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키야옹! 그게 대체 뭐냐.”
나는 스킬 창을 열었다. 이제까지 얻은 스킬들이 주르륵 나타났다. 하나같이 별거 아닌 스킬뿐이지만 그 중에 지금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었다.
[바리스타의 추출(D)
상세: (Lv.1) 원두 가루에서 에스프레소를 추출한다.]
사탕수수가 원두 가루는 아니지만, 줄기에서 수액을 뽑아내는 것도 추출은 추출이잖아.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 아닌가. 한번 시도해 보자. 나는 손에 던전 사탕수수의 줄기를 든 채 스킬을 사용했다.
‘바리스타의 추출’
[스킬 레벨이 낮아 추출할 수 없습니다.]
[추출에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추출하시겠습니까?
네 / 아니오]
곧장 스킬이 사용되는 대신 경고 창이 나타났다. 나는 주저 없이 ‘네’를 선택했다.
[낮은 레벨로 인해 기력이 세 배 사용됩니다.]
[기력을 사용합니다. 85/100]
살짝 힘이 빠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스킬이 사용되었다.
[추출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러나 던전 사탕수수의 줄기가 사라지고 내 손에 남은 것은 설탕이 아니었다. 웬 검고 끈적끈적한 덩어리가 퀴퀴한 냄새를 풍길 뿐이었다.
냄새가 고약하다며 고양이와 슬라임이 후다닥 내게서 도망쳤다. 거기다 이 물컹하고 끈적끈적한 느낌이 찝찝하기 짝이 없었다. 으, 손을 씻어도 냄새가 남을 것만 같다.
[아이템: 실패한 던전 사탕수수의 수액(☆☆☆☆☆)
추출에 실패한 던전 사탕수수의 수액입니다.
이대로는 아무 데도 쓸모가 없습니다.
음식물 쓰레기는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분리 배출해 주세요.]
시스템 메시지에서 은은한 비웃음이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
하지만 실망하기는 아직 이르다.
스킬을 사용했을 때 분명 ‘스킬 레벨이 낮아 추출할 수 없다.’고 떴다. ‘스킬의 적용 대상이 아니다.’거나 ‘효과가 없다.’는 내용이 아니다.
반대로 말하면, 스킬 레벨을 올리면 설탕을 추출할 수 있다는 뜻. 하지만 이제까지는 퀘스트를 깨도 스킬 레벨이 오르지는 않았었는데.
“미음아, 스킬 레벨은 어떻게 올려?”
“그것도 모르냐. 스킬 포인트가 있으면 올릴……. 캬앙! 저리 가라!”
냄새가 고약하다며 후다닥 도망친 미음이가 털을 쭈뼛 세웠다.
스킬 포인트라. 최근에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아, 있다. 이거다. 귀찮을 것 같아서 이제껏 방치 중이었던 퀘스트 창에 찾는 내용이 있었다.
[서브 퀘스트: 궁극의 커피
궁극의 커피로 진정한 친구와 깊은 인연을 맺어 보세요.
궁극의 커피 전달하기: 0/1
보상: 스킬 포인트 1]
하지만 퀘스트 창의 설명이 꽤나 애매했다.
궁극의 커피란 게 대체 뭐지? 내 노동집약적 아메리카노로는 안 되는 건가? 진정한 친구와 깊은 인연은 또 뭐고?
제발 시스템에는 명확한 단어를 써 주면 좋겠다. 게임 시스템에 이런 애매한 표현 썼다간 항의가 쏟아질 거라고. 이런 불평불만을 쏟아 냈지만 시스템은 들은 척도 안했다.
띠링.
아, 새로운 알림이 떴다. 힌트를 주려는 거겠…….
[궁극의 커피… 그것이 ‘궁극’이니까.]
……놀리는 건가?
