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그때 어디로 가 버렸나 했더니, 사탕수수랑 같이 인벤토리 안으로 딸려 왔나 보다.
어떡하지, 다시 던전에 데려다 놔야 하나?
“이야옹! 희귀한 레드 슬라임을 잡아 온 거냐!”
슬라임을 보고 깜짝 놀란 미음이가 털을 쭈뼛 세웠다.
“잡아 온 건 아닌데……. 그런데 희귀하다고?”
“레드 슬라임은 슬라임 중 유일하게 몸에 독이 없는 종류거든. 그래서 다른 슬라임과 어울리지 못하는 데다 상위 몬스터의 습격을 받기 쉬워 수가 많이 줄었다.”
“으음…….”
그 말을 들으니 도로 던전에 데려가기도 좀 그랬다.
키울까?
슬라임을 애완용으로 키우는 경우가 꽤 있기는 했다. 주로 테이머 직군의 헌터가 길들인 슬라임이었지만.
이 빨간 슬라임은 테이밍된 상태가 아닌데도 얌전하기는 한데…….
고민하는 내 앞에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레드 슬라임을 에이전트로 임명할 수 있습니다. 임명하시겠습니까?
네 / 아니오]
요는 키워도 된다 이거지?
“여기서 지낼래?”
“뀨우우.”
슬라임이 위아래로 몸을 튕겼다. 그래, 시리얼을 먹는 데다가 드라마를 좋아하는 고양이도 키우는데 슬라임 한 마리도 키우지 뭐.
[이름을 지어 주세요.
이름 입력: ]
이름이라…….
으음, 리을, 미음 다음으로 생긴 식구니까 역시 비읍인가.
“비읍이는 어때?”
슬라임이 갑자기 격렬하게 몸을 좌우로 튕기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급기야 통, 통 튀면서 바닥에 엑스 자를 그렸다. 누가 봐도 분명한 거부의 표시였다.
“……그렇게 싫어?”
조금 상처받았다. 비읍이가 어디가 어때서. 내 동생이라는 뜻인데, 이 언니는 슬프단다. 정말 딱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이 슬라임은 계속 뀨우웃 거리며 반대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이름을 지어 주기로 했다.
“으음, 그럼…… 젤리랑 비슷하니까 젤리뽀?”
“뀨우웃!”
이것도 거부. 참 까다로운 슬라임이다.
“탱탱볼을 닮았으니까 탱탱이?”
“…….”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슬라임의 몸짓을 보지 않아도 답을 알 수 있을 만큼 서늘한 고요가 주위에 내려앉았다.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이럴 수가, 미음이 너마저.
그밖에 빨강이, 구슬이, 통통이 등 내가 생각한 이름을 말하자마자 족족 슬라임에게 거부당했다.
‘설마…… 내가 문제인가?’
나한테는 동물의 이름을 짓는 재능이 없는 걸까?
결국 반쯤 자포자기한 나는 될 대로 대라는 식으로 생각나는 이름을 입에 올렸다.
“슬라임이니까 라임이는 어때?”
“뀨우.”
드디어 슬라임이 긍정의 답을 했다. 앞뒤로 통통 튀어 오르는 가벼운 몸짓으로 보아 이름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다.
이렇게 갑자기 라임이라는 새 식구가 생겼다.
“뀨우, 뀨우우.”
라임이가 빙글빙글 내 주위를 돌았다. 통통 튀어 오르는 반투명하고 탱글탱글한 몸체는 보기만 해도 말랑말랑하고 감촉이 좋아 보였다.
레드 슬라임은 독이 없다고 했으니 만져도 되지 않을까. 한 번만 만져 보고 싶다.
“만져 봐도 돼?”
“뀨우.”
검지로 몸을 살짝 누르자 부드러우면서도 탄력 있는 감촉이 느껴졌다. 약간 점성이 있는 데도 손에 달라붙지는 않는 독특한 질감이었다.
주물, 주물, 주물…….
주물, 주물, 주물…….
