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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29/192)

29화

회귀한 직후에는 내 문제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없어서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일부러 떠올리지 않으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회귀 전에도 최이찬은 헌터로 각성했었다. E급의 방어계 헌터였다.

나와 친구들은 모두 최이찬을 축하해 주었다. 일반적으로 높은 등급은 아니라고 하나 헌터는 헌터. 무척 드문 존재였으니까.

또 다른 사람을 돕는 걸 좋아하는 최이찬만큼 헌터에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었다.

곧 유명해져서 텔레비전으로밖에 만나지 못하는 게 아니냐며 우린 낄낄 웃었다.

정말로 못 만나게 되기는 했다.

경기도 수원의 한 초등학교 인근에서 균열이 발생한다. 마침 근처에 있던 최이찬은 아이들이 휘말리는 것을 막기 위해 자발적으로 던전에 뛰어들었다.

그게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던전행이었다.

처음엔 F급으로 판별됐던 던전이 예기치 못하게 상위 속성 던전으로 변이했고, 강력한 속성 공격에 최이찬은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하고 사망했다.

뉴스 속보의 사망자 목록 마지막에 적혀 있던 이름 세 글자.

그게 끝이었다.

시신도 찾을 수 없었다.

그날 이후 친구들 사이에서 최이찬의 이야기는 금기시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헌터에 대한 이야기 자체를 하지 않게 되었다.

아무리 헌터가 대단하다고 해도 결국 최이찬은 죽었으니까.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알 수 없었다.

“권리, 어디 아파? 얼굴이 안 좋은데.”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햇볕에 보기 좋게 그을린 얼굴이 걱정스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다.

이건 어디까지나 회귀 전의 기억일 뿐, 최이찬은 아직 무사하다.

속으로 그렇게 되뇌자 겨우 떨림이 멎었다.

“아니야, 괜찮아…….”

“아, 나 다음에 연락할게. 언제 다 같이 밥이나 먹자.”

“어, 야, 잠깐만.”

불렀지만 최이찬은 조깅이라도 하는 중이었는지 손을 흔들고는 잠깐 사이에 저만치 달려가 버렸다. 금방 등이 손톱만큼 작아졌다.

아직은 살아 있다.

하지만 곧…….

심장이 어지러이 쿵쿵 뛰었다.

나는 이제껏 회귀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저 내가 죽음에서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과거와 다른 삶을 사는 데만 급급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과거로 돌아온다는 것은 이런 의미였구나.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어쩌면…… 미래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바람이 차가웠다. 나는 멀어지는 등을 빤히쳐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 * *

“나 왔어.”

팔랑.

가게로 돌아와 문을 여는데, 바람에 흩날린 종잇조각이 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어, 이게 뭐지.

주워 보니 티슈였다. 한가운데 커다랗게 미음이의 발 도장이 찍힌 티슈. 아까 발자국 도장을 찍은 티슈가 날려 왔나 보다.

티슈를 일단 주머니에 쑤셔 넣는데 다시 팔랑, 하고 한 장이 날아왔다.

팔랑, 팔랑, 팔랑…….

끝없이 쏟아지는 티슈들은 모두 발자국 도장이 찍혀 있었다.

“…….”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황급히 가게 안으로 들어가 주변을 살펴보았다.

산더미 같은 티슈가 바닥과 테이블 위에 쌓여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얼마나 열심히 도장을 찍어 댔는지 바닥과 벽에도 발자국이 남았다.

“미음아, 라임아, 어디 있어?”

나는 안을 돌아다니며 사고를 친 동물들을 찾았다. 곧 안쪽의 창고에서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들렸다.

쾅. 난 세게 문을 열어젖히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한참 종이며 바닥에 발바닥으로 도장을 찍는 데 열중하던 고양이와, 옆에서 부추기던 슬라임이 화들짝 놀랐다.

“미음아?”

“왜웅…….”

“라임아?”

“뀨우…….”

면목 없다는 듯 두 동물이 몸을 숙였다.

“도장 찍는 게 아주 재미있었나 보구나…….”

기운을 차린 건 다행이긴 한데. 저 많은 잉크 자국들을 다 닦아 낼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동물을 키우기란 정말 힘든 일이구나…….

* * *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고 권지운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러 저녁이 가까웠다. 아직 처리할 일은 남아 있었지만 뻐근한 피로가 몸을 무겁게 했다.

“……하아.”

손끝으로 눈가를 문지르는 표정은 아주 예민해 보인다. 각성한 이후 은빛으로 변한 머리카락까지 어우러져서, 마치 차가운 겨울바람 같은 분위기를 빚어냈다.

권지운은 책상 위에 놓아 둔 채인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읽지 않아도 내용은 알고 있다. 이미 여러 번 받은 서류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을 테니까.

서류는 <백은 길드>의 길드장, 즉 권리을의 큰아버지이자 권지운의 아버지에 대한 수색 결과였다.

성과는 없다.

아버지는 몇 년 전 어느 던전에 들어갔다가 그대로 돌아오지 않게 되었다.

보통이라면 던전에서 죽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헌터가 던전에서 죽는 일 따위, 세상에 던전과 몬스터, 각성자가 생겨난 이래 얼마든지 일어났으니까.

그러나 권지운은 아버지가 죽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가 아니다. 아버지가 실종된 날 미심쩍은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수색을 이어 나가고 있지만.

“…….”

권지운은 자신의 스테이터스 창을 들여다보았다. 빨간 마크로 알림 표시가 깜빡인다.

[마력이 고갈되었습니다.]

[디버프: 모든 스테이터스가 70% 저하됩니다.]

며칠 전 발생한 균열에서 부상을 입은 헌터를 치료하느라 오늘 스킬을 과도하게 사용했다. 마력이 떨어지면 포션을 마시고 다시, 또 다시…….

