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방문증을 찍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옆의 엘리베이터에서 우르르 사람이 내렸다.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랭킹 2위 최세드릭. 그 옆도 얼굴이 익숙한 것으로 보아 A~B 등급의 상위 랭커다.
지존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화려한 면면에 기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존을 발견조차 하지 못했다.
한때 그도 저들 사이에 있을 수 있었다.
5년 전, C 등급으로 각성한 지존은 <씨앤엘 코퍼레이션>의 스카우트를 받았다.
그런 큰 길드에서 모시러 오다니 역시 나는 유명인이 될 수 있다며 계약서를 제대로 읽지도 않고 사인했다.
그러나 몇 개월 뒤 사소한 문제로 잘리고 하청의 하청 길드로 이적, 아니, 좌천되었다.
그 이후로 지존의 생활은 아주 어려워졌다.
아무리 위험한 던전에 솔선수범해서 들어가도, 하청의 하청 길드는 거의 돈을 벌 수 없었다. 기껏 에테르 광석을 많이 모아도 원청에게 대부분 상납해야 했으니까.
그래서 튜토리얼 던전에 참가하는 초보자들을 대상으로 살짝 부수입을 얻으려 한 것뿐인데.
하필 던전의 변이가 일어날 줄은!
거대 슬라임 앞에서 도망친 지존은 버스비로 받은 루비를 모두 뱉어 내고 사과했다. 그러나 초보자들은 지존을 용서하지 않았고, 길드에서도 버스 먹튀로 길드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그를 잘랐다.
그리고 어제는 급기야 <씨앤엘> 길드장의 호출까지 받았다.
대체 왜 나를? 이미 길드에서 잘리기까지 했는데, 설마 고소하려는 건 아니겠지.
악명 높은 <씨앤엘> 법무팀을 떠올리며 지존은 어깨를 떨었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멈췄고 문이 열렸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비서가 지존을 맞이했다.
‘……여자? 남자?’
비서는 아주 아름다웠다.
긴 속눈썹이 창백한 뺨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선명한 이목구비는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특유의 신비한 분위기가 성별과 나이를 모호하게 보이게 했다. 꼭 현실에 있으면서도 비현실적인 느낌이라고 할까.
“길드장님은 곧 오실 거예요.”
비서는 지존을 안쪽의 응접실로 데리고 가더니 차를 내주었다.
너무 푹신해서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지는 소파에 앉아서 기다린 지 몇 분 뒤, 다시 문이 열렸다.
“오셨군요.”
“아, 예, 저기, 안녕하십니까.”
지존은 벌떡 몸을 일으키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앉으라며 상대가 가볍게 손짓했다.
<씨앤엘 코퍼레이션>의 대표 이세인.
헌터로서의 능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다. 랭킹 88위로 겨우 100위권 안에 이름을 올렸을 뿐.
하지만 소규모 길드로 시작한 <씨앤엘 코퍼레이션>을 빅3 길드로 키워 낸 수완가였다. 지금도 만족하지 않고 공격적인 투자와 사업 확장을 이끄는 사업가이기도 했다. 이세인이 고른 헌터는 뜬다는 속설까지 있을 정도.
‘그런 사람이 왜 나를…….’
“김지훈 헌터는.”
“지존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김지훈 헌터는.”
“네, 네.”
쫄아 든 지존은 재깍 고개를 숙였다.
“현재는 소속된 길드가 없군요?”
“……그렇습니다.”
하청의 하청 길드로 좌천시킨 것도, 길드에서 자르라고 압박을 준 것도 모두 이세인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 혼자 계시고, 동생은 공무원? 공무원 좋지. 월급 따박따박 나오고. 나도 이 길드 안 차렸으면 공무원 시험이나 치려고 했어.”
오싹, 소름이 돋았다.
헌터계의 지존이 되겠다며 집을 나온 지 벌써 몇 년. 동생과도 일절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세인은 이미 동생의 행적까지 알고 있다.
“저어,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우리 길드 2군 공략 팀에 딜러 자리가 하나 남거든. 어때요? 우리가 업계 최고인 건 말 안 해도 알 거고.”
……꿀꺽.
갑자기 큰 제안에 눈이 핑핑 돌았다.