헉, 잠시 정신을 놓을 뻔했다. 엄청나게 중독적인 촉감이다. 이대로라면 몇 시간이고 주무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얘는 밥을 뭘 줘야 하지.
애초에 동그란 젤리 형태로 생겨서 입이 있기는 한 건지 모르겠다. 뀨우, 하고 울기는 하지만 소리가 입에서 나는지조차 불분명했다.
달리 슬라임의 생태를 공부할 방법도 없고, 일단 라임이한테 물어보기로 했다. 대답을 알아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라임아, 너는 밥은 뭘 먹니?”
“뀨우우.”
라임이는 몸을 튕기며 위그드라실의 가지에 열린 커피 열매를 가리켰다.
“어…… 이걸 먹는다고?”
“뀨우.”
커피 열매를 한 알 따서 라임이에게 내밀었다. 라임이는 흐물흐물해진 몸으로 커피 열매를 받아 삼키더니, 곧 씨앗만 톡, 하고 뱉어 냈다.
씨앗…… 그러니까 커피 생두 말이다.
잠깐, 그럼 라임이가 열매의 과육만 먹어 치우고 씨앗만 남기는 게 가능하단 건가.
“라임아, 혹시 저것도 다 먹을 수 있어?”
“뀨우.”
어쩐지 뻐기는 듯한 톤으로 대답한 라임이가 한참 과육을 벗기다 내던져 둔 커피 열매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몸체를 막처럼 넓게 퍼뜨리더니 비닐 시트 위의 커피 열매를 파도처럼 덮었다.
툭, 툭.
씨앗이 비닐 시트 위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커피 열매의 과육이 전부 사라지고 씨앗만 남는 데는 채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방금까지 사람 한 명과 고양이 한 마리가 매달려서 깐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이었다.
배가 부른지 아까보다 느린 동작으로 라임이가 돌아왔다. 뒤로는 산더미같이 쌓인 씨앗이 보였다.
그러니까 지금 상황이…….
나+미음이 < 라임이?
약간 자괴감이 들기는 했지만…….
어쨌건 한 방에 일이 끝났다. 맙소사, 정말 좋은 새 식구가 생겼다.
[생두(★☆☆☆☆)
상태: 건조 중
커피 열매의 과육을 제거한 씨앗.
햇볕에 잘 말려야 좋은 커피를 만들 수 있습니다.
남은 시간: 사흘]
* * *
생두가 완전히 건조되기까지는 사흘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사흘 동안 내가 뭘 했냐면…….
“하아암…….”
그냥 놀았다.
웬일인지 시스템도 귀찮은 일을 시키지 않고, 당장은 기다리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이렇게 시간이 뜰 때 무얼 하겠는가. 운동? 자기 계발?
아니, 당연히 실컷 빈둥빈둥하는 거다.
세상의 온갖 시시껄렁한 일에 몰두하는 시간을 보낸 지 사흘째.
오늘도 나는 느지막이 일어나 침대에 그대로 누운 채 핸드폰으로 헌터 채널에 접속했다.
[이슈] 헌터 지존 님을 공론화합니다. (413)
[뉴스] 튜토리얼 던전―Special Hard 공략 헌터 오리무중 (133)
[공지] 비매너 유저 ‘지존’ 제재 관련 알림
[잡담] <헌터 마켓> 원래 이렇게 불친절한가요?ㅠㅠ (57)
…….
오늘도 세상은 평화롭군.
특별한 내용은 보이지 않아, 대강 글을 슥슥 넘기며 보다가 슬슬 배가 고파져서 몸을 일으켰다.
시계를 보니 오후 한 시, 슬슬 생두가 건조되었을 시각이었다.
씻고 1층으로 내려가니 미음이와 라임이가 뭐라 뭐라 떠들고 있었다. 둘은 그새 친해졌는지 자기들끼리 붙어서 잘 놀곤 했다.
더 가까이 다가가니 미음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왜오오옭, 알아듣겠느냐!”
“뀨우우…….”
“밥그릇은 여기, 화장실은 저쪽, 마실 것은 냉장고에 있다. 없는 건 인간을 닦달하면 나온다.”
