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일단 들어와.”
나는 최이찬에게 나의 회귀 사실과 예정된 미래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왔다니.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믿어 주지 않을까 봐 걱정되기는 했지만, 최이찬의 목숨이 가장 중요하니까.
그런데.
“이찬아, 나 할 말이 있는데.”
“응? 뭔데?”
“그게……. 곧 □□에서 □□이…….”
어라.
분명 ‘수원’이라고 말하려 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에 □□□□ □□가…….”
또다.
몇 번 더 시도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수원, 던전, 변이 등의 단어는 아예 입에 올릴 수 없었고, 돌려서 말하는 것도 소용없었다. 조금이라도 미래의 일을 말하려고 하면 가로막혔다.
거기다 예전처럼 붉은 에러 창까지 나타났다.
[System Error:—. —.—]
[System Error:—. —.—]
“이야옹(인과율의 개입이다).”
당황한 나를 보며 미음이가 말을 걸었다.
‘뭐? 그게 대체 뭔데?’
“왜옹, 왜오옹, 왜옹(회귀 전의 사실이 현재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시스템이 막는 것이다. 엄연히 그건 존재하지 않는 기억이자, 앞으로 일어날 일이니까).”
‘전에 미음이 너한테 말한 건 됐잖아?’
“키야오옭(나는 시간축에 속한 존재가 아니니까).”
‘그런 게 어딨어!’
즉, 최이찬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직접 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시스템이 내 입을 틀어막는 것까지 가능하다니, 두려움과 불쾌감이 느껴졌다.
“권리, 왜 그래?”
한참 내가 말이 없자, 최이찬이 나를 걱정스레 불렀다.
“어, 응, 그게.”
나는 최이찬을 올려다보았다.
푸른색 트레이닝복에 감싸인 몸이 아주 탄탄해 보인다. 제대로 운동을 하지 않고는 절대 나오지 않는 꽉 짜인 근육이 느껴졌다.
각성했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걸까. 나는 각성하고도 겉으로는 전혀 바뀌지 않았는데.
최이찬을 만나는 건 약 2년만, 회귀한 시간을 포함하면 실제로는 약 5년만이다. 엄청나게 낯설었다.
“그냥 좀…… 많이 변했네.”
“어? 나? 아! 얼굴이 좀 탔지?”
아니, 그거 말고…….
하지만 단순하고 밝은 성격과 남 걱정하기를 좋아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지 못하는 성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또 같은 일이…….
아니, 아니다. 포기하기는 이르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미래를 바꿀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 최이찬과 이야기하다 보면 힌트가 생길지도 모른다. 나는 낙담을 애써 집어삼켰다.
“키야오옹(저 인간이 네 친구냐)!”
바닥에 배를 깔고 누운 미음이가 최이찬의 긴 그림자를 보고 울었다.
“왜오옭(너랑 달리 성실해 보인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바닥의 검은 얼룩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여기 잉크가 좀 묻었네.”
“왜우웅…….”
깜짝 놀란 미음이가 눈을 도르르 굴렸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슬그머니 구석으로 몸을 피하더니 앞발을 위로 든다. 나름 반성하는 자세인가 보다. 그래, 넌 좀 미안해해야 해.
온통 미음이의 발자국이 찍힌 가게를 닦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걸레로 빡빡 닦고 닦아도 끝이 없었다.
이제껏 잊고 있던 청소 스킬을 써 볼까도 생각했지만.
[바닥이 반짝반짝(E)
상세: (Lv.1) 화장실 청소를 빠르게 할 수 있다.]
이 ‘바닥이 반짝반짝’은 정말 화장실에만 적용이 되었다. 가게 바닥과 벽은 직접 내가 닦아 내는 수밖에 없었다.
가만, 그럼 스킬 레벨 업을 하면 화장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쓸 수 있으려나?
뭐 이건 다음에 알아보기로 하고…….
그때 가게를 한 바퀴 둘러본 최이찬이 돌아왔다.
“와, 고양이도 키우는구나. 귀엽다.”
최이찬이 미음이의 턱을 살살 간지럽혔다. 미음이가 내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앞발을 내리고 최이찬의 손바닥 위에 턱을 올리고 골골거리는 소리를 냈다.
내가 불쌍해서 봐줬다.
그러고 보니 라임이는 어디 갔나? 평소에는 미음이의 옆에 딱 붙어 있곤 했는데.
“왜우웅(이공간에 갔다)…….”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나. 라임이를 자랑하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자.
나는 에스프레소 머신 앞으로 향하며 말했다.
“앉아. 마실 거 만들어 줄게.”
“오오.”
최이찬이 기대 어린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아직 시스템이 시킨 카페 기본 5종 메뉴는 만들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메뉴를 만들기로 했다.
모처럼 최이찬을 만났으니, 퀘스트를 해치우기보다는 좀 더 취향에 맞는 음료를 만들어 주고 싶어서였다.
이 녀석의 취향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무튼 단맛을 좋아했다. 아이스크림 위에 믹스커피를 부어 먹은 적도 있을 정도니까.
오늘 만들 메뉴는 그것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 흔히 먹는 아포가토보다 좀 더 진한 단맛을 내기로 했다.
나는 내 몫까지 유리컵 두 개를 꺼내 각각 얼음을 채워 넣은 뒤 스킬을 사용했다. 에스프레소를 추출해 얼음 위에 한 샷씩 부었다. 얼음에 끼얹어진 에스프레소가 차갑게 식은 다음, 컵에 우유를 붓고 바닐라시럽을 넣었다.
