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뭘 먹여도 정확히 똑같은 반응이라니, 기계인가?
사실 눈앞의 남자는 헌터 기유현이 아니라 인간형 로봇인 게 아닐까? 로봇이 아니라면 어떻게 매번 똑같은 만족도겠는가.
“……왜 그러세요?”
“아니에요…….”
어쩔 수 없다. 오늘은 물러나고 다음에 재도전하는 것으로 하자.
어떤 음료를 줘도 같은 결과가 나온다는 건 원인이 다른 데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카페모카를 나도 얼른 맛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쉬운 마음을 접어 넣고 내 몫의 카페모카를 손에 들었다. 지옥의 어쩌고 열매로 만들었다는 초코소스는 진하고 맛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암흑 에테르 아이템에 대해 떠올렸다.
기유현도 헌터인데 어쩌면 아는 게 있지 않을까.
아이템은 여전히 구하지 못한 채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카페모카를 마시는 중인 기유현에게 말을 걸었다.
“유현 씨, 저기,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암흑 에테르 아이템에 대해 아세요? 그걸 구할 곳을 찾고 있거든요.”
흠칫, 기유현이 놀랐다.
달칵. 아직 다 마시지 않은 카페모카 잔을 내려놓는다.
고개를 든 그는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되었나 싶을 정도로 차가운 표정이었다. 꼭 아까 콘크리트 벽돌을 터뜨렸을 때처럼 말이다.
자칫하다간 내 머리통, 아니, 카페모카 잔을 깨 버릴 듯한 살벌함으로 기유현이 말했다.
“왜 그걸 찾습니까?”
“좀…… 필요한 곳이 있어서요.”
마음 같아서는 왜 필요한지 설명하고 도움을 구하고 싶지만.
수원 던전 운운하는 회귀 전의 일을 입에 올리는 족족 시스템에 가로막혀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리을 씨가 무슨 클래스의 헌터인지 묻지 않았군요.”
예리한 시선이 나를 훑었다. 갑자기 변한 분위기에 살짝 쫀 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네? 카페 주인인데요.”
“아니, 그거 말고요.”
“카페 주인이라니까요?”
“하아……. 리을 씨 직업을 물은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카페 주인이라고 했잖아요.”
“……됐습니다. 대답하고 싶지 않으신 것 같으니.”
엄청나게 억울했다.
나는 순도 100%의 진실만 말했다고!
욱한 마음으로 기유현을 쳐다보았다.
나는 가능한 한 내 스킬에 대해 남에게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커피에 특수 효과를 부여할 수 있는 이 ‘내 손안의 카페’가 생각보다 좋은 스킬이었기 때문이다.
이름: 권리을
클래스: 카페 주인(F) (Lv.5)
체력 100/100, 기력 100/100
힘: 20(+10), 지력: 12, 민첩: 11, 운: 12
※ 업적 ‘세계수의 수호자’ 효과로 힘이 10 상승합니다.
레벨5가 되었지만 F급인 내 스테이터스는 여전히 바닥이다.
힘, 지력, 민첩, 운의 합이 최저 400은 되어야 던전에 들어갈 만하다고 한다. 조금 쓸 만한 헌터의 커트라인은 500.
그런데 나는 다 더해 보았자…….
‘흑…….’
슬프니까 계산하지는 말자.
F급 물 몸인데 버프와 회복 커피를 만드는 능력이 있는 헌터라니, 착취당하기 딱 좋은 조합이다.
실제로 제작계 헌터를 지저분한 계약으로 묶어 착취한 사건이 뉴스에 나온 적도 여러 번.
잘못된 계약서에 사인했다가 커피 제조 노예가 된 모습이 어렵지 않게 상상되었다. 그런 일은 절대 사양이다.
하지만 기유현이 여기저기 떠들고 다닐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가 암흑 에테르 아이템에 대해 안다면 도움을 구하고 싶다.
아니, 이건 그냥 핑계고.
헌터 클래스를 밝혔는데도 의심받으니 억울했다. 카페 주인이 어디가 어때서!