2군이라고 해도 하청이 아니라 직속 공략 팀이다. 그게 얼마만큼 손에 넣기 힘든 위치인지는 한때 3군 공략 팀에 있었던 스스로가 잘 알았다. 가끔 저등급 던전은 랭킹 2위 최세드릭이 함께 돌아 줄 때도 있다.
지존은 눈부신 미래를 상상했다. 방금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무리에 자신이 끼는 모습을.
랭킹 2위 최세드릭 옆에 지존의 이름이 함께 쓰이는 것이다. 자신이 개발한 지존 검법이 널리 알려지겠지. 그러면 거대 슬라임 앞에서 도망친 일 따위는 금방 잊힐 테다.
들뜸을 감추지 못하는 지존에게 이세인이 계약서를 내밀었다.
을: 지존(본명: 김지훈) 헌터
눈을 씻고 다시 봐도 자신의 이름이 분명했다.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지존 헌터가 협조를 잘 해 주었을 때의 일이야.”
“협조라 하시면, 무슨…….”
“튜토리얼 던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지?”
“아, 예에, 그렇습니다.”
“던전 보스를 처치한 헌터가 누군지 밝혀지지 않았다던데? 누군지 알아요?”
“누군지는 모르지만……. 본 적은 있습니다.”
지존은 튜토리얼 던전에서 마주친 남자를 떠올렸다. 섬칫한 힘이 느껴졌다. 보스를 처치했다면 분명 그 남자일 테다.
이세인이 활짝 웃었다. 갑자기 친근한 태도로 지존의 잔에 직접 차를 따라 주기까지 했다.
“일단, 튜토리얼 던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봐요. 남김없이 전부.”
* * *
기유현이 돌아간 뒤, 나는 벽 너머의 이공간을 향했다.
여전히 무성하게 자라난 위그드라실이 나를 맞이했다.
가지에 빼곡하게 달린 커피 열매는 따도 따도 줄어들지 않았다. 비닐 시트 위에는 라임이가 과육을 벗긴 생두가 잘 건조되는 중이었다.
‘별로 달라진 곳은 없는 것 같은데…….’
“저쪽이다!”
“뀨우!”
이공간의 한쪽 구석, 짙은 안개가 걷혀진 곳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알림 창이 떴다.
[새로운 구역을 열 수 있습니다. 여시겠습니까?
네 / 아니오]
스르륵.
‘네’를 선택하자 안개가 완전히 걷히면서 새로운 빈 땅이 나타났다.
“퀘스트를 진행하다 보면 점점 더 구역이 열리고 여러 가지를 얻을 수 있다, 키야옹!”
옆에서 미음이가 설명했다.
“그럼 여기는 어디다 쓰는데?”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너 별로 아는 거 없구나…….”
“왜오옭!”
나는 파바밧 날아오는 냥냥 펀치를 피한 뒤 새로 열린 구역을 살펴봤다.
그저 빈 땅일 뿐, 특별한 부분은 없는 것 같은데…….
바닥은 잔디 대신 부드러운 흙이 깔려 있었다. 잡초나 자갈도 없는 고운 흙은 꼭 작물을 키우기 좋은 밭처럼 보였다.
나는 앞의 빈 땅을 확인해 보았다.
[장소: 풍요로운 밭
당신의 앞마당에 주말 농장을.
자유롭게 작물을 가꿔 보세요.]
카페를 차리려고 했을 뿐인데 이젠 밭농사까지?
아, 그래. 여기다 던전 사탕수수를 심으면 좋겠다.
나는 인벤토리에 처박아 두었던 던전 사탕수수를 꺼냈다. 튜토리얼 던전에서 얻은 뒤 심을 곳이 마땅치 않아 인벤토리에 넣어 둔 채였다.
며칠이 지나는 동안 잎과 줄기가 말라서 남은 것은 씨앗뿐이었다.
모종삽으로 밭에 20㎝ 간격으로 구멍을 판 뒤 씨앗을 심었다. 그리고 씨앗 위로 흙을 잘 덮어 준 다음 물을 떠 와서 뿌려 주었다.
씨앗을 전부 심는 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단순 작업의 반복이라 지루하기까지 했다. 으윽, 허리가 뻐근하다……. 좀 더 편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을 텐데.
