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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31/192)

31화

어찌나 깔끔하게 깨먹었는지 유리조각이 손톱만 해졌다.

하얗게 질린 최이찬이 당황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으아아, 미안하다! 그냥 살짝 내려놓으려고 한 건데.”

최이찬이 허둥지둥하며 조각난 유리를 손으로 치우려 했다. 그러나 그의 손길이 닿을수록 유리는 점점 더 잘게 쪼개지기만 했다. 몇 번만 더 했다가는 유리가 모래로 되돌아갈 것 같았다.

나는 일단 최이찬을 진정시켰다.

“진정해. 이 정도쯤 괜찮아.”

“으아, 미안. 진짜 미안하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괜찮다고 했는데도 최이찬은 거듭 미안해했다. 내가 유리를 치우는 동안 쩔쩔매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각성한 다음부터 힘 조절이 안 되어서, 가끔 이래.”

“아하. 그런 경우도 있다고 하더라.”

각성하면 하루아침에 힘, 민첩 등의 스테이터스가 올라간다. 그러니 적당한 힘 조절 방법을 익힐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참고로 각성자라도 전혀 스테이터스가 높지 않은 나하고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컵을 깨먹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쉽다고 해야 할지…….

“힘을 조절하려고 매일 아침마다 운동을 하거든.”

“운동? 어떤 걸 하는데?”

그러고 보니 <백은 길드> 앞에서 마주쳤을 때도 조깅을 하고 있었지.

“음, 가만 보자……. 일단 아침마다 스쿼트 100개, 플랭크 100개, 버피 100개를 한 다음에 마라톤을 풀코스 뛰고, 또 스쿼트, 플랭크, 버피를 반복하고, 그 다음…….”

“……뭐?”

“그런데 오늘은 여기 오느라 절반밖에 안 했더니 좀 덜 피곤해서 그랬나 봐.”

“그렇구나…….”

나는 최이찬과 약간 마음의 거리가 멀어졌다.

내가 태어나서 이제까지 한 운동을 전부 다 더해도 그의 하루치 운동보다 적을 것 같은데. 고등학생 시절에는 체육 수업이라도 하면 제일 먼저 지쳐 나가떨어지곤 했었는데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저 떡 벌어진 어깨와 단단한 근육이 크게 인상을 바꿔 놓았다. 예전에는 작은 강아지 같았다면, 지금은 마치 대형견 같다고 할까…….

새로 한 잔 더 만든 아이스크림 커피를 조심조심 떠먹던 최이찬이 불쑥 물었다.

“그런데 여기 카페 이름은 뭐야?”

“아, 저기, 그게.”

나는 크게 당황했다.

“왜? 아직 안 정한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러니까…….”

잠시 망설이다가 겨우 모기만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카페 ㄹ…….”

“어, 뭐라고?”

“<카페 리을>…….”

카페의 이름은 아주 중요한 법이다.

나는 아주 엄격하고, 진중하고, 심각한 자세로 이름을 지으려고 고민했다.

그런데 떠오르는 이름이 다 성에 안 찼다.

<던전 카페>도 좀 아닌 거 같고. <카페 어비스>, 으음, 왠지 금방 망할 것 같고. <던전 게이트 카페>…… 으음…….

내 창의력의 수준이 고작 이 정도라니. 어릴 때 창의력을 키워 준다는 학습지라도 미루지 말고 꼬박꼬박 할 걸 그랬다.

고민 끝에 두 동물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저기, 화려하면서도 심플하고, 기억에 남을 정도로 독특하지만 너무 튀지 않고, 적당히 개성 있으면서도 친숙한 이름이 없을까.”

“내 이름을 넣거라!”

“뀨우우……?”

역시나 아무런 도움은 되지 않았지만.

하루 종일 죽어라 고민했는데 도무지 좋은 이름이 생각 안 나서 결국 내 이름을 따서 붙이기로 했다.

간판에 자기 이름을 넣을 생각을 하니 너무 자의식 과잉 같아서 민망했다.

“키야오옹(카페 미음이 더 어울린다)!”

식빵을 굽는 자세로 참견하는 고양이는 일단 무시하고.

“그래? 멋지다!”

최이찬은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반응이었다. 고맙다. 약간이나마 위로가 된다.

