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 * *
콰앙-.
“으, 더 잔다니까……. 어어, 어?”
굉음과 함께 눈을 떴다.
설마 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벌떡 몸을 일으켰는데, 소리는 다름 아닌 텔레비전에서 난 것이었다.
“…….”
평소라면 내가 일어나자마자 밥을 달라고 바닥을 긁었을 미음이가 얌전했다.
가만 보니 텔레비전에 푹 빠져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일일 드라마 재방송이 나오는 중이었는데, 배우가 쾅, 소리를 내며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장면이었다.
어제 튜토리얼 던전에서 돌아온 뒤 나는 곧장 나뭇가지에 물을 주었다. 그리고 남은 김밥으로 배를 채운 뒤 금방 잠이 들었다.
얼마나 많이 잤는지 허리가 아프고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던전에서 걸어 다닌 것밖에 한 일이 없는데 뜻밖에 피곤했나 보다.
이제 나무가 잘 자랐나 확인하러 가야겠다. 이번에야말로 시들지 않고 제대로 뿌리를 내렸겠지.
그런데 내가 씻고 나올 때까지 미음이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 고양이가 이렇게 조용한 것은 처음 보았다.
“미음아, 나뭇가지 보러 가자.”
“…….”
“미음아, 배 안 고파? 밥 줄까?”
“…….”
“미음아, 그거 재밌어?”
“왜오옹, 지금 한참 중요한 장면이다. 악역이 여주의 아이를 바꿔치기한 사실이 밝혀지려고 하고 있다. 버려진 아이는 최연소 헌터로 각성해서 부잣집에 입양되었는데, 기억 상실이라 엄마를 기억 못 한다. 저번 화에서 엄마와 만날 뻔했지만, 악녀의 계략으로 길이 엇갈려서…….”
“아, 그래…….”
미음아, 네가 행복하다면 다행이야…….
어쩌다 보니 드라마의 처음부터 끝까지 스토리 설명을 전부 다 듣고 말았다.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예고편까지 다 끝난 뒤에야 미음이가 몸을 일으켰다.
“저 드라마 좋아하나 봐?”
“키야오옹! 어쩌다 본 거다.”
“이따 오후 두 시에 다음 화 한대.”
“누가 본다고 했……. 오후 두 시란 말이지.”
참 알기 쉬운 고양이다.
난 미음이와 함께 1층으로 내려와 이공간으로 향했다.
그런데 벽의 푸른 문을 지나는 순간 어딘가에 머리를 부딪쳤다.
“윽.”
대체 뭐에 부딪힌 거지? 나는 아픈 이마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아.”
내가 머리를 부딪친 것은 커다란 나뭇가지였다.
그러니까 내 몸통만 한 나뭇가지.
가지는 내 몸통만 했고 기둥은 양팔을 벌려도 다 껴안을 수 없을 만큼 굵었다. 각 가지마다 알알이 불그스름한 열매가 열렸다.
이공간을 가득 채울 만큼 커다란 나무가 나를 맞이했다.
상태 창에 하루 만에 자란다고 적혀 있기는 했지만,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까지 크게 자랄 줄은 몰랐다.
이런 식으로 나무를 키울 수 있으면 지구 온난화 문제는 금방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조금, 아니 상당히 황당하기는 하지만…….
아무튼, 이제 커피를 만들 시간이다.
[축하합니다! ‘서브 퀘스트: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을 수령해 주세요.]
[황금 뽑기 티켓 3장을 획득했습니다.]
커다랗게 자라난 위그드라실을 확인하는 순간 퀘스트 완료 알림이 울렸다.
어째 퀘스트 이름이 요상하더라니, 이만큼 크게 자라는 나무라서 그랬나 보다.
인벤토리에서 반짝거리는 황금 뽑기 티켓.
마음 같아서는 당장 뽑기를 하고 싶었지만 일단은 그대로 두었다. 뽑기는 경건한 마음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 처음 듣는다, 왜오옭.”
내 말을 들은 미음이가 말도 안 된다며 울었다.
“그건, 어느 폭풍우 치는 밤이었지…….”
“갑자기 무슨 소리냐?!”
“나는 그날 게임 랭킹 1위를 눈앞에 두고 있었단다.”
