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192)

24화

* * *

“드디어 이날이 왔구나…….”

로스팅을 하고 다시 사흘 뒤, 드디어 잘 숙성된 원두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헌터 마켓>에서 산 반지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덕분에 간악한 시스템의 방해를 회피했으니까.

나는 상자를 열고 안에 든 원두의 상태를 확인했다.

[원두(★★★☆☆)

상태: 숙성됨

로스팅 후 숙성된 원두.

적절히 숙성되어 커피를 만들기 적당하다.]

“잘 익었군, 왜옭.”

“뀨우.”

이렇게까지 DIY 할 마음은 아니었는데. 자신이 지은 벼로 밥을 지어 먹는 농부의 마음이 이런 걸까.

‘진짜_최종_마지막_final_원두’의 선명한 갈색빛을 보자 마음이 뿌듯해졌다.

어떤 맛이 날지 궁금했으므로, 당장 커피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원두를 손에 넣었으니 다음 과정은 비교적 간단했다. 우선 지난번에 얻은 스킬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바리스타의 추출.’

스킬을 쓰는 순간 에스프레소 추출법이 머리에 떠올랐고, 손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먼저 그라인더로 원두를 갈았다. 포터필터에 곱게 갈린 원두 가루를 담고, 도장으로 꽉 눌러 탬핑했다. 알맞게 세팅된 머신을 작동하자 곧 에스프레소가 추출되었다.

……꿀꺽.

풍부한 커피 냄새에 나도 모르게 입맛이 돌았다.

커피 잔에 뜨거운 물을 담은 뒤 에스프레소를 붓고 섞으니 드디어 아메리카노가 완성되었다.

[아이템: 아메리카노(★★★☆☆)

상태: 좋음 (남은 시간: 00:30:00)

효과: 디버프를 무효화합니다. (01:00:00)]

“그저 이 커피 한 잔이 갖고 싶었습니다…….”

아메리카노를 만들기 위해 그동안 한 노가다를 떠올리니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디버프 무효화라니, 효과도 사기급이다.

이번에는 유리컵에 얼음 여덟 조각과 차가운 물을 담은 뒤 에스프레소를 부었다. 뜨거운 것도 좋지만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마시고 싶었다.

잘 섞이도록 살짝 저어 주자 완성이었다.

[아이템: 아이스 아메리카노(★★★☆☆)

상태: 좋음. (남은 시간: 00:30:00)

효과: 스킬을 사용해도 기력이 소모되지 않습니다. (01:00:00)]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효과 역시 상당히 유용해 보였다. 기력 소모량이 큰 고급 스킬을 쓸 때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 날이 올진 모르겠지만…….’

“얼른 마셔 보아라!”

“뀨우우.”

가만히 아메리카노의 상태 창을 들여다보고 있자 옆에서 성격 급한 고양이와 슬라임이 나를 재촉했다.

그럼, 내 고생이 담긴 이 귀중한 커피 두 잔, 한번 마셔 보겠습니다.

먼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입으로 가져갔다. 부드러우면서도 깊은 맛이 몸을 따뜻하게 감싸 주었다. 굳은 몸에 힘이 풀리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다음으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이번에는 산뜻한 맛이 입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차가우면서도 끝맛이 깔끔했다.

잔을 끝까지 비운 순간 퀘스트 완료 알림이 울렸다.

[축하합니다! ‘메인 퀘스트: 바리스타의 길 (1)’을 완료했습니다.

보상을 수령해 주세요.]

[경험치: 200exp를 획득했습니다.]

[100루비를 획득했습니다.]

[새로운 레시피 카페 기본 5종 메뉴를 획득했습니다.]

보상을 받았다는 만족감.

드디어 커피를 완성한 기쁨.

평온함을 엄어선 고도의 집중력.

“……바로 지금이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

“……뀨?”

나는 인벤토리에서 지난번 퀘스트에서 얻은 황금 뽑기 티켓을 선택했다.

완벽한 무념무상의 상태.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뽑기를 할 타이밍이었다.

[현재 황금 뽑기 티켓 소지 수: 3]

[손잡이를 당겨 주세요.]

눈앞에 나타난 반투명한 뽑기 통의 손잡이를 당겼다. 빠르게 캡슐이 뒤섞이는 홀로그램의 끝, 나온 것은 하얀색 캡슐이었다.

[민첩 스테이터스가 1 올라갑니다.]

[루비 1개를 획득했습니다.]

남은 기회는 단 한 번뿐.

“후우, 하…….”

“쯔쯔, 골든 아이템이 그렇게 쉽게 나오는 게 아니다.”

미음이의 핀잔을 무시하고, 바로 손잡이를 당겼다.

“됐다!”

성공이다!

아까와는 다른 화려한 이펙트와 함께 황금빛 캡슐이 아래로 빠져나왔다.

[아이템을 획득했습니다. 인벤토리를 확인하세요.]

[아이템: 스테인리스 스틸 보온병 (★★★☆☆)

음료의 온도를 오래 유지해 줍니다.

용량: 700㎖]

인벤토리 안에는 흔히 쓰는 보온병이 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냥 보온병.

전혀 좋은 아이템이 아니라 일순 실망했지만, 설명을 읽으니 어떤 가능성이 머리를 스쳤다.

어쩌면…….

“왜 그러느냐? 아무리 실망스러워도 자포자기하면 안 된…….”

“잠깐만!”

“왜오옭?!”

나는 곧장 아메리카노를 한 잔 더 만들어 보온병에 담았다. 그리고 상태 창을 확인했다.

