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하아. 리을 씨, 잠시 안전한 곳에 피해 계세요. 금방 끝날 테니까.”
가벼운 한숨을 흘린 기유현이 내게 나무 뒤쪽을 가리켰다.
“혼자서 괜찮겠어요? 방금 C급 헌터의 공격도 안 통했는데.”
“괜찮습니다.”
“그래요, 그럼.”
나는 두 번 묻지 않고 후다닥 기유현이 가리킨 곳을 향해 달려갔다. 내가 같이 있다고 해도 공격력 2짜리 모종삽으로는 도움이 안 될 테다.
비전투원은 얌전히 숨어 있겠습니다.
기유현이 거대 슬라임을 보며 무슨 손짓을 하는 것 같았다.
그때 하늘에서 빛의 그물이 떨어져 거대 슬라임을 뒤덮었다. 슬라임이 몸을 튕기지 못하도록 그물이 몸을 옥죄기 시작했다.
저런 스킬을 쓰면서도 기유현은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는다.
역시 이 남자 꽤 센 거 같…….
“……어?”
눈앞의 광경을 구경하며 손으로 바닥을 짚는 순간 아래로 몸이 쑥 꺼져 들었다.
주위가 어두워서 바닥이 잘 보이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나무 뒤는 가파른 비탈길이었다.
“……리을 씨!”
나는 비탈길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아, 아야야…….”
얼마나 굴렀는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주위는 수풀에 뒤덮여, 원래 있던 곳이 어디인지 보이지 않았다.
“유현 씨!”
불러 보았지만 들리는 대답은 없다.
[파티: 권리을, 기유현]
파티 창으로만 기유현이 아직 던전 안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통신이나 GPS 기능 같은 건 딸려 있지 않은 모양인지 위치를 찾을 수는 없다.
이 팔찌를 찢어야 하나.
나는 입장 때 받은 종이 팔찌를 보았다. 위기 시에 찢으면 도와주러 온다고 했지.
아직 에테르수를 얻지 못했긴 하지만…….
“뀨우우…….”
그때 팔찌를 찢으려던 내 앞에 붉은색 슬라임이 나타났다.
“으아악!”
나는 깜짝 놀라 모종삽(공격력: 2)을 마구 휘둘렀다.
그러나 슬라임은 나를 덮치지도 도망치지도 않고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뿐만 아니라, 자꾸 한쪽 방향으로 몸을 튕겼다.
이 이상한 동작은 꼭 내게 무언가를 알려 주려고 하는 것 같다.
“어……. 따라오라고?”
“뀨우.”
슬라임이 대답했다.
슬라임은 내 앞에서 계속 몸을 튕겼다.
따라가도 되는 걸까.
따라갔더니 ‘짜잔, 함정에 빠졌습니다.’ 하고 슬라임이 우르르 나오는 건 아닐까.
윽, 싸우면 질 것 같은데.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나는 이 슬라임의 뒤를 따라가기로 했다.
어차피 기유현과 떨어진 데다 길도 모르는 상태다. 여기 있어 봐야 다른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눈앞의 슬라임은 공격성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음, 이럴 때 망설이는 건 체질에 맞지 않는다. 따라갔다가 위험해질 것 같으면 잽싸게 팔찌를 찢지, 뭐.
주위는 어두웠지만 슬라임이 번쩍번쩍 빛을 내서 뒤를 쫓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노을이 져 있었는데 갑자기 어두컴컴해지다니 여기가 정말로 이공간이라는 실감이 났다. 더군다나 하늘에 뜬 붉은 달은 요사스러운 빛을 내뿜었다.
그런데 저 새빨간 달, 꼭 나를 쳐다보는 것 같단 말야.
에이, 기분 탓이겠지.
달이 어떻게 나를 쳐다보겠어. 눈이 달린 것도 아닌데.
하하, 하…….
기분 탓…… 맞겠지?
“뀨우.”
얼마쯤 슬라임의 뒤를 따라 걸으니 어디선가 졸졸 하는 물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5분쯤 더 들어가자 수풀 사이로 자그마한 강이 나타났다.