마지막으로 넣을 것이 바로 이거다. 나는 옆에 놓인 냉장고를 열고, 어제 슈퍼마켓에서 사 온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종이에 감싸인 두 가지 맛의 바닐라 아이스크림이었다. 살짝 비쌌지만 큰마음 먹고 사길 잘했다.
최이찬의 몫에 노란색 맛, 내 몫에 파란색 맛 아이스크림을 각각 두 개씩 넣었다.
바닐라라테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더한 셈이니 단맛이 퍽 강할 테다. 아이스크림의 위에 초콜릿 가루를 가볍게 뿌려 장식하니 완성이었다.
나는 유리컵을 최이찬에게 내밀었다.
“자, 다 됐어. 마셔 봐.”
“우와, 맛있겠다. 잘 마실게.”
나 역시 유리컵을 손에 들었다.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한입 떠먹고, 다음으로는 커피와 섞어서 마셨다. 향긋한 바닐라 향과 진한 단맛이 입안에서 밸런스 좋게 뒤섞였다.
천천히 맛을 음미한 뒤 최이찬을 보았다. 그도 막 커피를 맛본 참이었다.
“맛있어?”
“…….”
“최이찬?”
“…….”
대답이 없다.
대신 최이찬의 머리 위에 긴 막대가 나타나더니 황금빛 게이지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곧 게이지는 끝까지 다 차올랐고, 불꽃이 터지는 듯한 효과까지 나타났다.
음, 맛있나 보다.
나도 다시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우유의 부드러움과 에스프레소의 진한 맛이 달콤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감쌌다. 달콤함이 몸에 남은 피로를 씻어내 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역시 ‘내 손안에 카페’ 스킬의 레시피를 따르지 않고 만들었더니, 부가 효과는 없는 모양이다.
음료를 살펴봐도 상태창도 나타나지 않는……
어라. 익숙한 띠링, 하는 소리가 울렸다.
[축하합니다! 직접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했습니다.
이 음료를 나만의 레시피에 등록할 수 있습니다. 이름을 등록해 주세요.
이름: ]
시스템에 이런 기능도 있었나?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이스크림 커피’라고 이름을 입력했다. 그러자 새로운 상태 창이 나타났다.
[아이템: 아이스크림 커피(★★☆☆☆)
상태: 좋음 (남은 시간: 00:30:00)
효과: 몸이 차가워집니다.]
와, 이런 식으로 메뉴를 등록하는 것도 가능하구나.
나는 내 몫의 유리컵을 전부 비운 뒤 여전히 말이 없는 최이찬을 향해 물었다.
“이찬아, 어때?”
“……꿀꺽.”
음료를 마시는 데에 집중했는지 대답이 없다. 대신 황금빛 게이지가 다시 불꽃을 펑펑 튀기더니 알림이 떠올랐다.
[대상이 당신의 커피를 아주 좋아합니다.
커피로 깊은 인연을 맺었습니다.]
흐음, 흐음.
뭔 뜻인지 모르겠지만 맛있다 이거지?
뭔가 주려나? 업적? 아니면 퀘스트 완료?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새로운 알림이 뜨지 않았다.
어, 이걸로 끝이라고? 지금 완전 뭔가 좋은 걸 줄 분위기였는데!
흐름상 ‘커피로 깊은 인연을 맺었으니 보상을 수령하세요.’라고 해야 자연스럽지 않나? 이제까지의 패턴대로라면 황금 뽑기 티켓이라도 한 장 줄 것 같았는데.
그냥 띄운 거야? 그만큼 맛있었다고 칭찬한 건가?
이 망겜 점점 더 보상이 쩨쩨해지는 기분이 드는데…….
초보 때는 잘해 주다가 어느 정도 레벨이 오르고 과금을 시작하면 귀신같이 보상을 줄이던 게임이 떠올랐다. 그러다가 망한다니까.
나는 속으로 시스템에게 유저 보상 아끼다가 망한다고 마구 투덜거렸다.
“꿀꺽, 꿀꺽, 꿀꺽…… 흐, 아!”
그때 최이찬이 유리컵 안의 아이스크림을 전부 떠먹고는 남은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마신 뒤 아쉽다는 듯 유리컵의 밑바닥을 들여다 본다.
나는 티슈를 집어 최이찬에게 건넸다. 입가에 묻은 크림을 팍팍 거칠게 닦아 낸 최이찬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환희에 가득 차 있었다.
“이거 되게 맛있다!”
순수한 기쁨이 담긴 목소리.
“다행이다. 하하, 고마워.”
“어, 맛이 막…… 파아앗, 한 다음에 사르르 하는데.”
그게 무슨 뜻인데…….
하지만 그의 진심은 충분히 전해졌다. 머리 위의 게이지를 보지 않아도, 표정과 눈빛만으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건 처음 먹어 봤어. 진짜 맛있다!”
최이찬의 격렬한 반응에 무척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껏 만든 커피도 모두 반응이 좋기는 했다. 가장 처음으로 만든 믹스커피조차도 특별한 맛이 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건 내가 최이찬의 입맛에 맞춰 생각한 메뉴니까. 가까운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색다른 뿌듯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나는 냉장고에서 다시 아이스크림을 꺼내며 물었다.
“그럼 하나 더 만들어 줄까?”
“어, 좋지!”
콰직.
최이찬이 테이블 위에 빈 유리컵을 툭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분명 거친 동작이 아니었는데도 두꺼운 유리컵이 콰직, 하고 산산조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