[상태: 좋음 (남은 시간: 00:30:00)]

[상태: 좋음 (남은 시간: 00:30:00)]

…….

역시.

커피를 보온병 안에 담아 둔 동안에는 남은 시간이 줄어들지 않았다.

이 보온병만 있으면 가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좋은 상태의 커피를 마시게 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게 안 생겨서는 좋은 아이템이잖아?

뽑기에 성공한 기쁨에 감격하는데, 순간 지이잉 하고 핸드폰이 울렸다. 얼핏 보니 문자였다.

뭐지? 문자가 올 만한 일은 없는데.

평소라면 그냥 광고 문자려니 넘겼을 텐데, 어째서 이렇게 불안하게 느껴지는 걸까.

……꿀꺽.

에이, 기분 탓이겠지.

심장이 쿵쾅거리는 컷은 카페인 때문일 테고 목덜미에 오싹 소름이 돋은 것은……. 그래, 아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기 때문일 테다.

나는 핸드폰 잠금을 풀고 문자를 확인했다. 뜻밖에 문자를 보낸 상대는 권지운이었다.

[리을아, 가게는 잘 되어 가니?]

[언제 한번 길드로 와라. 이야기 좀 하자^^]

이질적인 말투. 그보다 더 위화감이 느껴지는 웃는 이모티콘.

쿵,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 * *

다음 날.

나는 핸드폰으로 권지운이 남긴 문자를 다시 보고 있었다.

윽. 짧은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 속이 따끔거린다.

권지운은 나를 이런 식으로 부르지 않는다. 제 길드 사람을 시켜 용건이나 전달할 뿐, 내가 길드에 가는 것도 반기지 않았는데.

게다가 ‘^^’ 이런 이모티콘은 또 뭐람.

으윽…….

쓰린 속을 몇 번인가 붙잡았을 때 가게에 기유현이 왔다.

전에 말한 대로 맛있는 커피를 마시게 해 주겠다고 연락한 참이었다.

던전 안에서는 핸드폰이 연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연락이 늦을 수도 있으니 느긋하게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기유현은 문자를 남기고 약 20분 만에 가게에 도착했다.

여기 <청라 길드> 건물이랑 꽤 멀지 않나?

그러나 여전히 반짝거리는 얼굴에 생글거리는 웃음을 걸고 문을 두드린 기유현은 아주 여유로워 보였다.

“기유현 씨는 던전 안 가요?”

어쨌건 새 커피를 마시게 해 주기로 약속한 건 사실이다. 나는 원두를 그라인더에 넣으며 물었다.

“하하, 길드원들이 내가 같이 가면 부담스러워 해서요.”

미숙련 헌터가 파티에 끼면 그만큼 전력 손실이라 부담스럽단 뜻인가.

“그리고 한이성 부길드장도 일찍 가 보라고 했고요.”

“……그래요?”

“네,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기유현의 말에 따르면, 우리 가게에 볼일이 있다고 하자 한이성 헌터가 당장 가라며 보내 줬다고 한다.

얼마 전 C급 인스턴스 던전이 발생해 각 길드가 모두 바쁘다고 하던데.

말을 들어서는 꼭 기유현을 던전에 데려가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다.

헌터계는 적자생존이 당연하다지만 안쓰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청라 길드>의 메인 파티가 유명하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던전도 같이 돌지 않다니.

전에 봤을 땐 이 사람도 꽤 강한 것 같았는데 말이다.

그건 그렇고.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만들며 계속 신경 쓰이던 사실을 불쑥 입에 올렸다.

“저, 사람이 안 하던 일을 갑자기 하는 건 어떤 경우일까요.”

“무슨 일 있었나요?”

기유현은 주위를 뽈뽈 돌아다니는 라임이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어디서 애완용 슬라임을 데려왔냐고 묻기에 근처에서 주웠다고 대답했다. 음, 거짓말은 아니지. 인벤토리에 들어 있는 걸 주웠으니까.

“아니요, 그냥 일반적으로.”

사실은 커피를 만들면서도 계속 권지운의 문자가 신경 쓰였다.

처음에는 내가 잘못 읽었나, 우연히 권지운과 이름도 같고 번호가 비슷한 스팸 문자가 아닌가 고민할 정도였다.

그러나 현실 부정은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아무리 봐도 권지운에게서 온 문자가 맞았다.

일단 며칠 뒤에 길드로 찾아가기로 했는데, 대체 무슨 일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글쎄요. 일반적으로는…….”

“일반적으로는요?”

기유현의 손길을 피하며 라임이가 통통 몸을 튕겼다.

“죽을 때가 되었다든가.”

“에이, 그건 아니죠.”

권지운은 국내 최고의 힐러다.

그리고 회귀 전에도 아픈 데 없이 건강하기만 했다. 아파서 갑자기 사람이 바뀐 것은 아닐 테다.

기유현이 약간 기가 막힌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다시 말했다.

“심경의 변화가 일어날 만한 사건이 있었다거나? 예를 들어…….”

“예를 들어서요?”

“회귀를 했다거나.”

덜컥,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기유현은 여전히 라임이의 반투명한 몸을 감상하는 중이었다. 비스듬히 고개를 돌린 탓에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뭐, 어디까지나 예시니까요. 시스템이 각성자를 만들어 낸 지 20년이 흘렀지만 회귀자는 이제껏 관측된 바 없습니다. ……아직까지는요.”

“그, 그렇죠. 아하하…….”

갑자기 회귀라고 말해서, 내가 회귀한 사실에 대해 아는가 하고 깜짝 놀랐네.

왜 그냥 하는 말도 저렇게 의미심장하게 하는 거지. 사람 놀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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