“그러면 요즘은 어떻게 지내? 각성했으니까…… 길드에 들어갈 거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조심스레 본론을 꺼냈다. 그가 멋쩍게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하하, 아니, E급인데 뭐. 받아 줄 길드를 찾기도 어려울걸.”

최이찬에게는 미안하지만 안심한 것도 잠시.

“그래도 기껏 각성했으니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돕고 싶긴 해.”

“…….”

씩 웃으며 최이찬이 내 어깨를 툭 쳤다.

“너도 내가 필요한 일 있으면 말해. 도와주러 올게. 힘은 남아돌아서 곤란할 정도니까.”

“어? 그래? 그럼 다음에……. 다음에 부탁할게. 꼭 와 줘야 돼?”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했다.

회귀 전에 최이찬이 휘말린 던전은 경기도 수원에서 발발했다. 서울, 그 중에서도 강북인 여기서는 꽤 거리가 멀다. 그러니 적어도 이곳은 그에게 안전하겠지.

겨울이 다가오고 눈이 내리면 그를 다시 못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왈칵 겁이 났다.

“어, 물론이지. 네가 부르면 바로 올 테니까, 꼭 불러줘.”

최이찬은 활짝 웃으면서 약속하고는 돌아갔다.

* * *

[축하합니다! ‘서브 퀘스트: 궁극의 커피’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을 수령해 주세요.]

[보유 스킬 포인트: 1]

[레벨 업을 할 스킬을 선택해 주세요.]

최이찬이 돌아간 다음 퀘스트 완료 알림이 뜨면서 스킬 포인트가 들어왔다. 아까 최이찬에게 아이스크림 커피를 주면서 퀘스트를 달성한 모양이다.

그래서 대체 궁극이란 게 대체 뭔데…….

의문은 남았지만 그게 중요한 상황은 아니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스킬 포인트를 써서 ‘바리스타의 스킬’을 레벨 업 했다.

[바리스타의 추출(D)

상세: (Lv.2) 혼합된 물질에서 원하는 물질만 추출한다.]

“우후후…….”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이 스킬을 사용하면 귀찮게 줄기를 다듬고, 수액을 짜내고, 잔여물을 걸러 내고, 끓이고, 끓이고, 끓이고 또 끓이고 (후략) 하지 않아도 설탕을 만들 수 있을 테다.

시간을 끌 이유는 없다. 나는 미리 잘라둔 던전 사탕수수의 줄기를 손에 들었다. 팔랑거리는 잎에 현혹된 미음이가 덤벼들기 전에 곧장 스킬을 사용했다.

‘바리스타의 추출.’

[추출이 완료되었습니다.]

반짝이는 빛과 함께 던전 사탕수수의 줄기가 사라지고 수액만 남았다.

짙은 갈색에 적당히 끈적끈적한 질감, 그리고 확 풍겨 나오는 이 달콤한 냄새. 살짝 찍어서 맛을 보자 진한 단맛이 느껴졌다.

성공이다!

“왜옭, 좋은 냄새가 난다!”

“뀨우우!”

수액 추출에 성공했으니 남은 과정은 간단했다.

네모난 그릇에 수액을 붓고 바람이 잘 통하는 창가에 올려 두었다. 고양이와 슬라임에게 밥을 준 다음 저녁을 먹고 오자 딱 알맞게 굳었다.

단단한 캐러멜처럼 변한 수액을 칼로 네네모나게 잘랐다. 블렌더에 네모난 덩어리를 넣고 갈자 곧 고운 입자의 설탕으로 변했다.

[아이템: 마법 설탕(★★☆☆☆)

던전 사탕수수의 수액을 굳혀 만든 천연 설탕.

달지만 몸에 좋습니다. 아무리 먹어도 혈당 걱정 No.

레시피에 따라 어쩌면 특별한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도?]

설탕은 여러모로 쓸 곳이 많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만들고 싶은 것이 있었다.

다음 날, 나는 고양이와 슬라임을 앞에 불러놓고 근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카페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뭘까?”

미음이와 라임이는 미적지근한 반응이었다.

“뀨……?”

“갑자기 무슨 소리냐, 왜옭.”

“말해 봐. 이제 정식 오픈을 앞두고 있는 이 카페에 아쉬운 점이 뭔지.”