* * *
일단 퀘스트를 해치울 방법은 나중에 찾기로 하고, 난 연습용으로 쓸 던전 사탕수수를 몇 개 챙긴 뒤 가게로 돌아왔다.
사탕수수를 담을 만한 적당한 상자가 없나 찾는데, 갑자기 미음이가 사탕수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파바밧.
“어?!”
뒷발로 서서 몸을 지탱한 채 앞발을 재빠르게 휘두른다. 냥냥 펀치를 맞은 사탕수수의 이파리가 팔랑거리며 흔들렸다.
“미음아, 왜 그래?”
“크흠, 아무것도 아니다.”
어째 수상한데…….
나는 사탕수수의 줄기를 붙잡고 미음이의 앞에서 이파리를 살살 흔들었다.
점잖은 체하며 이쪽을 보지 않으려 하던 미음이가 다시 파바밧, 하고 앞발을 휘둘렀다. 잡힐 듯하면서 잡히지 않는 잎을 노리며 펄쩍펄쩍 뛰어오른다.
한참이나 놀이에 열중하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미음이가 변명했다.
“그…… 그게, 눈앞에서 저게 흔들리니까 나도 모르게 그만.”
배신감이 느껴졌다. 내가 사 준 장난감은 거들떠도 안 보더니, 너…… 이런 취향이었어? 그게 얼마짜린데…….
비싼 장난감은 놔두고 휴지 쪼가리만 가지고 노는 고양이를 키우는 애묘인의 마음에 큰 공감이 되었다.
에라, 모르겠다. 어쨌건 재밌어하면 됐지.
나는 미음이의 앞에서 살살 사탕수수 줄기를 흔들었다. 파바밧.
그러다가 앞발이 닿으려는 순간 휙, 줄기를 치웠다. 몇 번 반복하자 미음이가 화를 냈다.
“키야오옹! 이 위대하신 에이전트가 저런 것 하나 못 잡을 줄 알고! 다시 해라!”
“나 슬슬 팔 아픈데…….”
“다시 해라!”
파바밧.
“애초에 에이전트라는게 뭔데?”
파바밧.
“뭐! 그것도 모르느냐. 시스템의 의지를 대리하여 이 세상에 현현한, 위대한…….”
“하지만 미음이 너 하는 일 없잖아.”
“왜오오옭?!”
미음이가 충격받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발톱에 찢겨 나간 사탕수수 잎이 팔랑,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이 고양이가 이제껏 한 일이라곤 먹고 자고 텔레비전을 보고 뒹굴뒹굴하는 것밖에 없었다. 라임이는 커피 열매 벗기는 일이라도 해 주는데.
심지어 내가 몬스터 밥이 될 뻔했을 때는 혼자 어디로 가 버렸으면서. 그나마 시스템에게 혼났다고 하니까 별 말을 안 한 거지.
“왜우우웅…….”
시무룩한 울음소리를 내고는 미음이가 고개를 숙였다.
“나라고 왜 도와주고 싶지 않겠느냐. 위대하신 □□를 모시는 에이전트로서 □□의 지식을 전하려 하는데.”
[System Error: —. —.—]
방금 미음이가 한 말 때문인지 또 에러 창이 떴다.
“하지만 아직은 네게 알려 줄 수 있는 것이 많이 없다. 시스템의 제한 때문에……. □□□□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나는 열매 하나 못 벗기고, 쓸모도 없고…….”
어, 어떡하지……. 이런 반응은 예상 못했다. 그냥 살짝 놀리려고 한 것뿐인데…….
고양이한테 밥값 하라고 닦달하는 악덕 인간이 된 기분이다.
“미, 미음아. 자, 이거.”
나는 사탕수수 줄기를 다시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러나 미음이는 고개를 숙이고 우울하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나는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밥만 축내고…….”
“아니, 처음에 미음이가 많이 설명해 줬잖아. 스킬 쓰는 법도 알려 주고.”
“그것도 처음뿐. 이제는 네가 알아서 잘하지 않느냐. 왜웅…….”
