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지나를 만나는 것은 동굴흑곰이 나타난 사건 이후 처음으로, 꽤 오랜만이었다.
지난번 사건에서 늑장대응을 한 <던전관리청> 소속 헌터들은 경질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나는 재빠른 일처리를 인정받아서 소속이 변경되었다. 헌터의 어시스턴트에서 긴급 던전 대책 팀장 강현우 헌터 직속으로,
강현우 헌터는 나도 이름을 들어 봤을 정도로 유명인이다. 공무원 헌터의 귀감이라나 어쩐다나. 그런 인기인 직속이라니 실질적으로는 승진인 셈이다.
다만 이제 거의 본청에서만 근무해서 던전 게이트 쪽에는 자주 오지 않게 되었다. 그동안은 카톡으로만 연락하다가, 궁금한 것도 있고 해서 오늘은 오랜만에 초대했다.
그런데 지나의 낯빛이 어두웠다.
이제 헌터의 어시스턴스도 그만뒀으니 좀 편해졌을 줄 알았는데…….
짙은 다크서클에 충혈된 눈,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한숨. 처음 이 가게 앞에서 쓰러졌을 때와 비슷할 정도였다.
“지나 씨, 어디 안 좋아요?”
“아……. 아뇨. 괜찮아요.”
괜찮은 얼굴이 아닌데…….
“일이 많이 바빠요?”
“그런 건 아닌데요, 그냥 고민되는 일이 조금…….”
나는 재빨리 의자에 지나를 앉혔다. 그리고 오븐 앞에 붙어 있던 라임이를 붙잡아 무릎 위에 놓아 주었다.
쫀득한 몸을 만지다 보면 조금 마음이 편해지리란 생각에서였다. 이 슬라임의 몸은 주무를수록 더 주무르고 싶어지는 중독성이 있었다.
역시나 지나도 라임이의 탱글탱글한 몸에 손이 닿자 참지 못하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주물, 주물, 주물…….
한참 라임이를 만지작거리던 지나가 입을 열었다.
“그게 사실은, 저희 엄마 아들이 헌터거든요.”
“엄마 아들이요?”
“오빠 말이에요.”
“아…….”
“몇 년 전에, 이름도 이상하게 바꾸고 집을 나갔어요. 그러고는 사고만 치고!”
주물, 주물, 주물…….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렸는지, 라임이를 주무르는 손길이 거칠어졌다.
“그런데 전에 대뜸 전화해서는 유명 길드에 들어갈 거라며 자랑하더라고요. 이번 일만 끝나면 앞으로 무시당할 일 없을 거라나.”
지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오빠라는 사람이 어지간히도 속을 많이 썩인 모양이다.
“유명 길드고 뭐고 됐으니까 사고나 안 치면 좋겠어요. 정말 헌터들이란!”
하소연과 함께 무거운 한숨을 토해낸 지나가 갑자기 멈칫했다.
“아, 죄송해요. 리을 씨도 헌터셨죠.”
“아하하…….”
나는 지나에게 내가 각성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정확히는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고 할까. 가게 수리 문제나 세금 문제를 문의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지나의 오빠도 헌터였다니……. 언제 만나게 될 날이 오려나.
“하지만 리을 씨는 헌터 같지 않아서요.”
“그런가요?”
“헉! 아, 저기, 그러니까, 나쁜 뜻이 아니라! 좋은 뜻으로요!”
지나가 당황하며 뒷말을 덧붙였다.
“왜옭왜옭(네가 약해서 그런 거 아니냐).”
슬쩍 끼어드는 미음이는 무시하고.
지나가 하니까 엄청나게 진정성이 느껴지는 칭찬이었다.
“그런데 좋은 냄새가 나네요? 음…… 버터랑 설탕 냄새인가요?”
띵.
마침 오븐 안에서 쿠키가 다 구워졌다.
“새 메뉴를 만드는 중이었거든요. 한번 시식해 보시겠어요?”
“정말 좋죠!”
나는 오븐을 열고 쿠키를 확인했다.
고소한 냄새가 확 풍겨 나왔다.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졌다. 모양도 퍼지거나 부스러지지 않고 동그란 장미 모양이었다.
[아이템: 버터 쿠키(★★★☆☆)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버터 쿠키.
최고의 커피 친구입니다.
유사품에 주의하세요.]
‘내 손안의 카페’ 스킬을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가. 버터 쿠키는 상태 창은 떴지만 다른 효과는 붙어 있지 않았다.
물론, 그런 효과가 없어도 디저트는 그 자체로 훌륭하다.
“왜오오옭?!”
“뜨거우니까 조심…… 아, 벌써 늦었네.”
