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데면데면한 사이인 권지운이 갑자기 그런 문자를 보낸 이유는 역시 그건가.
애써 그 경우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떠오르는 결론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각성한 걸 들킨 게 아닐까.
<던전관리청>에 각성자 등록도 했고 <헌터 마켓>도 갔고 튜토리얼 던전도 다녀왔으니 지운이 알아차릴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헌터 따위에 관심 보이지 말고 평범하게 지내라.”
냉랭한 그 말이 떠올랐다.
내가 귀찮게 굴지 않기를 바랐을 텐데, 각성했다는 사실을 알면 뭐라고 반응할까.
으윽…….
부담감에 심장이 꽉 조여 오는 것 같았다.
“리을 씨?”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선 내일 생각하고, 지금은 커피를 만드는 데 집중하자.
‘내 손안의 카페.’
에스프레소를 추출한 뒤 스킬을 사용해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만들었다. 뜨거운 물에 에스프레소를 붓자마자 고소한 냄새가 주위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런데 커피를 만들고 나니 원두가 얼마 남지 않았다.
역시 로스터가 소용량이라 금방 줄어드는군.
나는 상자에서 생두를 꺼낸 뒤 로스터에 넣고, 반지를 이용해 불을 붙였다.
화르르, 붉은 불꽃이 로스터를 데우기 시작했다.
“저어……. 방금 뭘 하신 거죠?”
그 광경을 보던 기유현이 물었다.
“네? 아, 유현 씨가 한 말이 맞았어요. 이 반지 정말 좋은 아이템이더라고요.”
“아, 네…….”
자기 말이 맞는다고 했는데도 그는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이 반지의 능력으로 불을 붙이면 커피에 불 맛을 내는 데 좋아요.”
심지어 불을 붙일 때 자동으로 로스팅 정도도 조절 가능했다.
위그드라실의 열매로 만든 원두는 약하게 로스팅하면 하면 꽃향기가 나면서 산미가 강해지고, 강하게 로스팅하면 견과류 냄새와 고소한 맛이 강해졌다.
절묘하게 맛이 달라지는 것이, 카페인 중독만 걸리지 않는다면 하루 종일 몇 잔이고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효자 아이템을 싸게 잘 샀다.
“크투가의 반지를 가스버너로 사용하다니…….”
“네?”
“아닙니다. 뭐……. 잘 쓰신다니 다행입니다.”
싱겁기는.
나는 완성된 뜨거운 아메리카노 잔을 기유현에게 내밀었다.
“아무튼, 마셔 보세요.”
기유현이 커피 잔을 들고 한 모금을 마셨다.
나는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아메리카노의 맛을 보여 주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 아메리카노는 그야말로 내 노동으로 빚은 노동집약적인 커피다.
다른 사람이 맛을 어떻게 느낄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꿀꺽.
아메리카노를 마신 기유현의 표정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런데 갑자기 기유현의 머리 위로 긴 막대 표시가 떠올랐다. 그가 커피를 마실수록 황금빛 게이지가 차오르더니 거의 100%까지 차올랐다.
반짝반짝하는 효과까지 붙어 있다.
저건 뭐지?
“야오오옹(만족도 표시다. 커피에 만족할수록 올라간다).”
‘믹스커피를 만들었을 때는 저런 게 없었잖아?’
“왜옭(레벨이 올라서 새로운 기능이 생긴 거다).”
아, 나 레벨 5였지. 그래서 저런 게 보이게 됐구나.
“왜우웅(레벨을 더 올리면 더 많은 능력을)…….”
뒷말은 못 들은 걸로 했다.
은근슬쩍 나를 던전에 집어넣으려 한단 말이지. 누가 다시 들어갈 줄 알고.
커피를 전부 마신 뒤 기유현이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어때요?”
머리 위의 황금빛 게이지가 이미 답을 알려 주었지만, 나는 기대를 품고 물었다.
“굉장히 맛있습니다.”
“그래요?”
“쓴 것 같으면서도 별로 쓰지 않고, 진한데도 목 넘김은 부드럽군요. 여러 커피를 마셔 봤지만, 정말로 이런 맛은 처음입니다. 더군다나 이걸 마시자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입니다.”
나 역시 아메리카노가 맛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격찬에 마음이 들떴다.
거의 가득 찬 황금빛 막대로 보아 빈말도 아니었다.