“그러니까, 헌터 클래스가 카페 주인이라고요!”
“……네?”
기유현이 멍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이 남자가 이렇게 얼빠진 표정을 짓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 커피도 내가 스킬로 만든 거예요. 커피를 만드는 게 내 스킬이고요.”
“커피를 만든다고요?”
기유현이 제 앞에 놓인 커피 잔을 들어서 살폈다. 두어 모금밖에 마시지 않은 카페모카가 가볍게 찰랑였다.
나는 그의 앞에서 다시 에스프레소를 추출해 재빨리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만들었다.
뚫어져라 보는 기유현의 눈빛이 부담스러웠지만 다행히 스킬의 힘으로 완벽하게 손이 움직였다.
“그래요, 이런 식으로요.”
탁, 소리가 나도록 컵을 내려놓은 뒤 설명을 이었다.
“이렇게 만든 커피에는 특별한 효과가 있어요. 마시면 여러 가지 버프나 회복 효과를 줘요.”
“…….”
“저기, 유현 씨?”
“…….”
기유현은 여전히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말없이 잔을 들어 남은 카페모카를 다 비웠다.
방금 확인한 카페모카의 스테이터스는 이렇다.
[카페모카(★★★☆☆)
상태: 좋음 (남은 시간: 00:30:00)
효과: 회복 속도가 200% 빨라집니다.]
그러니 카페모카를 마셨다고 해도, 던전도 아닌 곳에서 효과를 바로 깨닫기는 힘들 터였다.
그러나 기유현은 허공을 짧게 응시하더니 낯빛을 굳혔다. 시선의 방향으로 보아, 자신의 스테이터스 창이나 커피의 설명을 확인하는 듯해 보였다.
그러다가 천천히 나직한 한숨을 토해냈다.
“설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진짜인데요.”
“커피에 회복 효과를 부여한 건 처음 봅니다.”
“그야 나밖에 쓸 수 없는 스킬이니까요.”
“이런 스킬이 존재하다니, 엄청나군요.”
기유현은 진심으로 충격에 빠진 얼굴이었다.
믿어 주는 것 같아서 다행이긴 한데…… 그 정도로? 좋은 스킬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놀랄 정도인가?
이어진 말 또한 내 예상을 아득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런 커피를 이렇게 싸게 판단 말인가요?”
“……네?”
참고로 카페모카의 가격은 3루비다. 방금 2루비냐 3루비냐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겨우 결정했다. 솔직히 그렇게 싼 가격은 아닌 것 같은데…….
기유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포션 중독의 위험 없이 회복할 수 있는 것은 획기적입니다. 이런 가격이라니 거저나 다름없어요.”
“이 커피도 많이 마시면 카페인 중독에 걸려요.”
“……카페인 중독이요?”
‘그게 무슨 문제냐.’ 하는 시선이었다.
“카페인 중독도 생각보다 힘들어요.”
잠도 오지 않고 머리는 지끈거린다. 절대 두 번 겪고 싶은 경험은 아니었다.
“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중으로 회복을 할 수 있으니까요.”
“헤에…….”
기유현의 말에 따르면 이랬다.
커피를 마셔서 회복이 가능하다면 단순 계산으로 포션만 쓸 때보다 두 배의 효율이 나온다.
던전 공략 시 조금이라도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아이템을 소모하는지를 고려하면 엄청난 효과였다.
거기다 효율 좋은 회복 포션은 비싸기까지 했다. 그에 비하면 전혀 부담 없는 가격이라는 것이다.
흠, 그렇구나.
“왜우우웅(이제 알겠냐, 인간)!”
왜 이 고양이가 뻐기는 표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좋은 스킬이었구나.
“왜 여기 있습니까?”
“네?”
뜬금없는 말이었다.
여기 있으면 안 되나요? 여기가 가게 겸 우리 집인데요.
“이런 외진 곳이 아니라 좀 더 번화한 곳에서, 회복 효과가 있는 커피를 판다고 홍보하면 큰돈을 벌 수 있을 텐데요.”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일할 생각은 없어요.”