“뀨.”
먼저 들어왔답시고 물건 위치를 설명해 주나 싶더니.
“아니, 텔레비전은 2층에 있다. 참고로 7시 30분에는 KBS를 봐야 한다.”
“뀨우우…….”
“안 돼. 그건 재방송으로 봐라. 키야옹!”
텔레비전 채널을 놓고 다투기 시작했다.
‘즐거워 보이네…….’
계속 옥신각신하는 둘을 놔두고 이공간에 들어가 커피 생두를 확인했다.
[생두(★★★☆☆)
상태: 건조됨
커피 열매의 과육을 제거한 씨앗.
잘 말라서 로스팅 후 커피를 만들기 적당하다.]
사흘이 지나 잘 마른 생두는 내가 아는 커피콩과 꼭 닮은 형태가 되어 있었다. 기나긴 여정이 드디어 끝이 보였다.
당장 생두를 들고 돌아와 볶을 준비를 했다.
다행히 가게에는 로스터가 있었다. 하지만 전문 로스터리 카페에서 쓰는 업소용이 아니라 가스 불에 올려서 볶는 가정용 제품이었다.
원래는 로스팅된 원두를 사서 쓸 생각이었으니까.
‘그랬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시스템의 퀘스트 보상과 커피의 특수 효과가 아니었다면 그냥 평범한 카페 개업 준비를 했을 텐데.
나는 로스터를 가스 불 위에 올려 데운 뒤, 철망 안에 잘 마른 생두를 넣었다.
이 로스터는 오래전 취미로 홈 로스팅을 하려고 샀다가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처박아 둔 것이다.
고맙다, 과거의 나.
이게 없었다면 로스터를 주문하고 배송 받는 데 또 며칠을 기다려야 했을 테다.
물론 그때의 나는 위그드라실의 열매로 만든 커피를 볶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만.
온도가 올라가고 철망이 빙빙 돌면서 원두가 볶아지기 시작했다. 이제 고소한 냄새가 나면서 크랙이 발생할 텐데…….
어라?
왜 아무런 변화가 없지?
가스 불도 확실히 켜졌고 로스터의 온도도 정상이다. 그런데 안에 든 커피는 조금도 구워지지 않았다.
또 이 패턴…….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쩐지 아주 귀찮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예감 말이다.
‘에테르-위키’
눈앞에 나타나는 문자열을 모조리 스킵한 뒤 로스팅 항목을 열었다.
특별히 이상한 내용은 없는데…….
재빨리 로스팅 항목을 눈으로 훑다가 마지막에 조그맣게 적힌 글자에 시선이 닿았다.
3pt로 적힌 글자는 눈을 크게 뜨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크기였다.
[*주의: 로스팅에는 에테르로 피운 불을 사용해야 합니다. 평범한 가스 불로는 볶아지지 않으니 조심하세요.]
에테르로 피운 불? 굉장히 불길한 단어다.
구석에 배를 깔고 앉아 로스터가 돌아가는 것을 구경하던 미음이와 눈이 마주쳤다.
“왜오옹…….”
할 말이 있다는 듯 자그맣게 울고는 내 눈치를 보았다.
또 이 패턴 너무하지 않아?
어쩐지 요 며칠 귀찮은 알림도 안 띄우고 조용하더라니, 이 순간을 위한 거였어?
배신감이 어마어마했다. 시스템 이 녀석 너무 원 패턴의 식상한 전개로 나를 위험한 곳으로 보내 버리려 하는 것 같은데.
안 해. 그게 무엇이든 안 할 테다.
불을 어떻게 들고 오란 거야.
그러나 그때.
갑자기 손에 끼고 있던 반지의 빨간 돌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헌터 마켓>에서 할머니에게 받은 바로 그 반지다.
“어, 이거 왜 이러…….”
화르르.
가스 불과는 다른 짙은 붉은색 불꽃이 로스터의 하단부에 옮겨 붙었다. 불이 붙은 로스터가 빙글빙글 돌아갔다.
오, 된다.
곧 로스터에서 고소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