이 과정을 여러 번 반복했더니 마력 고갈로 인한 디버프에 걸려 스테이터스가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아버지가 실종된 이후로 줄곧 <백은 길드>는 권지운의 책임이었다.

그 책임을 버겁게 여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스테이터스가 엉망진창이 되어 있을 때면 다 삼키지 못한 무력감이 치밀어 올랐다.

다음 일정까지는 30분 정도 시간이 남았다.

뚫어지게 바라본다고 해서 서류에서 새로운 글자가 튀어 나오는 것도 아니다. 머리의 지끈거림은 더욱 심해지기만 했다.

권지운은 서류를 도로 책상 위에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잠깐이나마 휴식을 취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때, 책상 구석에 은빛 보온병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사촌, 권리을이 놓고 간 것이다.

‘커피를 만들었다고 했지.’

권지운은 잠시 망설이다가 보온병에 손을 뻗었다.

‘필요 없다고 했는데도.’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버리지는 않고 커다란 보온병을 손에 들었다. 두통은 끝없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여전히 권지운은 던전 게이트 앞에 카페를 차리는 일에 반대했다.

대던전 《어비스》.

어느 날 갑자기 도시 한복판에 나타나 몬스터와 각성자, 시스템…… 이 모든 것을 불러온 미지의 던전이다.

권지운은 그 끝없이 위로 뻗은 벽을 볼 때면 섬찟한 기분을 느꼈다. 말도 안 되는 표현이지만, 어느 때는 꼭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현재는 잠잠하다고 하나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공간. 하필이면 그 던전 게이트 앞이라니, 위험한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겠는가.

하지만 권리을이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이라고 해서 막지 못했다.

권지운은 착잡한 마음으로 하나뿐인 사촌 동생에 대해 떠올렸다.

희귀한 힐러 직군으로 각성한 이래로 권지운은 많은 관심을 받았다.

한국 최초의 A급 힐러에 강력한 힐러 스킬 보유자. 기대가 쏠리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모든 관심이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능력을 깎아내리거나 비판하는 것은 차라리 나았다.

관심은 그의 가족에까지 이어졌다. 사라진 아버지에 대한 의심과 비난 그리고…….

하나뿐인 사촌 동생에게 파파라치는 물론이고, 청탁 목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까지.

결국 권지운은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거리를 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겉으로 평온해 보일지언정 현 헌터계는 복마전이다. 동생이 이런 헌터계와 거리를 두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한몫 거들었다.

그런데 하필 헌터가 리을에게 접근하다니. 게다가 헤실헤실 웃는 것이 무척 수상쩍다.

“……하아.”

역시 카페는 길드 1층으로 옮기라고 해야겠다. 바로 근처에 두고 보는 쪽이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두통은 점점 더 심해졌다. 커피를 마시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모처럼 가져다준 것을 버리기도 저어되어 보온병을 열었다.

뚜껑을 여는 순간 부드러운 커피 냄새가 확 풍겼다. 고소한 견과류를 닮은 향이 주위를 따뜻하게 감싸는 것만 같았다.

“……!”

커피를 마시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도 잊고, 권지운은 당장 컵에 커피를 따랐다.

짙은 갈색의 물은 마치 방금 내린 것처럼 따끈따끈했다. 손에 닿는 온기에 뻐근한 긴장이 녹아내렸다. 한 모금 마셨을 뿐인데도 커피의 고소함과 감칠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정신을 차린 순간 한 잔을 다 비웠고, 아쉬움에 다시 한 잔을 따랐다.

그러다 어느새 머리가 아프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력 고갈의 부작용으로 하루 종일 그를 괴롭히던 두통이 완전히 사라졌다.

‘스테이터스.’

스테이터스 창의 디버프도 어느새 해제되어 정상으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지. 디버프가 이렇게 빨리 해제된 적은 처음이다. 대체 무슨 이유로…….

우연인가?

권지운은 가지를 뻗는 생각을 끊어 냈다.

이유가 뭐면 어떤가. 동생이 만들어 준 커피가 맛있어서 마음이 편해진 모양이지.

피로뿐만 아니라 늘 그의 머리 한편에 자리하고 있던 무거운 걱정과 불안이 씻겨 나가는 것을 느꼈다. 각성한 이래로 이렇게 마음이 편안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내내 그를 짓누르던 불안을 덜어내니 리을의 일도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조급할 필요는 없겠지.”

당장 리을에게 카페를 옮기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접어 두었다.

조금만 더 지켜보자.

권지운은 빈 컵을 내려놓았다. 향기만이 주위에 남아 그를 감쌌다.

* * *

“여기야? 되게 썰렁하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남겨 주신 가게야.”

“되게 어, 그러니까, 운치 있고, 어…… 고즈넉하고 분위기 좋다!”

내 말에 최이찬이 탈룰라를 시전했다.

황량한 길에 딱 하나 세워진 낡은 건물을 보고 최대한 좋은 말을 쥐어 짜낸 걸 테지.

내가 카페를 차렸다는 소식을 듣고 최이찬은 한번 놀러 오고 싶다는 말을 했다. 나는 당장 좋다고 말했다.

어쩌면 그를 만나 이야기를 하다 보면 미래를 바꿀 방법을 알아낼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였다.

최이찬이 던전에 휘말린 것은 전국적으로 첫눈이 펑펑 쏟아진 날이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날씨 뉴스를 보던 중 속보가 떴던 것만은 선명하다.

지금은 10월 하순. 눈이 내리는 계절까지는 약간 시간이 있다.

그 사이에 기억을 더듬어 보면, 어쩌면…….

미래를 바꿀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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