아무튼, 씨앗 심기를 끝내자 알림 창이 떴다.
[작물: 던전 사탕수수의 씨앗(★☆☆☆☆)
물을 주고 하루가 지나면 던전 사탕수수로 자라납니다.
애정을 담아서 키웁시다.
남은 시간: 하루]
던전에서 구한 작물이라 그런지 다 자랄 때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성질 한번 급한 풀이군.
뭐,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니 다행이네. 좋아, 나머지는 다음 날 확인하자.
다음 날, 나는 눈을 뜨자마자 대강 아침을 먹고 이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던전 사탕수수의 상태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위그드라실의 나무를 심었을 때도 하루 만에 자란다는 말과 달리 시들어 있었으니까. 설마 그때처럼 또 시든 건 아니겠지.
“왜오옭…….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니냐.”
“빨리빨리 와.”
다행히 나를 맞이한 것은 빽빽하게 자라난 던전 사탕수수였다. 키는 허리 정도였고, 줄기는 대나무를 닮았으나 좀 더 가늘었다.
[작물: 던전 사탕수수(★☆☆☆☆)
던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 줄기의 수액에서 단맛이 납니다.
비고: 마법 설탕의 재료]
음, 잘 자랐다.
시스템의 설명대로라면 줄기의 수액이 설탕의 재료일 텐데…….
나는 사탕수수의 줄기를 조금 잘라 보았다. 단단한 겉과 달리, 껍질을 깎아 내니 부드러운 속살이 드러났다. 속살을 손끝으로 꾹 눌러서 흐르는 수액을 살짝 혀로 핥았다.
그 순간 혀에 강렬한 단맛이 느껴졌다.
“……아.”
깜짝 놀랄 만큼 달고 풍미가 깊은데도 끝맛이 깔끔하다. 이 수액이라면 먹어도 입 안이 텁텁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맛은 굉장히 좋은데…….
그런데 이걸로 어떻게 설탕을 만들지?
나는 가만히 옆에 있던 라임이를 쳐다보았다. 커피 열매도 먹었으니까 이 줄기도 먹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뀨우?”
사탕수수의 줄기를 라임이에게 내밀어 봤지만…….
“뀻…… 뀨우웃!”
바닥에 통통 몸을 튕기면서 엑스 자를 그렸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어떻게 그런 걸 먹으라고 할 수 있냐.’며 화를 내는 느낌이었다. 미안…….
이 방법은 통하지 않는군. 무슨 방법이 없을까…….
띠링.
그때 익숙한 알림 음이 울렸다.
[궁금한 항목을 검색해 보세요. 지금 접속하기☜]
갑자기 이런 알림이 떴다는 것은 위키에 설탕을 만드는 법이 있다는 뜻이겠지. 다른 방법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위키에 접속했다.
‘에테르-위키’
[자격을 확인 중입니다. ……완료.]
[적격자: 권리을 확인…….]
‘건너뛰기’
눈앞의 문자열을 스킵하자 새까만 네모로 가득한 화면이 나타났다. 여전히 읽을 수 있는 내용은 거의 없다.
얼마 안 되는 항목 중 ‘던전 사탕수수’를 선택하자 곧 페이지가 열렸다.
《던전 사탕수수》
종류: 식물>농작물
설명: 일부 온난한 기후의 던전에서 자라는 작물. 줄기의 수액을 가공하면 마법설탕을 만들 수 있다.
마법설탕을 만드는 법: [계속 읽기]
“어, 이게 뭐야……?”
“왜 그러느냐?”
“이거…….”
글자가 너무 많은데.
‘계속 읽기’를 선택하자마자 빼곡한 글자의 향연이 눈앞에 펼쳐졌다. 얼마나 긴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대강 내용을 훑어봤더니, 줄기를 다듬고, 수액을 짜내고, 잔여물을 걸러 내고, 끓이고, 끓이고, 끓이고 또 끓이고…… (후략)이란다.
이건 아니다. 보기만 해도 귀찮고 복잡하고 성가시고 번거롭다. 이 긴 과정을 내가 직접 할 생각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었다.
가만, 이건 어떨까.
“좋은 방법이 떠올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