“폭풍우랑 아무 상관 없지 않느냐!”
파바밧, 앞발이 날아왔다.
무과금으로 랭킹 1위. 그건 정말 힘들고 고독한 길이었다.
개인 정보 팔기부터 광고 보기, 걷기까지……. 할 수 있는 노가다란 노가다는 다 해서 무료 재화를 모았다.
내 무한 노가다로 키운 소중한 카페.
하지만 마지막, ‘플래티넘 로열 고저스 찻잔 세트’를 뽑지 못해서 1위를 먹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자포자기한 바로 그 순간.
그만 터치 실수로 뽑기를 누르고 말았다.
여기까지 말했으면 결말은 짐작할 수 있을 테다. 그때 플래티넘 어쩌고 찻잔 세트를 뽑았고 결국 1위를 먹을 수 있었다.
“……이 일로 나는 알게 된 게 있어.”
“그게 뭐냐, 왜오옹!”
“뽑기는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해야 한다. 또…….”
“또?”
“나올 때까지 돌리면 100% 확정인 거다.”
“…….”
고양이한테 차가운 시선을 받으니, 인간으로서 좀 위기감이 드는군.
아무튼 그대로 알림 창을 끄려고 했는데, 다시 띠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업적: ‘세계수의 수호자’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이 적용됩니다.]
[업적: 세계수의 수호자
세계수 위그드라실을 무사히 살려냈습니다.
세계수가 당신에게 감사를 표현합니다.
보상: 힘 10 상승]
새로운 업적 알림에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꼭 보상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세계수의 수호자’라니, 어쩐지 멋있잖아. 굉장히 엄청난 일을 해낸 기분이 들었다.
더군다나 힘이 10 상승이라니 보상도 꽤 좋다.
튜토리얼 던전에서 기유현이 보스를 처치한 덕분에 단번에 레벨 5가 되었지만, 워낙 찔끔찔끔 오르는 탓에 아직 힘이 10밖에 되지 않았다.
이제 힘이 20. 업적 덕분에 두 배가 되었다. 어느 정도로 세진 걸까.
나는 옷소매를 말아 올려 팔뚝을 드러낸 뒤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아무리 힘을 주어도 알통 하나 생기지 않았다.
그런 내 모습을 보다 못한 미음이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그런 식으로 쓰는 게 아니다.”
“……그래?”
……두 번이나 고양이에게 차가운 시선을 받았다.
머쓱하게 옷소매를 내린 뒤, 나무 가까이 다가가 가지에 가득 열린 열매를 한 알 땄다.
앵두를 닮은 동그란 형태에 불그스름한 껍질, 이 특유의 냄새까지……. 한 입 베어 물자 새콤하면서 달착지근한 맛이 났다.
정말 커피 열매다.
‘세계수 위그드라실’이라는 엄청난 이름인데 커피 열매가 열리다니, 하찮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그럼 이제 이 열매로 커피를 만들어야 하는데…….
‘에테르-위키.’
[자격을 확인 중입니다. ……완료.]
[적격자: 권리을 확인되었……]
‘건너뛰기’
난 주르륵 나열되는 문자의 향연을 미련 없이 스킵하고 ‘커피 원두 만드는 법’ 항목을 열었다.
《커피 원두 만드는 법》
종류: 식,음료>커피
설명: 신선한 위그드라실의 열매로 커피 원두를 만드는 방법을 설명한다.
방법:
1) 수확한 열매를 물로 세척한 뒤 과육을 제거하고 씨앗만 남긴다.
2) 씨앗을 햇볕에 잘 말린다.
3) 약 사흘 뒤면 완성.
참 쉽죠?
연관 항목: 로스팅
설명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간단한 데에 비해 그렇게 쉬워 보이지는 않지만……. 일단 조금만 시도해 보자.
나는 일단 가게로 돌아가 적당한 크기의 양동이에 열매를 따서 담았다.
열매가 가득 찬 양동이는 생각보다 무거웠지만 힘 스테이터스가 올라간 덕분인지 어렵지 않게 들 수 있었다.
아, 설마 그래서 힘을 올려 주는 건가?
이제부터 힘쓸 일이 많아서?
에이, 설마…….
