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192)

21화

그물에 붙잡힌 슬라임이 완전히 녹아서 비처럼 내리는 것이 출구 게이트의 푸른빛 사이로 보였다.

[보스 몬스터 ‘무지갯빛 거대 슬라임’을 처치했습니다.]

[튜토리얼 던전―Special Hard가 클리어되었습니다.]

[레벨이 5가 되었습니다.]

눈앞에 알림이 뜨는 것과 거의 동시에 푸른빛이 나를 감쌌다.

“돌아왔다…….”

던전 안은 내내 밤이었던 탓에 시간의 흐름을 정확히 알 수 없었는데, 어느새 한나절이 지나 저녁이었다. 노을이 대던전의 석벽을 붉게 물들였다.

“어떻게든 클리어했군요.”

나는 바람막이도 벗고 숨을 몰아쉬던 중이었는데, 기유현은 조금도 힘들지 않은 표정이었다. 같이 뛰었는데 나만 왜 이렇지. 역시 운동 부족인가.

어쨌거나 목적은 달성했다.

“오늘은 고마웠어요.”

“저야말로, 같이 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며칠 있다가 가게로 와요. 맛있는 커피를 마시게 해 줄게요.”

기다려라, 1000만 원.

아, 아니, 그만 본심이 튀어나와 버렸군. 기다려라, 아메리카노.

그리고 기유현과 헤어져서 가게로 돌아오다가 나는 중요한 일을 깜빡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 김밥 안 먹었네.

* * *

드르륵.

방 안은 기유현이 나왔을 때와 똑같이 조용한 상태였다.

창문 너머로 아무도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한 뒤 기유현은 조심스레 몸을 집어넣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안의 의자에 허리를 걸치려는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길드장님, 어디 가셨습니까!”

“큼, 크흠, 무슨 일이지, 한이성 헌터. 나는 계속 여기에 이렇게 가만히 있었는데.”

“어깨에 나뭇잎이나 떼고 말하세요.”

기유현은 황급히 어깨로 손을 가져가 외출의 증거를 털어 내려고 했다. 그러나 어깨 위에는 나뭇잎은커녕 먼지 한 톨 묻어 있지 않았다.

“거짓말입니다.”

……걸렸다.

“변명하지 마세요. 나가신 것 다 알고 왔습니다.”

한이성이 이미 확신을 하고 왔음을 알고 기유현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쌍둥이가 다 불었군.”

한이성, <청라 길드>의 부길드장이자 대외 업무를 담당하는 이 남자는 눈만 떼면 사라지기 일쑤인 길드장 때문에 골머리를 앓곤 했다.

아무리 대외 업무를 한이성이 전담한다지만 길드장 결재가 필요한 일도 있는 법이거늘.

그렇다고 원래 맡은 일만으로도 바쁜 와중에 하루 종일 기유현을 감시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대신 감시역으로 주신우, 주신희 쌍둥이를 붙여 두었다.

A급 헌터로 비교적 최근에 길드에 들어온 이 쌍둥이는 기유현을 동경하는 데다가 당장 급한 임무도 없다. 그야말로 감시역으로 적임이었다.

“거머리처럼 잘 따라다녀라.”

“네!”

“저희만 믿으세요.”

눈을 빛내며 끄덕이는 쌍둥이를 믿었건만.

기유현은 무슨 수를 썼는지 계속 따라다니는 쌍둥이의 눈을 피해 또 사라졌다.

워낙 동경하는 길드장이라 쌍둥이는 심한 말도 하지 못하고 쩔쩔매기만 했다. 땡땡이나 치는 길드장에게는 얼마든지 더 엄하게 굴어도 되는데 말이다.

오늘도 쌍둥이는 쪼르르 달려와 또 길드장님이 사라졌다고 고해바쳤다.

결국 다시 한이성이 나섰다. 나이는 기유현보다 열 살이 위지만 길드 설립 전부터 알던 사이였고, 길드 내에서 기유현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이성이 기유현을 찾았을 때는 이미 튜토리얼 던전에 들어간 다음이었다.

“……튜토리얼 던전 주변 통제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십니까.”

“우리 길드에선 아무도 같이 안 가 준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어.”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양심이 있으십니까, 없으십니까.”

