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192)

28화

박희영. <백은 길드>의 중진이자 B급 탱커로, 권지운의 방패였다.

박희영은 힐러인 권지운을 지키는 데 전념해서, 던전 안팎을 막론하고 그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막으려 했다.

예를 들어…… 하등 도움이라고는 안 되는 일반인 친척인 나 말이다.

“권리을 씨,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가세요? 권지운 헌터는 국내 최상급의 힐러예요. 이런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쓸 시간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이걸 좀 전해 줘야 하는데…….”

“주세요. 내가 전해 줄게요.”

“오빠한테 연락 좀 달라고 말해 주세요.”

“보채지 마세요. 시간 나시면 연락하실 테니.”

이런 취급을 받다 보니 자연히 길드를 찾아가는 일이 줄었다. 뭐, 권지운도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으니 박희영의 말이 맞았겠지만.

전에 왔을 때는 마침 그녀가 없어서 좋았는데, 이번엔 운이 나빴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박희영은 나를 보고 얼굴을 확 찌푸렸다. 저렇게 표정만으로 싫은 티를 내는 것도 재주다.

“또 무슨 일이죠?”

아니, 나도 오기 싫었다고.

“며칠 전에 균열 터져서 헌터들 바쁜 거 모르세요? 부길드장님 오늘도 일정 있으셔서 자리 안 계세요.”

권지운이 불러서 온 건데 불청객 취급을 받으니 화가 났다. 나 역시 불쾌한 티를 감추지 않고 곧장 말했다.

“가족끼리 일인데 박희영 헌터가 무슨 상관이에요? 만나든 말든 내가 알아서 할게요.”

“지금 안 계신다니까요.”

“누가 이런 데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아요? 박희영 씨 보기 싫어서라도 안 와요.”

“권리을 씨!”

큰 소리가 나자 안쪽의 길드장실 문이 열렸다. 권지운이 나를 발견하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권리을, 왔으면 안 들어오고 거기서 뭐 해? 박희영 헌터는 뭐 하고?”

뻣뻣하던 박희영이 곧장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렇지. 역시 지금 없다는 건 거짓말이었군.

“저, 리을 양이 오셔서 안내를 해 주려던 참이었습니다.”

저 능구렁이 같으니. 아까와는 달리 정중하면서 친절한 태도로 말하는 것을 보니 기가 막혔다.

“안내를 왜 거기서 하지? 오늘 일정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게, 갑자기 변경되어서…….”

“뭐, 됐어. 나중에 듣지. 권리을, 들어와.”

나는 박희영을 한 번 비딱하게 쳐다본 뒤 권지운의 뒤를 따라 응접실로 들어갔다.

* * *

뭔가 이상했다.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분위기가 이상했다.

응접실의 소파에 앉자 직원이 차와 과자를 가지고 왔다. 퍼석퍼석한 과자를 씹으며 권지운이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

그런데 도통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침묵에 고개를 들자, 권지운이 입술을 달싹이는 것이 보였다.

내가 접시 위의 맛없는 과자를 두 개나 더 먹어 치운 다음에야 권지운이 입을 열었다.

“요즘 잘 지내지?”

“어, 뭐…….”

나는 어색하게 말끝을 흐렸다. 어울리지도 않는 안부 인사 따위를 듣고 있자니 기분이 영 어색했다. 이러다가는 방금 먹은 과자가 얹힐 것 같다.

“전에는 많이 놀랐지? 아픈 데는 없고? 어디 아프면 참지 말고 바로 말해.”

“어, 괜찮아.”

당장 ‘너 각성했다며?’ 하고 말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권지운은 한참을 더 빙빙 둘러 가는 말을 늘어놓았다.

“리을아, 네가 올해 23살이지.”

“어…….”

“벌써 따로 산 지도 3년이 넘었네.”

“…….”