다행이다. 이대로 물을 뜨지 못하고 돌아가야 하나 했는데.
나는 인벤토리에 넣어 뒀던 페트병을 꺼내 강물을 담았다. 페트병 안에서 물이 은은하게 반짝거렸다.
띠링.
[아이템: 에테르수(水) (★★☆☆☆)
에테르가 풍부히 함유된 물. 식물의 생장에 도움을 줍니다.]
시스템 창에 뜨는 이름도 에테르수가 분명하다.
나는 여분으로 하나 더 물을 채운 뒤 인벤토리에 담았다. 무거운 페트병도 인벤토리가 있으니 안심이다.
이 페트병을 손에 들고 걸으려면 꽤 무거웠겠지. 각성하니 이런 점이 좋구나.
좋아. 목적은 달성했고, 이제 팔찌를 찢어 사람을 부르자.
이 넓은 던전 안에서 기유현을 찾을 방법도 없고, 슬슬 다리도 아팠다.
“뀨우, 뀨우우.”
그런데 슬라임이 계속 내 주변을 알짱거리며 울음소리를 냈다.
“……응? 뭐라고?”
“뀨우우우!”
슬라임 말이 통역되는 통역 아티펙트가 있다면 좋을 텐데. 들리는 말이라곤 ‘뀨우우’ 뿐이니 갑갑했다.
그렇다고 무시하기에는 슬라임의 모습이 어째 절실했다.
왜, 이런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키우던 개가 갑자기 앞발로 땅을 파 대서 그 자리를 삽으로 파 봤더니 잃어버린 물건이 나왔다거나. 밤중에 개가 짖어 시끄러워서 나와 봤더니 집에 불이 났다거나.
난 그런 이야기를 믿는 편이다. 동물이 뭔가 알려 주려고 할 때는 절대 그 내용을 무시하면 안 된다.
과연 이 슬라임을 동물이라고 봐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갑갑했는지 슬라임은 수풀 쪽을 향하더니 어느 한 지점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곳에는 웬 길쭉한 풀이 나 있었다.
“이 풀 말하는 거야?”
“뀨우.”
슬라임이 몸을 튕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게 알아들은 모양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풀인데, 약간 벼를 닮은 것도 같고…….
손으로 살짝 잎을 건드리는 순간, 익숙한 알림음이 울렸다.
[조건이 만족되었습니다.]
[스킬: 바리스타의 눈(D)을 획득했습니다.]
[바리스타의 눈(D)
상세: (Lv.1) 재료를 발견할 수 있다.]
갑자기 새로운 스킬이 생겼다.
와, 설명을 봐서는 꽤 좋은 스킬이다. 역시 동물(?)의 말을 듣길 잘했다.
마침 눈앞에 슬라임이 가리킨 풀이 있으니 스킬을 한번 시험해 볼까.
‘바리스타의 눈.’
곧장 아이템 정보가 눈앞에 나타났다.
[아이템: 던전 사탕수수(★☆☆☆☆)
종류: 식물
던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 줄기의 수액에서 단맛이 납니다.
비고: 마법 설탕의 재료.]
[에테르-위키에 ‘던전 사탕수수’ 항목이 추가되었습니다.]
알림 창에서 ‘설탕’이라는 단어가 일순 눈에 들어왔다. 앞에 ‘마법’이 붙으니 평범한 설탕은 아니겠지. 어쩌면 믹스커피 때 그랬던 것처럼 무슨 효과를 얻을 수도 있고…….
‘가져가도 될까.’
설탕을 만들 수 있으면 유용할 것 같다. 일단 가져가면 방법은 나중에 알아낼 수 있을 테니.
나는 모종삽으로 살살 던전 사탕수수를 떠서 인벤토리에 넣었다.
공격력 2짜리 허접한 무기인데 이럴 때 다 쓸모가 있었군. 하긴 원래 모종삽이니까 흙을 파는 데 쓰는 게 제격이지.
어둠 속에서 쭈그리고 앉아 던전 사탕수수를 캐던 난 작업에 집중하느라 바로 지척까지 인기척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툭.
“으아아악!”
“리을 씨, 괜찮으세요?”
“헉, 아, 네!”
