다.

……꼭 다음은 우리 차례라고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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