열심히 눈앞에서 사탕수수를 흔들었지만 미음이는 본 체도 않고 삽질을 계속했다.
너 삽질 잘하는 성격이었구나…….
옆에서 라임이가 몸을 문지르며 위로했다. 그러나 효과는 미미했다.
“맞다! 간식 먹을래? 배고프지?”
우울할 땐 단걸 먹는 게 제일이지. 나는 아껴 둔 초코첵스 상자를 꺼내 앞에서 흔들었다.
어쩌지. 이것도 효과 없음.
이번에는 미음이의 턱 밑을 긁어 주었다.
“왜오옭…….”
노곤한 울음소리를 내면서도 미음이는 도무지 기운을 차리지 않았다.
마지막 방법으로 나는 가게에서 쓰는 네모난 티슈 여러 장과 도장용 잉크 패드를 가지고 왔다. 미음이의 앞발을 잉크 패드에 꾹 누른 뒤 티슈에 도장을 찍었다.
“우리 미음이는 발자국도 예쁘네. 아, 가게 티슈에 발 도장을 넣을까? 귀엽다고 인기 많을 텐데. 그치?”
“…….”
오, 약간 효과가 있었다. 감추려 했지만 미음이의 입가가 씰룩이는 것이 다 보였다. 나는 다시 티슈에 발 도장을 찍었다.
그때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이 울렸다.
나는 미음이를 라임이에게 맡기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친구 미라의 카톡이었다.
[신미라: 권리 너 걔 얘기 들음?]
[신미라: 걔 헌터 됐다는 거 들었음??]
[나: 걔가 누군데ㅡㅡ??]
제일 중요한 주어를 까먹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대체 누구지.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봐도, 주변의 각성자는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각성자가 그렇게 흔한 존재도 아니고…….
뜬금없는 내용인 건 그렇다 치고, 신미라는 한참이나 카톡에 답이 없었다. 월루하다가 그대로 불려 간 모양이다.
궁금했지만 일단 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슬슬 시간이 다 되었다. 정말 가고 싶지 않지만…… 오늘은 볼일이 있었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뀨.”
“왜옹…….”
동물 두 마리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나를 배웅했다.
* * *
나는 황금 뽑기로 얻은 보온병에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가득 채웠다.
[아이템: 아메리카노(★★★☆☆)
상태: 좋음 (남은 시간: 00:30:00)
효과: 디버프를 무효화합니다. (01:00:00)]
상태 창에서 남은 시간이 줄어들지 않는다. 제대로 보온 효과가 작용하는 것을 확인한 뒤 보온병을 들고 가게를 나섰다.
목적지는 바로 <백은 길드>다.
그래, 오늘이 바로 권지운을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커피를 준비한 이유는 간단하다. 권지운이 내가 각성한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면, 바로 이런 커피를 만드는 스킬이라고 보여 주려는 것이다.
헌터가 되려는 게 아니라 카페를 경영할 거라고 말하면 적어도…… 귀찮게 여기지는 않겠지. 발걸음이 무거웠다.
지하철을 타서 길드중앙동역 앞에 내려 조금 걸으면 바로 <백은 길드>의 건물이 보였다.
전에 왔을 때는 회귀 직후라 정신이 없어서 느끼지 못했는데, <백은 길드> 역시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앞에는 먼지 한 톨 떨어져 있지 않다.
이름대로 하얗고 반짝반짝한 건물의 출입구를 약간 위축된 기분으로 들어가 안내 데스크를 향했다.
“신분 확인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권리을 님. 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얼굴로 바로 패스되니까 편하긴 한데, 이 냉랭한 분위기만큼은 적응이 안 된단 말이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에서 내린 다음 길드장실을 향하려는데, 맞은편에서 사람이 한 명 나왔다.
“……으.”
누구인지 확인하고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하필이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희영을 만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