한이성은 이마를 짚었다.

현 길드장이자 랭킹 1위 헌터.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어려운 존재인데, 갑자기 초보용 튜토리얼 던전을 같이 가자고 한다. 그런 말을 들은 헌터가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회사로 치면 사장이 갑자기 불러내서 커피 한 잔을 타 주며…….

“요즘 많이 힘들지?”

“그래도 김 주임이 성격은 참 착해. 나는 김 주임이 참 좋아.”

같은 말을 하는 상황이나 마찬가지다.

“혹시 길드장님이…… 저를 자르실 생각인가요? 제가 전에 스킬 쓰는 게 늦긴 했죠, 저 같은 건 도움도 안 되고…….”

“내 수준에는 튜토리얼 던전이 어울린다는 뜻인가?”

“크흑, 죄송합니다. 튜토리얼부터 다시 수련하고 오라는 말씀, 새겨듣겠슴다!”

길드장의 뜻이 정 그렇다면 퇴직을 하겠다, 어느 산속에 틀어박혀 폐관 수련을 하고 오겠다고 말하는 길드원들을 진정시키는 것도 한이성의 일이었다.

“……그렇게 그 사람이 신경 쓰이세요?”

잠시 불평을 늘어놓던 한이성이 어조를 바꾸었다.

자주 사라지는 길드장에 대한 질책은 이쯤이면 되었다. 다만 왜 굳이 초보자용 튜토리얼 던전에 갔는지 이유가 궁금했다.

그간 기유현은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었고 누구에게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다른 일에 관심을 보였다.

짐작 가는 이유는 역시 하나뿐이다.

“……그런 건 아닌데.”

그러나 기유현은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쌍둥이한테 다 들었습니다. 며칠 전에 그 던전 게이트 앞 카페에 찾아가셨다고.”

“어찌 된 게 길드 내에 비밀이라곤 없군.”

“이상 반응은 없었다고 하셨죠.”

“그렇기는 하지.”

한이성은 기유현이 신경 쓰고 있는 던전 게이트3가의 카페 주인을 떠올렸다.

몬스터가 나타난 사건이 있었을 때 본 게 다였지만 특별한 인상은 없었다.

서글서글하고 선량한 인상이라는 점이 기억에 남는 정도일까. 기유현이 신경을 쓸 만큼 수상해 보이지는 않았는데.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면 사람을 붙이겠습니다.”

“아니, 그러지 마.”

기유현은 곧장 한이성을 가로막았다. 그가 거듭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절대, 내가 따로 지시하기 전까진 접근하지 마.”

기유현은 생각에 잠겼다.

크투가의 반지.

장인 김덕이가 10년 만에 내놓은 마스터피스다.

손에 끼기만 하면 이계의 신 크투가를 소환할 수 있어 부르는 게 값.

원래는 아무리 경지에 오른 장인이라도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아이템인데, 김덕이가 기적적으로 제작에 성공했다.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물건. 즉, 유일품.

그가 기억하는 휘귀 전 과거에서, 크투가의 반지는 적의 손에 넘어갔다. 장인이 적에게 속아 물건을 넘겼기 때문이다.

기유현은 장인 김덕이가 그날, <헌터 마켓>에 몰래 방문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만나기 위해 찾아갔다.

반지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아니다. 이미 이계의 신과 계약을 맺은 그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었으니까.

다만 반지를 노리는 자들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전하려 했다.

그러나 기유현이 도착했을 때 이미 장인은 떠났고, 반지는 권리을의 손에 넘어간 뒤였다.

“좋은 아이템을 사셨군요.”

“네?”

그 어처구니없어 하는 표정이라니.

심지어 그녀는 크투가의 반지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듯해 보였다.

장인이 왜 굳이 정체를 감추고 <헌터 마켓>에 위탁 상점을 열었는지, 왜 반지를 그녀에게 넘겼는지는 모른다. 원체 짓궂은 성격이시니 무슨 생각이 있겠지.

그러나 권리을이 반지의 주인이 된 이상, 그녀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기유현은 적당한 핑계를 꾸며내어 권리을과 함께 튜토리얼 던전에 들어갔고, 스킬을 사용했다.