무슨 명절날 만난 친척도 아니고……. 가만 놔뒀다간 별 신변잡기적 이야기가 다 나올 것 같았다. 이런 소리를 계속 듣고 있느니 그냥 매도 먼저 맞는 게 낫겠다.

“하려는 말이 뭔데?”

“나는 헌터는 반대다.”

“뭐?”

뜬금없는 말에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권지운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데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족속들이다. 네가 그런 거하고 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 나도 헌터가 딱히 좋은 건 아니야.”

그냥 어쩌다 각성을 했을 뿐.

“그래, 잘 생각했다. 권리을 너도 이제 성인이긴 하지만……. 역시 아직 그런 건 이르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각성에 이르고 느리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초등학생 나이의 각성자도 적지 않은 세상이다. 의아했다.

그러나 권지운은 혼자서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다른 말을 꺼냈다.

“역시 그런 곳에서 카페를 여는 데 찬성하는 게 아니었어. 지금이라도 우리 길드 1층에 오는 건 어때. 그런 곳보다는 훨씬 나을 테다.”

“……뭐?”

결국 이 이야기였나.

싫다.

비록 갑자기 각성을 하고 던전에 들어가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굴러갔지만, 그래도 조금씩 오픈 준비를 하고 있다.

더군다나 이 길드 1층에 있으면 박희영 같은 사람을 계속 만나야 한다. 박희영이 내게 재수 없게 구는 것도 다 권지운을 위해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권지운에게 부담을 지우는 존재라는 것을 계속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카페를 하며 유유자적 보내고 싶긴 했지만, 권지운의 돈으로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간의 내 노력을 부정당한 느낌에 순식간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모처럼 불러서 안부까지 묻기에 혹시 이번엔 좀 다른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내심 기대했다. 좀 더, 가족 같은 이야기 말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알아서 할게. 겨우 그런 말을 하려고 부른 거야?”

더 듣지 않겠다는 뜻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는데 권지운이 나를 붙잡았다.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다급하고 빠르게 말을 뱉어 냈다.

“한이성 헌터를 만났는데 이야기 다 들었다.”

“그러니까 뭐가?”

“그 길드 소속 헌터가 치근덕댄다지.”

“……어?”

설마 기유현을 말하는 건가?

“요즘 매일 네 가게에 온다고 하던데. 싫으면 싫다고 말해라. 절대 접근하지 못하게 해 줄 테니.”

그제야 나는 권지운이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치근덕…… 뭐?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설마…… 유현 씨 말이야?”

“벌써 그렇게 친근한 사이가 된 건가.”

“그럼 사람을 이름으로 부르지 뭐라고 불러…….”

저기요, 거기, 그쪽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즉.

내가 각성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게 아니라, 기유현이 다른 뜻을 품고 접근한다고 오해를 한 건가.

각성 사실을 들키지 않은 건 다행이긴 한데…….

나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미쳤어? 그런 거 아니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기유현이 최근 몇 번 가게에 커피를 마시러 오기는 했다.

하지만 정말 커피를 마시기 위해 오는 거다.

묘하게 친근하게 굴기도 하고, 커피를 마실 때마다 감격한 듯 활짝 웃기는 했지만.

“그럼 아니란 말이지?”

“당연하지.”

한이성 헌터가 대체 뭐라고 말했기에 이런 얼토당토않은 오해가 생겼는지 모르겠다.

“하긴 어쩐지 이상하다 했다.”

“그렇지?”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그런 쭉정이 같은 놈은 너한테 어울리지 않으니까.”

어…… 뭐?

권지운의 급발진에 놀라 사레가 들릴 뻔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기유현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잘생긴 편 아닌가?

“잠깐, 그러면 어울리는 건 어떤 건데?”

“만약 헌터라면 일단…… 강해야겠지.”

“어느 정도로?”

“아무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

“하지만 강하다고 자신의 힘을 믿고 날뛰는 건 좋지 않다. 어디까지나 조용히 자신의 역할을 다 해야지.”

