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192)

35화

뭐, 됐어.

그렇게 궁금한 것도 아니었고. 나와 관계없는 이야기에는 끼어들지 않는 것이 제일이다.

나는 지난번 삶에서 회사에 다녔을 때를 회상했다. 등산이 건강에 좋다는 상사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가, 매주 일요일마다 상사와 함께 등산을 해야 했던 아픈 기억. 그때 몸으로 깨달은 교훈이다.

나는 가볍게 웃으면서 화제를 전환했다.

“그럼 한이성 헌터도 같이 오시는 건 어떠세요?”

“어? 저 말입니까?”

한이성 헌터가 화들짝 놀라더니 손을 휘휘 내저었다.

“저는 이제부터 급히 처리할 일이 있어서요.”

“그래요?”

“미안합니다. 둘이서 좋은 시간 보내세요.”

……좋은 시간?

커피를 권했을 뿐인데 표현이 조금 이상했다.

볼일이 있다는 건 사실이었는지 한이성 헌터는 후다닥 떠났다. 새롭게 단골을 만들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아쉬운 일이다.

* * *

한이성 헌터가 떠난 뒤 난 혼자 남은 기유현과 함께 가게로 돌아왔다.

“얘들아, 나 왔어.”

“뀨우!”

“키야옹(또 저 인간이냐)!”

나를, 아니, 정확히는 내가 들고 온 제 밥을 반기던 미음이가 뒤따라 들어온 기유현을 보고 말했다.

은근히 낯을 가린다니까. 몇 번 만났으니 기유현에게 슬슬 익숙해질 법도 한데.

“안녕, 미음아.”

“왜오옭!”

기유현이 미음이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건네는 순간, 미음이가 번쩍 앞발을 들고 냥냥 펀치를 날렸다.

파바밧.

오, 피했다.

기유현은 빠르게 날아드는 미음이의 앞발을 전부 피하고는 턱을 살살 쓰다듬었다. 간지러운 손길에 미음이의 심기 불편하던 표정이 점점 누그러졌다.

“왜오오옹…….”

참 쉬운 고양이다. 그 틈에 나는 미음이의 밥그릇에 시리얼을 적당히 부어 주었다.

“오늘 새 메뉴를 만들어 보려고 하는데, 어떠세요?”

“아, 좋죠.”

카페 기본 5종 메뉴 중에서 가장 먼저 만들 메뉴는 카페라테였다.

인기 있기도 하고, 아메리카노 다음으로 꼽을 만한 기본 메뉴였으니까.

나는 카페라테용으로 두꺼운 도자기 잔을 꺼냈다. 그리고 에스프레소를 한 샷 추출해서 담았다.

다음으로는 우유를 데워야 했다. 나는 냉장고에 넣어 둔 우유를 꺼냈다. 아까 차원의 상점에서 산 ‘신선한 우유’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름대로 아주 신선하고 고소해 보였다.

“특이한 우유를 쓰시는군요.”

“아하하, 뭐 그렇죠…….”

이게 황금삼각뿔소의 우유라는 사실은 일단 비밀로 하자.

‘내 손안의 카페.’

[레시피: 카페라테를 선택했습니다.]

레시피의 안내에 따라 밀크 피쳐에 우유를 따른 뒤 스팀노즐을 담갔다. 그리고 스팀 노즐을 작동시켰다.

살짝 밀크피쳐를 내리자 치지직, 소리와 함께 거품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적당한 거품이 생겼을 때 스팀노즐을 잠그고 밀크피쳐를 꺼냈다.

됐다, 벨벳처럼 부드러운 우유거품이 완성되었다. 우유는 온도도 거품 상태도 딱 적당했다.

카페라테 컵을 비스듬히 기울인 뒤 다른 한 손에 밀크 피처를 높이 들었다.

우유가 잘 섞이도록 손을 둥글게 움직이며 부어 주다가 2/3 정도까지 찼을 때 피처를 잔 가까이 붙였다.

커피 가운데 하얀 원이 생길 때까지 따른 뒤 손을 멈추니 딱 알맞게 카페라테가 완성되었다.