잠시 배를 깔고 누운 채 고민하던 미음이가 앞발을 위로 들었다.

“마스코트?”

“뀨우웃.”

“역시 귀여운 동물 마스코트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거 말고.”

“인테리어?”

“뀨우.”

“아니야. 그런 거 말고, 잘 생각해 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미음이가 이번에야말로 정답이라며 양 앞발을 번쩍 들었다.

“손님!”

“뀨웃, 뀨우우웃!”

옆에서 라임이가 동의의 뜻으로 몸을 격렬하게 튕겼다.

“…….”

너희 여기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니? ……약간 상처받았다.

이 동물들에게 답을 구하기를 포기하고, 나는 손에 든 비닐봉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안에 든 물건을 하나씩 꺼냈다.

달걀, 버터, 밀가루. 모두 방금 슈퍼에서 사 온 것들이었다.

그리고 어제 완성한 마법 설탕을 그 옆에 놓았다.

“이 카페에 부족한 것…… 그건 바로 디저트야.”

역시 카페에는 음료뿐만 아니라 디저트 메뉴가 있어야 한다.

아메리카노는 맛있지만, 정말 놀라울 정도로 맛있지만……. 약간 아쉬운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여기 디저트만 있으면 딱인데, 하고.

달콤한 디저트와 고소한 아메리카노. 부드러운 단맛을 개운하게 마무리해 주는 아메리카노의 맛. 말할 것도 없이 환상적인 조합이다.

그래서 설탕을 완성한 김에, 커피와 함께 먹을 디저트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

잠시 기다렸지만 시스템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지금 완전 새 퀘스트를 띄울 타이밍이었잖아.

귀찮을 정도로 알림을 울려 대던 처음과는 달라서 조금 의아했다. 집착 다음에는 방치인가. 초반에만 보상을 팍팍 푼 다음 슬쩍 줄이는 건가 의심이 들었다.

뭐, 아무튼. 오늘 내가 만들 메뉴는 바로 버터 쿠키였다.

재료가 간단하고 비교적 어렵지 않아서 나도 만들 수 있는 레시피다. 사르르 녹는 부드러운 식감은 커피와 무척 잘 어울릴 테다.

먼저, 실온에 두어 말랑해진 버터를 그릇에 담고 거품기로 풀어 주었다. 다음으로는 설탕을 넣고 서걱서걱한 소리가 나지 않을 때까지 섞어 주었다.

크림 상태가 된 버터에 달걀, 밀가루를 순서대로 넣고 섞어 주면 반죽은 완성이었다.

“다 됐다……. 잠깐 거기 권미음, 그만!”

“왜옼?!”

미음이가 앞발로 찍어 반죽의 맛을 보려 했다. 정말 방심할 수 없는 고양이다.

시치미를 떼려 했지만, 앞발에 묻은 노란 반죽은 부정할 수 없는 증거였다.

미음이를 떼어 놓는 사이에 이번에는 라임이가 반죽을 노렸다. 덜그럭, 덜그럭. 라임이의 탄력 있는 몸에 부딪힌 그릇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헉!”

다행이다. 아슬아슬하게 잡아챘다. 하마터면 그대로 바닥에 엎을 뻔했다.

“안 돼, 굽고 나서 먹어야지.”

“뀨우…….”

“뀨우 금지!”

나는 방해만 하는 두 동물을 격리했다. 그리고 오븐용 철판 위에 반죽을 동그랗게 짜기 시작했다.

“으으윽…….”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곧 적당한 모양으로 반죽을 짤 수 있었다.

다음으로는 오븐을 예열한 뒤 반죽을 집어넣었다. 자그마한 가정용 오븐이었지만 쿠키를 한 판 굽는 데는 충분한 크기였다.

곧 오븐 안에서 쿠키가 노릇노릇 구워지면서 향긋한 냄새가 가게 안으로 퍼졌다. 쿠키가 다 익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미음이와 라임이가 바짝 붙어 오븐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보니 딱 정각이었다. 버터 쿠키를 굽는 데 열중하느라 벌써 이렇게 시간이 흐른 줄도 몰랐다.

나는 얼른 달려가 문을 열었다.

“얼른 들어오세요.”

“안녕하세요.”

기다리던 손님, 지나가 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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