하지만 가득 열린 열매와 앞으로 남은 과정을 생각하니 그게 맞는 것 같다. 죽어라 뺑이 칠 나를 위한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자비인가.
다음으로 개수대에서 열매를 박박 씻어 불순물을 걸러 냈다. 그리고 창고에서 찾은 비닐 시트를 들고 이공간으로 돌아왔다.
“헉, 헉…….”
빽빽한 숲으로 둘러싸인 이공간의 구석, 나뭇가지가 드리우지 않아 햇빛이 비치는 곳에 비닐 시트를 깔고 열매를 부었다.
그냥도 무거운 열매는 젖으니 체감상 두 배로 무거워 이마에 땀이 맺혔다.
이제 이 열매에서 씨앗을 분리하면 된단 말이지.
그런데 어떻게?
다시 에테르-위키를 읽어 봤지만 ‘과육을 제거하고’라는 문구뿐,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일단 손으로 과육을 벗겨 내 보기로 했다. 손끝으로 눌러서 살살 벗겨 내자 안에 든 초록색 씨앗만 빠져나왔다.
좋아, 이렇게 하면 되는군.
“왜오오옭…….”
미음이도 옆에서 발톱으로 커피 열매를 까는 걸 도와주었다. 삐죽한 발톱 덕분인지 꽤 열매를 잘 깐다.
그러나 손으로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둘이서 한참 동안 열매를 깠는데도 남은 열매는 도통 줄어들 생각을 안 했다.
오늘 안에 이걸 다 깔 수는 있을까. 구부정한 자세로 자그마한 열매에 집중하다 보니 등과 허리도 아팠다.
아메리카노 한 잔 마시기가 이렇게 힘이 들 일인가.
“이게 아닌데…….”
“키야옹! 갑자기 무슨 소리냐?”
뭔가 잘못된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이게 아닌데.
……나 왜 이리 열심히 일하고 있지?
회귀를 하고 회사를 그만두고 이곳에 카페를 차리기로 하면서 한 결심이 있지 않았던가.
바로 적게 일하고 많이 쉬는 삶.
시간으로 따지면 주 2일 일하고 주 5일 쉬는 삶을 살기로 했는데.
안 돼, 어느새 저 간악한 시스템의 유혹에 넘어가 초심을 잃어버릴 뻔했다.
무고한 카페 주인을 황금 뽑기 티켓으로 꼬드기다니.
‘무서운 시스템 놈…….’
시스템이라면 일일이 손으로 하는 게 아니라 한 번에 착 해결되는 법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핸드폰으로 검색해 보니 자동으로 과육이 벗겨지는 기계가 나왔다.
‘아, 저런 기계가 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커피 생산국도 아닌 한국에서 구하기도 힘들 뿐더러 둘 곳도 없다. 거기다 나는 카페를 차리고 싶은 거지 커피 농장을 차리고 싶은 게 아니라고.
그렇다고 손으로 나머지 과육을 벗길 기력도 없었다.
“일단 조금만 쉬었다 하자.”
나는 위그드라실의 나무 둥치에 적당히 주저앉았다. 산뜻한 바람이 약간 땀을 식혀 주었다.
아, 그러고 보니 튜토리얼 던전에서 사탕수수를 가져왔었는데. 어디 심을 만한 곳이 있으려나?
나는 인벤토리를 열고 던전에서 가져온 사탕수수를 꺼내려 했다.
그런데 인벤토리에 처음 보는 빨간색 공이 있었다.
어, 이런 걸 넣어 뒀었나?
각성하고 나서 인벤토리가 생겼을 때 편리한 나머지 이것저것 손에 잡히는 대로 넣어 두기는 했다. 물티슈, 대일 밴드, 핸드크림, 남은 동전과 영수증, 이어폰 등등…….
하지만 이런 공을 넣은 기억은 없는데.
나는 인벤토리에서 빨간색 공을 꺼냈다. 밖으로 꺼내자마자 공이 확 커지면서 바닥에 착지했다.
“뀨우.”
들어 본 적이 있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뀨우, 뀨우우.”
빨간색으로 반짝거리는 젤리를 닮은 반투명한 몸체에 이 울음소리. 탄력 있게 몸을 튕기는 동작까지.
튜토리얼 던전에서 만난 붉은색 슬라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