쿠키를 노리던 미음이가 털을 쭈뼛 세웠다. 갓 구운 쿠키의 뜨거움에 놀란 모양이다.
쿠키를 접시에 옮겨 담아 식히는 동안 나는 커피를 준비했다. 갓 구운 따끈따끈한 쿠키와 같이 먹을 테니까 차가운 커피가 좋겠지.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만든 뒤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창으로 비쳐 들어오는 오후의 햇볕이 따뜻했다. 시원한 커피를 즐기기에 딱 좋은 시간이었다.
나는 먼저 버터 쿠키를 한 입 베어 물었다. 퍼석퍼석하지 않고 부드러운 쿠키가 입 안에서 향긋한 냄새와 함께 사르르 녹아내렸다.
이번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다시 쿠키를 한 입, 커피를 한 모금…….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아메리카노와 쿠키가 아주 잘 어울렸다는 뜻이다. 단맛과 쓴맛. 달콤한 디저트를 먹은 다음에 커피. 환상적인 조화였다.
“어때요?”
단것을 먹으면 스트레스가 풀린다. 버터 쿠키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은 지나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정말 맛있어요!”
머리 위로 나타난 황금빛 게이지도 지나의 만족도를 그대로 보여 주었다.
띠링.
그때, 처음 보는 시스템 알림이 눈앞에 떴다.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콤보 보너스가 발생합니다.
콤보: 오후의 간식(아이스 아메리카노, 버터 쿠키)
효과: 스트레스가 감소합니다.]
아, 정말 스트레스가 줄어드는 효과가 있었다.
콤보 보너스 덕분인지 지나는 가족에 대한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 버린 듯 한결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음이와 라임이에게도 쿠키를 나눠준 뒤, 테이블에 앉아 커피와 쿠키를 먹으면서 지나에게 묻고 싶던 말을 꺼냈다.
“지나 씨, 혹시 상위 속성 던전에 대해서 아세요?”
“네?”
반짝. 지나의 눈이 빛났다.
“리을 씨도 던전에 관심이 있으셨군요!”
으음, 딱히 그런 건 아닌데…….
그러나 지나는 신이 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던전과 헌터, 몬스터가 흔한 세상이 되었지만 던전 그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다.
희귀한 아이템을 얻는 방법, 그리고 던전을 빨리 클리어하는 방법만이 관심사일 뿐. 던전이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생태가 어떤지는 관심의 바깥이다.
“정말 어리석은 일이에요.”
……라고, 지나가 한숨과 함께 쏟아 내었다.
“던전이야말로 아직 밝혀지지 않은 신비가 잠든 미지의 땅인걸요!”
그렇게 말하는 지나의 얼굴에 방금까지와는 다른 생기가 넘쳐흘렀다.
던전이 좋아서 <던전관리청>에 들어갔다더니, 참사랑이었구나.
던전 그 자체에 대한 정보가 적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니 내가 궁금한 정보는 더더욱 찾기 어려웠다.
나는 회귀 전 과거에 최이찬이 휘말린 던전에 알아보려 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던전에 대한 정보를 모으면 미래를 피할 새로운 방법이 떠오를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것은 ‘상위 속성 던전’이라는 키워드뿐. 이 흐릿한 기억만으로는 던전에 대한 정보를 찾기란 힘이 들었다.
에테르-위키도 확인해 보았지만…….
[에테르-위키]
[적격자님이 가꾸어나가는 차원의 백과사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상위 속성 던전.’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더 많은 정보를 모아 백과사전을 알차게 가꾸어 보세요.]
“…….”
시스템도 도움이 안 되었다.
금방 벽에 부딪힌 나는 결국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던전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 묻기로 한 것이다.
바로 지나에게.
“던전 중에 ‘속성 던전’이란 게 있다는 건 알죠?”
“네.”
사실은 지금 처음 들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 넘어가자.
말 그대로, 특정한 속성이 강하게 나타나는 던전을 의미한다고 한다.
“불, 바람, 빙결, 독 속성이 제일 대표적이죠. 알맞은 방어구나 포션이 없으면, 속성 대미지를 입어요. 이런 속성 던전에서 특정 에테르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어떻게 되나요?”
“상위 속성 던전으로 변이해요.”
지나가 설명을 이어 나갔다.
“상위 속성에는 빛, 암흑 두 가지가 있어요. 하지만 상위 속성 던전은 100% 암흑 속성이에요.”
“왜 그렇죠?”
“빛 속성은 암흑 에테르를 특수한 방식으로 정화해야만 발생하거든요. 정화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해요. 그래서 이론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실제로 관측된 적은 없어요.”