“아.”
기유현이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반응에 그와 마음의 거리가 약간 멀어졌다.
“커피의 효과가 좋다고 홍보하고 번화가에 가게를 차리면, 계속 일을 해야 하잖아요.”
스킬을 써서 커피를 만들어야 하니까, 아르바이트를 고용하더라도 커피 제조는 내 몫이다.
적게 일하고 많이 쉬는 이번 삶의 목표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 그런 일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우연히, 어쩌다 이 카페를 발견하고 들어온 손님이 커피를 마시고 만족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아는 사람만 아는 가게. 그런 거 있잖아.
“왜오옭(지금은 아는 사람이 없는 가게 아니냐)…….”
‘지금은 고양이 끼어들기 금지 시간이야.’
“왜우웅…….”
잠시 미음이의 두툼한 뱃살을 만지는데 기유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히. 스킬에 대해서는 숨기는 게 낫겠군요.”
조금의 웃음기도 없는 목소리는 내 불안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음, 앞으로도 얌전히 살아야겠다. 그런 결심을 새삼스럽게 다지는 내게 기유현이 물었다.
“하지만 그런 클래스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습니다. 어떻게 각성한 건가요?”
“그건…….”
심리 테스트에 쉬고 싶다는 대답으로 일관했다가 그렇게 됐다고 말하기는 퍽 민망했다. 나는 애매모호한 말로 얼버무렸다.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어쩌다……라고요?”
“그, 그냥 어쩌다요! 시스템 알림이 울리면서 멋대로 클래스가 정해졌어요.”
“왜오옭(너 정말 거짓말 못하는구나)…….”
미음이의 안타까워하는 시선이 뒤통수에서 느껴졌다.
잠깐, 내가 왜 변명하듯 이 남자에게 대답하고 있지? 나는 곧장 태세를 전환해서 그에게 질문했다.
“그럼 유현 씨 클래스는 뭔데요? 어떻게 각성했어요?”
“…….”
“…….”
“암흑 에테르 아이템은 이 커피를 만드는 데 필요해서 찾는 건가요?”
이 사람 방금 말 돌린 거 같은데.
뭐, 됐다. 내가 한번 넘어가 준다.
“비슷해요.”
친구를 살리기 위해 필요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 갑갑했다. 하지만 믿어 줬으면 좋겠다.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꼭 필요한 곳이 있어요.”
“……일단은 알겠습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기유현이 긴 한숨을 뱉어내더니 말을 이었다.
“암흑 에테르 아이템이 있는 곳은 저도 모릅니다. 암흑 속성 던전이 마지막으로 발생한 지 오래 지났어요. 그나마도 중간에 장난질을 치는 놈들이 있어서요.”
아, 이 이야기는 안다.
지나에게서 들은 말을 떠올리고 나는 얼른 대답했다.
“신크라운파인가 하는 놈들이요?”
“그래요. 얼마 전부터 밀거래에 손을 대고 있어요. 무슨 꿍꿍이인지 멍청한 작자들입니다. 곧 처리될 테지만요.”
반짝, 검은색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그러나 아주 잠깐이었을 뿐. 그는 표정을 부드럽게 허물어뜨렸다.
“대신 아이템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압니다. 그분이라면 아실 것 같군요.”
“그래요?”
기유현이 한 아이템 제작 헌터를 언급했다.
예전에는 유명 아이템 제작 공방을 이끄는 헌터였지만 현재는 은거 중. 하지만 다양한 아이템을 다루었으니 정보가 있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촉이 왔다. 게임으로 치면 [암흑 에테르 아이템에 대한 정보를 모으자 3/3 ☞완료]가 뜬 느낌.
은거한 아이템 제작자라니, 너무나도 정보가 있을 것만 같잖아. 왜, 영화를 보면 꼭 속세를 등진 고수가 주인공을 도와주지 않던가. 말로만 듣던 은둔 고수.
드디어 실마리를 찾았다.
“원하신다면 소개해 드릴 수 있습니다.”
“꼭 부탁드릴게요.”
나는 희망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