“…….”

뭐지, 어제 무슨 어둠 속의 히어로가 나오는 영화라도 본 건가.

그보다 현재 한국에서 저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지 않나?

음, 취향은 존중하도록 하자…….

나는 조금 맥이 빠진 기분으로 챙겨 온 보온병을 꺼냈다.

기껏 들고 왔는데 도로 가져가기도 그렇고.

이왕 여기까지 갖고 왔으니까 주고 가자는 생각에서였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이거나 마셔 봐.”

“이건 뭔데?”

“내가 만든 커피야.”

“네가 커피를 만들었다고? 됐어, 도로 가져 가.”

“필요 없으면 버리든가.”

“……아니야.”

복잡한 표정으로 권지운이 보온병을 받아 들었다. 그래도 버리려는 기색은 아니었다.

이제 정말로 할 말은 없다. 나는 곧장 길드장실을 나왔다.

* * *

그대로 <백은 길드>의 출입문을 빠져나오는 때였다.

탁.

단단한 물체에 부딪친 몸이 크게 기우뚱거렸다. 앞을 똑바로 보지 않고 걷다가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과 부딪친 것이다.

“으앗, 죄송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다시 걸으려는데 앞을 가로막혔다.

“권리?”

“네?”

고개를 들자, 한마디로 말하자면…… 운동 좋아하게 생긴 남자가 앞에 있었다.

부슬부슬한 금빛 머리카락에 햇볕에 탄 갈색 피부, 굵고 단단해 보이는 팔.

남자는 나를 아는 눈치였지만, 이런 남자를 어디서 봤는지는 퍼뜩 떠오르지 않았다.

춥지도 않은지 얇은 트레이닝복 하나만 걸친 남자가 씩 웃으며 알은척했다.

“나 못 알아보겠어?”

그 목소리를 듣고서야 어떤 이름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어, 설마…… 최이찬?”

“그래, 맞아!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 오랜만이다!”

나는 크게 당황해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최이찬은 내 고등학교 시절 친구다. 자주 같이 매점에서 간식을 사 먹고 했던 사이.

‘그때는 되게 작았었는데…….’

오히려 체구가 작고 얌전한 성격이라 자주 괴롭힘의 표적이 되었지.

시선이 훨씬 높다. 이제는 고개를 뒤로 꺾어야 얼굴이 보일 정도였다. 어깨는 넓고 팔은 근육이 잡혀 탄탄해 보인다.

이러니 곧장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어! 잠깐만.”

이야기를 하다 말고 최이찬이 어딘가로 후다닥 달려갔다.

건널목 맞은편에 있던 할머니의 짐을 들어 드린다. 이번에는 유모차를 끄는 사람, 또 걸음이 불편한 사람, 횡단보도에서 넘어질 뻔한 아이…….

결국 그가 내 앞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한참 시간이 걸렸다.

정말 최이찬이 맞구나. 저 녀석은 예전부터 어려운 사람을 보면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 기억이 맞는다면, 최이찬은 지금쯤 군 복무 중이었을 텐데.

그리고 제대한 뒤에는…….

갑자기 심장이 크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의식적으로 묻어 둔 기억이 머릿속에서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제대한 뒤에는, 분명…….

“어! 아직 이야기 못 들었어?”

최이찬이 씩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야기? 무슨 이야기?”

“신미라가 이야기했다고 하던데.”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 사이에 신미라가 카톡으로 답을 보내 놓았다.

[신미라: 누구긴 누구야ㅡㅡ]

[신미라: 최이찬이지.]

[신미라: 최이찬 각성해서 바로 제대했대. 다음에 한번 만나자던데]

“각성……?”

“어, 그래서 얼마 전에 제대했어. 하하.”

……아직 살아 있었구나.

떠오른 생각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꾹 눌러 삼켰다.

일순 안개를 걷어 낸 것처럼 묻어 둔 기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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