기유현은 그대로 남은 아메리카노를 남김없이 비우더니 물었다.
“이 아메리카노의 가격은 어떻게 되죠?”
“어……. 가격이요?”
“카페니까, 이걸 판매하려는 게 아닌가요? 이런 맛이라면 얼마든지 주문하고 싶어지는데요.”
“그건 그런데…….”
실은 아직 정하지 못했다.
이제까지는 퀘스트 횟수를 채우기 위해 믹스커피를 마구 만든 게 다라 돈을 받지 않았다.
오늘 기유현 역시, 그냥 커피를 맛보여 주려고 초대한 것뿐이다.
하지만 추후에 카페를 오픈하면 돈을 받을 텐데.
그런데 가격을 정하기가 생각보다 어려웠다.
평범한 아메리카노 가격을 받자니 너무 싼 것 같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비싸게 책정하려니 팔리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나의 의논 상대라고 해 봐야 동물 두 마리뿐이다.
‘백만 원은 받아야 한다, 키야옭!’
‘뀨우, 뀨우웃.’
둘 다 별로 도움은 되지 않았다.
띠리링.
그때 익숙한 알림음이 울렸다. 나는 눈앞에 나타난 반투명한 창을 바라보았다.
[메뉴를 판매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가격을 설정해 주세요.]
[아메리카노: 0 루비]
숫자 0 위에 커서가 깜빡거리며 숫자를 지정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단위가 루비다.
헉,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그래, 어차피 헌터를 주 고객으로 하는 카페인데 돈을 루비로 받는 게 낫겠다. 헌터는 항상 루비를 지니고 있고, 가격에 거부감도 덜할 테니까.
10만 원이라고 하면 비싸게 느껴지지만, 1 루비라고 하면 별로 비싸게 느껴지지 않는다.
게임에서 유료 아이템 가격을 현금이 아니라 ‘다이아’나 ‘주얼’ 등으로 표시하는 것도 바로 그래서다.
10만 원으로 카드 한 장을 뽑았다고 하면 현타가 느껴지지만, 100주얼로 뽑았다고 하면 대박난 것 같잖아.
숫자 0을 선택하자 ‘추천 가격: 1 루비’라는 문자가 나타났다. 나는 일단 시스템의 추천대로 1을 입력했다.
[가격이 설정되었습니다.]
“돈은 루비로 받으려고요. 1 루비예요.”
그 순간 다시 띠리링, 하고 알림 음이 울렸다.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메인 퀘스트: 바리스타의 길 (2)
당신도 이제 당당한 바리스타.
카페 기본 5종 메뉴(카페라떼, 카푸치노, 카페모카, 바닐라라떼, 캐러멜마키아토)를 완성하여 판매 메뉴를 늘려 보세요.
카페 기본 5종 메뉴 완성하기: 0/5]
보상: 경험치(200exp), 랜덤 레시피, ???]
[서브 퀘스트: 궁극의 커피
궁극의 커피로 진정한 친구와 깊은 인연을 맺어 보세요.
궁극의 커피 전달하기: 0/1
보상: 스킬 포인트 1]
이름만 봐도 귀찮은 일을 시킬 듯한 알림은 일단 전부 스킵했다.
그때 마지막으로 알림이 하나 더 떴다.
[업적: ‘첫 번째 열쇠’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을 수령해 주세요.]
[업적: 첫 번째 열쇠
축하드립니다.
첫 번째 열쇠를 획득했습니다.]
그런데 업적 명이 영 이상했다.
내가 만든 커피를 가장 먼저 마신 사람은 김지나다. 그 다음으로 제임스가 마셨으니 기유현은 세 번째.
왜 첫 번째라고 하지?
‘열쇠’라는 건 또 뭐지?
알림 창에는 짧은 글귀뿐 자세한 설명이 없어 어째 찜찜했다. 일단 준다는 보상을 거절할 이유는 없기는 하지만…….
‘보상 수령.’
[업적 보상: 이공간에 새로운 구역이 열렸습니다.]
어…….
생각지도 못한 보상이 들어왔다.
3장. 그 커피에 그 쿠키
한국 No.1 헌터 커뮤니티 - 헌터 채널
자유게시판
- 랭킹, 길드 추노 금지. 현피는 던전에서
*system: 삭제된 게시글입니다.