‘심연의 주시.’

심연의 주시는 헌터의 정보를 읽어 들이는 스킬이었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는 읽어 들일 수 없지만, 어차피 적어도 한국에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과에 따라서는 튜토리얼 던전 안에서 곧장 그녀를 제거할 마음마저 먹었다.

그런데.

이름: 권리을

클래스: □□ □□(F) (Lv.2)

스테이터스:

체력 100/100, 기력 100/100

힘: 8, 지력: 12, 민첩: 9, 운: 12

업적: ¾ÆÁÖ °·ÂÇÑ ±â´ÉÀ» °¡Á

ø ÇÁ·Î±×·¡¹Ö ¾

……

———END———

낮은 스테이터스로 보아 비전투계라는 권리을의 말은 사실일 테다. 그러나 클래스는 블록 처리된 데다가 글씨가 깨져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제임스의 생존, 크투가의 반지, 스킬의 오류…….

이 모든 것이 우연일까?

그럴 리가.

기유현은 우연을 믿지 않는다. 모든 신호, 그리고 그의 감이 권리을을 향했다. 그녀는 분명 뭔가 감추고 있는 것이 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은 긍정적일까, 부정적일까. 좀 더 지켜봐야 할 테다.

‘앞으로 계속 감시해야겠군.’

위험 요소라는 확신이 들면 그때 제거해도 늦지 않다.

다만…….

“맛있는 커피를 마시게 해 줄게요.”

그 말은 순수한 의미로 기대가 되었다.

한편, 한이성은 기유현을 보고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혹시 내가 영 엉뚱한 데를 짚었나?’

기유현이 던전 게이트 앞 카페를 신경 쓰는 것은 수상한 점이 있어서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감시를 시키긴커녕, ‘절대 접근하지 마.’라고 말한다.

더군다나 방금은 혼자 생각에 잠겼다가 엷은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이건 마치…….

그러고 보니 그 카페 주인과 기유현은 나이대가 비슷하다.

25살의 기유현과 23살의 권리을. 두 살 차이의 젊은 남녀.

그녀의 밤갈색 머리카락에 서글서글한 인상은 분명 매력적으로 느껴질 테다.

한쪽이 랭킹 1위의 S급 헌터인 기유현이라는 선입견을 제거하고 보자 이만큼 좋은 그림이 따로 없었다.

‘내가 눈치가 없었구나!’

올해로 결혼 5년차의 애아빠이자 한때 <우리 결혼했어요>의 애청자였던 한이성은 애틋한 눈빛으로 기유현을 보았다.

기유현은 13살 때 각성해서 헌터가 되었다. 최초이자 최강의 S급.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간 있었던 지난한 시간이 머리를 스쳤다.

기유현이 15살 때 한이성은 길드를 설립하고 기유현에게 길드장을 맡겼다.

한이성에게 커다란 야망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당시 소년은 아무 곳에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도 필요 없고, 아무와도 관계되지 않는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고요한 눈동자에 담긴 어둠이라니.

최강의 S급 헌터를 두고는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었지만, 그대로 두었다간 소년은 금방 어딘가에서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길드를 만들었다. 소년에게는 숨을 돌릴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으니까.

점차 기유현은 웃음을 되찾고 여유를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한이성은 알았다. 무감정한 낯으로 물끄러미 몬스터의 잔해를 바라보던 때에서 조금도 변화가 없다는 것을.

저 안에는 나 같은 사람은 짐작도 하지 못할 두려운 것이 들어있다.

그러나 지금 기유현은 한이성이 보아 온 이래로 가장 생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빛을 머금고 반짝거린다.

하긴 기유현이 벌써 성인이 되고도 5년이 흘렀다.

새까맣게 가라앉은 눈을 했던 소년이 정말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나이.

“길드장님, 정체를 밝힐 생각은 없으십니까?”

세월의 감개무량함을 느끼며 한이성이 물었다. 기유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은 아니야.”

하긴 아직 깊은 사이가 된 것도 아닌데 대뜸 정체를 밝히면 상대가 부담스러워하겠지.

‘말씀하신 대로 절대 방해 안 할 테니 힘내세요.’

그렇게 터무니없는 착각을 한 한이성은 기유현을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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