“그렇군요…….”
“그리고 암흑 던전은 헌터에게 암흑 대미지를 입혀서 아주 위험해요. 자칫하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요.”
“…….”
지나의 말대로라면, 회귀 전 최이찬이 휘말린 던전도 암흑 던전일 것이다. F급 던전이 상위 속성 던전으로 변이했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그 암흑 속성을 막을 수 있는 아이템이 있으면 좋을 텐데.
“암흑 대미지를 무효화하는 방법은 없나요?”
“네?”
지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헉, 혹시 암흑 던전에 들어갈 생각인가요? 안 돼요, 비전투 헌터가 들어갈 만한 곳이 아니에요!”
나는 깜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내가 들어가려는 건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요.”
내가 정말로 암흑 던전에 들어갈 의사가 없다는 것을 거듭 확인한 뒤 지나가 말을 이었다.
“음, 몇 년째 암흑 던전이 발생하지 않은 상황이라 관련 아이템은 희귀해요.”
“그렇군요…….”
“그나마 있는 물량도 불법 길드에서 사재기를 하는 통에 자취를 감췄어요. 본청에서 단속하고 있지만 어찌나 은밀한지 잘 안 잡힌대요.”
“불법 길드요?”
처음 듣는 단어가 나왔다.
“<던전관리청>에 등록하지 않은 사설 길드를 의미해요. 아니, 그런 놈들은 길드라고 불러 줄 수도 없어요!”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지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 바람에 슬그머니 접시 위의 쿠키에 앞발을 올리던 미음이가 화들짝 놀라 앞발을 뗐다. 입가에 쿠키 부스러기가 묻은 건 모른 척해 줬다.
“그놈들은 밀수에 탈세는 기본이고, 협박까지 온갖 악랄한 짓은 다 저지른다니까요. 특히 신크라운파라는 길드가 요주의예요.”
“많이 위험한 곳인가요?”
“<던전관리청>이 생기기 전부터 있던 곳이에요.”
“그 말은…….”
“아주 악질이라는 뜻이죠!”
지나가 동의를 구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그 박력에 밀려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던전관리청>은 10년 전에 설립되었다.
그 이전에는 <각성자 센터>라는 기관이 헌터 관련 업무를 전담했다.
하지만 비리나 유착 등 문제가 많아, 당시의 헌터계는 무법지대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노예 계약이나 아이템 밀수, 착취 등등 생각할 수 있는 악랄한 일은 전부 다 일어났다.
그때였으면 나 같은 F급 물 몸은 던전에서 짐꾼이나 광석 캐기 노예로나 굴려졌을 테지. 음, 지금은 없어져서 다행이다.
그 시절 온갖 불법을 일삼았던 크라운파라는 길드가 신크라운파라는 이름으로 간판만 갈고 다시 활동 중이라고 했다.
거기까지 이야기한 지나는 자신의 가방에서 웬 두꺼운 책을 꺼냈다. 한 손으로 쥐기 힘들 정도로 두꺼운 하드커버였다.
“리을 씨가 던전에 관심이 있으신 줄은 몰랐네요! 이 『던전생태백과』를 참고하시면 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어요. 이거 빌려드릴게요.”
“……그렇게 두꺼운 책을 가지고 다녀요?”
“이북도 있긴 하지만, 역시 손으로 넘기면서 보는 쪽이 원하는 내용을 찾기 쉽거든요.”
퍽!
테이블 위에 책을 내려놓는데 소리가 아주 묵직했다.
“……호신용으로도 좋고요.”
지나는 천천히 읽고 돌려줘도 된다며 느린 속도 1타 둔기, 아니 『던전생태백과』를 놓고 갔다.
이왕 받았으니 한번 읽어 보도록 할까. 어쩌면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러다 목 돌아간다. 왜우웅.”
“뀻…… 뀨웃!”
“으, 하암…….”
헉, 잠들었다.
엄청난 숙면 효과가 있는 책이었다.
* * *
테이블에 엎드려서 잠이 든 통해 어깨가 뻐근했다. 나는 어깨를 주무르다가 라임이가 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 라임이는 어디 갔어?”
“왜오옹(이공간에 갔다.)”
“거기서 뭘 하는 거지…….”
안에서 낮잠이라도 자고 있는 걸까.
나는 라임이를 데려올 겸, 벽 너머의 이공간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굵은 가지와 무성한 잎을 드리운 위그드라실이 나를 맞이했다. 어찌나 가지가 많은지 커피 열매를 많이 땄는데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라임아, 어디 있어?”
“뀨, 뀨우웃!”
라임이는 위그드라실의 뒤쪽 좁은 공간에서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