[아이템 : 카페라테(★★★☆☆)

상태: 좋음 (남은 시간: 00:30:00)

효과: 최대 기력의 20%가 회복됩니다.]

정수가 아닌 비율로 기력이 회복되는 효과였다. 20%나 채워 준다니 상당한 효과지만.

‘나한테는 별 효과가 없겠구나…….’

최대 기력이 100인 나는 마셔 봤자 고작 20이 회복될 뿐. 하지만 능력치가 높은 사람이 마시면 회복량이 꽤 많을 것 같았다.

‘예를 들면…….’

나는 슬쩍 맞은편을 보았다.

‘힘숨찐으로 추정되는 이 남자라거나.’

“왜 그러세요?”

“……아니요. 드셔 보세요.”

나는 같은 과정을 한 번 더 반복해 카페라테를 한 잔 더 만들었다.

한 잔은 기유현에게, 다른 한 잔은 내가 맛보기로 했다. 충동구매한 우유로 만든 카페라테가 무슨 맛인지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테이블에 앉아 당장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음.”

자연스럽게 탄성이 새어 나왔다.

‘허위 과장 광고가 아니었어.’

루비를 써서 우유를 산 보람이 있는 맛이었다. 이런 우유를 간편하게 살 수 있다면 시스템도 꽤 쓸 만한 것 같다.

탄력 있는 거품이 제일 먼저 입술에 닿았다. 이어, 은은한 달달함이 느껴졌다. 풍부한 우유의 맛은 커피와 잘 어울렸고, 맛을 더욱 깊이 이끌어내었다.

카페라테가 이렇게 맛있다니, 몇 잔이라도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맛있어요. 이건…… 정말 맛있습니다.”

기유현 역시 카페라테를 한 입 마시더니 짧게 말했다. 생긋 짓는 웃음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동시에 머리 위에 황금빛 막대가 나타났다.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기유현의 머리 위 황금빛 게이지가 차오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카페라테를 마실수록 점점 빛이 차오른다. 끝까지 차는 순간, 커피로 깊은 인연을 맺었다는 메시지가 나올 텐데.

어라.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최이찬 때처럼 메시지가 나타나지 않았다.

왜지?

나는 눈을 찌푸리고 게이지를 노려보았다.

‘100%……가 아니야.’

얼핏 100% 같지만 달랐다. 게이지는 약 98%에서 멈춘 상태였다.

예전에는 눈대중으로 100%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약간의 틈이 있었던 것이다.

기유현은 눈을 감고 천천히 카페라테의 맛을 음미했다. 그 표정은 편안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맛있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겠지만…….

100% 만족스러운 ‘궁극의 커피’는 아닌 거네.

슬그머니 오기가 생겼다. 최이찬에게 커피를 주었을 때처럼 가득 찬 황금빛 게이지가 보고 싶다는 오기가 말이다.

이렇게 맛있는 카페라테도 100% 만족스럽지 않다니, 뭐가 마음에 안 든 걸까.

나는 다 비운 잔을 내려놓는 기유현에게 물었다.

“사실 신메뉴 연구 중이거든요. 그 카페라테에서 부족한 점은 없을까요?”

“아니요, 훌륭한 맛입니다. 제가 마셔 본 커피 중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인걸요.”

그러나 게이지는 98%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유현 씨는 특별히 좋아하는 음료 있어요?”

“네? 뭐, 다 잘 마시는 편입니다.”

“으음…….”

다 잘 마신다는 말은 특별한 기호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단 음료만 좋아하는 최이찬과는 반대되는 성향이다. 차라리 최이찬처럼 확실한 기호가 있는 쪽이 ‘궁극의 커피’를 찾기 쉬울 테다.

스킬 ‘커피 한 잔의 인연’의 제한 조건은 ‘궁극의 커피를 마신 상대’의 스킬 복사. 즉, 스킬을 복사하기 위해서는 커피를 마시게 해야 한다.