고개를 돌리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기유현이 있었다.
아, 놀라라. 뭐가 나타난 줄 알았다.
괜히 소리를 지른 것이 민망해 탁, 탁 하고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낙하지점에 안 보여서 찾아다녔어요. 어디 다쳤어요?”
“아니에요, 구르긴 했는데 멀쩡해요.”
괜찮다고 했는데도 기유현은 사슴 같은 눈으로 나를 살폈다.
윽, 미남의 염려 어린 시선을 그대로 받으니 죄책감이 장난 아니었다. 슬라임의 뒤를 쫓느라 괜히 걱정하게 한 것 같아 조금 미안했다.
“그럼 갈까요.”
“네, 잠깐만……. 어.”
어, 방금까지 있던 그 빨간색 슬라임은 어디로 갔지.
덕분에 스킬을 얻었으니 고맙다고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기유현을 보고 놀라서 도망친 건지, 수풀을 아무리 살펴도 그 반짝이는 둥근 몸체는 보이지 않았다.
‘또 만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쉬운 마음을 살짝 남긴 채 수풀을 뒤로했다.
그 이후로는 별다른 일 없이 던전을 돌 수 있었다.
몇 번 슬라임이 나타났지만 기유현이 전부 녹여 버렸고, 나는 경험치만 먹었다. 시야에 들어오기도 전에 족족 슬라임이 녹는 것이 꼭 자동 전투를 켜 놓은 게임을 하는 기분이었다.
길을 따라 한참을 걷자 출구가 보였다.
출구는 입구와 비슷하게 푸른빛이 새어 나오는 원판 형태였다. 저 원판 위에 올라서면 던전에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목적도 달성했겠다, 이제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출구를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그때 뒤에서 쿠우웅, 하는 땅 울림이 들렸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출구 코앞까지 다 왔는데 보스 몬스터가 나타나 위기에 빠진다는 그런 식상한 전개는 아니리라 믿는다. 그냥 땅이 좀 흔들리는 게 아닐까……?
[보스 몬스터: 무지갯빛 거대 슬라임(???)이 나타났습니다.]
이런, 시스템 알림이 그런 내 희망을 산산조각냈다.
알림 창과 거의 동시에 수풀 저편에서 슬라임이 나타났다.
보스 몬스터라 그런가, 이번에 나타난 슬라임은 무지갯빛으로 반짝거리는 데다 엄청나게 컸다. 반투명한 젤리형 몸체가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모습은 위압감이 상당했고, 딱 보기에도 무지막지하게 세 보인다.
기유현이 생각보다 강한 것 같기는 하지만……. 저 슬라임도 해치우는 게 가능할까? 역시 혼자서 보스를 상대하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심지어 그냥 Hard도 아니고 Special이라잖아. 스페셜. 내가 영어를 잘하지는 못하지만 스페셜 뜻은 안다.
다행히 거대 슬라임과는 아직 거리가 멀었고 출구는 가까웠다.
나는 옆에 선 기유현을 올려다보았다. 기유현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산뜻한 표정으로 웃었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말했다.
“뛸까요?”
“뛰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출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평소에 워낙 운동을 안 했던 탓에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헉, 헉…….”
그래도 금방 도착할 것 같…….
아니, 무슨 슬라임이 저렇게 빨라? 탱탱볼이세요?
무지갯빛 슬라임이 몸을 재빠르게 통, 통 튀겨 대며 다가오고 있었다. 저 커다란 몸집을 탱탱볼처럼 튀길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슬라임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고, 감탄을 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나는 앞만 보고 있는 힘껏 달렸다.
이렇게 뛴 것은 고등학교 시절 체육 시험 이후로 처음이다. 그리고 그때는…….
‘너무 힘들어서 우유를 마시다 토했었지…….’
헉, 하마터면 주마등을 볼 뻔했다. 아니, 지금 그런 걸 떠올릴 때가 아니라니까.
겨우 원판 위에 발이 닿는 순간, 슬라임이 우리를 따라잡았다.
이어질 공격을 예상하고 몸을 움츠리는데 휙, 빛의 그물이 펼쳐지더니 슬라임을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