[잡담] 튜토던전 보스 잡은 헌터 아직 안 밝혀짐??? (24)
추천: 1 / 비추: 3
작성자: ㅇㅇ
관리청 빠진 거 아니냐
철밥통 놈들ㅡㅡ
갓성: 아직 안 나옴?
└트리플셋: 그냥 발표 안 한 거 아님?????
└ㅁㅁ: 작년까지는 우수자 다 발표했잖아 왜 이번만 안함??
└ddd***: ㅁㅈ… ㄹㄹ 이상함.
군산일짱: 관리청이 왜 철밥통이냐 월급도 쥐꼬리만 한 거
└A급포션팜: 일반직만 그렇지 헌터직은 돈 ㄹㅇ 많이 받음ㅋㅋㅋ DE등급이면 길드에서 구르는 거보다 공무원이 나음
└ㅁㅁ: 일겅
rba***: 이번에 튜토한 헌터 있음?? 이슈게 보니까 변이 일어났다며 [링크]
└폰스급: 원래 튜토에는 보스 안 나오는 거 아님?;;
└힘없찐: 스페셜 하드라고 뜨던데 아는 사람? 이런 적 없었는데;;
└프급: 거대 슬라임 진짜 딜 안 들어감 아무리 때려도 0 깎임ㅠㅠㅠㅠ
└ㅇㅇ: 슬라임 주제에 쎄네;ㅋㅋㅋ
└위탁상점3호: ㄴㄴ슬라임 무시하면 안 됨ㅋㅋㅋㅋㅋ
└빨강젤리할짝: 애완용 슬라임 키우고 싶다 분양하는 테이머 요새 없음?
└라임사랑단: 헌챈 슬라임 분양글 금지임; 님 공지 확인 좀
└빨강젤리할짝: WHYㅠ
└라임사랑단: 전에 슬라임 파양하고 유기한 사건 일어나서
└빨강젤리할짝: 헐ㅠㅠㅠㅠㅠㅠ
└wab***: 니가 약한 거 아님??
└ㅇㅇ: 혐성ㅡㅡ;;;
cba***: 이번 회차 튜토리얼 던전에 참여하셨거나 잘 아시는 분들의 제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메일: [email protected]
└골렘제작중: 이거 머임???
└엘릭서다삼: 위에 리플 씨앤엘 법무 팀 메일 주소임
└골렘제작중: 엥 ㄹㅇ임? 뭔 일이지;
[관리자]: 권리권자의 요청으로 게시글 비공개 처리되었습니다.
요청 사유: 허위 사실 유포
* * *
지존은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건물은 아주 화려하고 커다랬다. 돈 자랑을 하겠다는 마음을 건물로 빚으면 이런 형태가 될 것 같다.
입구에 놓인 대던전 어비스의 형상을 본뜬 조각만 해도 몇십 억이라고 하던가.
서울시 서초구 씨앤엘대로 1. 즉, <씨앤엘 코퍼레이션> 본사 앞.
며칠 전 소속 길드에서 제명당하고 헌터 채널 아이디도 정지된, 비운의 C급 헌터 지존이 입구를 향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출입문을 지나자마자 정장을 입은 보안 직원이 다가와 매섭게 물었다.
일개 보안 직원이라고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보안 팀은 최저 D급 이상의 헌터로 구성되었으며, 일시적으로 스킬을 무효화할 수 있는 장비를 지급받았으니까.
지존은 긴장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입을 뗐다.
“아, 저…… 오늘 약속이 되어 있어서요.”
“성함이?”
“지존입니다.”
“……네?”
5년 전, 각성을 한 뒤 지존은 원래의 이름을 버렸다.
본명은 한 학교에 세 명은 있을 정도로 흔하고 평범해서, 너무나도 ‘일반인’ 같았으니까.
헌터계의 지존이 되겠다는 큰 뜻을 담아 지은 이름, 지존. 언제 어디서든 이 이름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눈앞의 보안 직원은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눈빛으로 그를 훑어볼 뿐이었다. 위축된 지존은 재깍 본명을 입에 올렸다.
“……김지훈입니다.”
“네, 확인되셨습니다. 오른쪽 코너 끝의 엘리베이터를 타십시오. 이 방문증을 찍어야 문이 열립니다.”
방문증을 받고 안쪽을 향했다.
설마 이곳에 다시 오게 될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