그래서 눈앞에 있는 힘숨찐으로 추정되는 이 남자, 기유현의 스킬이 무엇일지도 궁금했다. 어쩌면 엄청 강한 스킬이 있어서, 마구 복사해서 쓸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니, 낙담하기는 이르다. 카페 5종 메뉴 중 이제 겨우 첫 번째를 만들었을 뿐이니까.

다음 메뉴는 분명 반응이 다를 테다. 이 카페라테가 고작 98%의 만족도라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당장 다음 메뉴를 만들기로 했다.

다음은 카푸치노였다.

에스프레소 샷에 우유를 탄다는 점에서 카푸치노는 카페라테와 비슷하지만 우유 거품의 비율이 달랐다.

‘내 손안의 카페.’

[레시피: 카푸치노를 선택했습니다.]

먼저 나는 더 작은 크기의 도자기 잔을 꺼낸 다음 에스프레소를 담았다. 그리고 다시 우유를 데웠다.

다만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오래 공기를 주입해 거품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넓은 숟가락으로 우유 거품을 떠서 에스프레소 위에 담아 준 뒤, 남은 우유를 잔에 부어 주면 완성이었다.

잔 테두리에 커피가 이루는 황금빛 원이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시나몬 가루를 뿌려 주니 상태 창이 떴다.

[아이템: 카푸치노(★★★☆☆)

상태: 좋음 (남은 시간: 00:30:00)

효과: 최대 체력의 20%가 회복됩니다.]

이번에는 비율로 체력이 회복되는 효과였다.

이것도 나한테는 큰 도움이 안 되는 효과였지만, 그래도 커피는 맛있었다. 풍부하게 올린 우유 거품이 가벼우면서도 부드러웠다.

“어때요?”

나는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기유현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머리 위의 게이지는 이번에도 정확히 98%에 멈추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게이지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잘 마셨습……. 왜 그러세요?”

“으음…….”

나는 기유현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도 잊고 생각에 잠겼다.

단 음료가 아닌 게 문제였던 걸까.

단맛은 다들 좋아하잖아. 몸에 나쁘니 어쩌니 해도 단맛은 여전히 잘 팔리는 맛이다.

저 고양이만 해도 여러 시리얼 중에 초코 첵스를 제일 좋아한다.

“키야오옹(왜 갑자기 나를 쳐다보는 거냐)!”

앞발을 들고 덤비려는 미음이를 떼어 놓은 뒤, 나는 찬장에서 오늘 차원의 상점에서 산 재료를 꺼내 왔다.

바로 초코소스다.

[아이템: 지옥의 초코소스(★★☆☆☆)

지옥 던전에서 나는 칠흑의 열매로 만든 소스.

달콤쌉쌀한 그 맛은 모카커피는 물론 다양한 디저트에 활용 가능합니다.

넘버 원 프리미엄 브랜드의 초코소스를 선택하세요.]

어쩐지 허접한 광고지 같은 설명이 붙어 있었지만, 병에서 나는 냄새는 아주 짙고 달콤했다.

세 번째 메뉴로는 카페모카를 만들기로 했다. 초코소스가 들어가 달달한 맛이 나니까, 이번에야말로 100%의 만족도를 얻을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였다.

먼저 컵에 초코소스를 담고 에스프레소를 부었다. 티스푼으로 휘휘 저어 소스를 잘 녹인 다음, 스팀 우유를 부어 주면 완성이었다.

그가 다시 시음을 할 때였다.

기유현이 카페모카를 한 모금 마시는 모습이 슬로 모션을 건 것처럼 느리게 보였다.

단지 커피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는 것뿐인데도 꼭 CF를 찍는 것 같았다. 반짝이는 눈에 표정이 풍부하게 담겼다.

아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넋을 놓을 때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만족도다.

카페모카를 천천히 음미한 뒤 기유현이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그가 뭐라고 말을 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온통 신경을 그의 머리 위로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 위 게이지에서 빛이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그 아름다운 빛을 보자, 이번에는 잘될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러나 영롱한 빛은 98%에서 정확히 멈추었다.

또 98%라고?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