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192)

37화

4장. 커피 젤리 무서운 줄 모르고

흔히 ‘은거’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공기 좋고 물 좋은 산속, 사람의 발길이 끊긴 깊은 곳에서 조용히 생활하는 모습?

혹은 화려하던 과거를 등지고 시골에서 아이를 가르치거나 농사를 지으며 유유자적 살아가기?

그도 아니면 ‘나는 자연인이다.’에 섭외될 것 같은 자유분방한 생활?

어쩌면 잘 관리된 한옥에서 살며 풍류를 즐기는 생활일 수도 있겠지.

“그럼 어디로 가면 되나요?”

너무 먼 곳에 가야 하면 어쩌지? 미음이랑 라임이 밥을 줘야 하는데. 기차 티켓을 예매해야 하나? 역시 좀 비싸도 KTX를 타는 편이 낫겠지?

그런데 전부 아니었다.

기유현이 나를 부른 장소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이었다.

“아, 리을 씨, 오셨군요.”

“…….”

“왜 그러세요?”

“잠시, 내 자신의 편견과 싸우는 중이에요.”

“……?”

* * *

다음 날, 기유현이 나를 불러낸 곳은 청계천 청계3가 앞이었다.

약속한 시각 정각에 그곳으로 가자 기유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길게 뻗은 몸을 감싸는 검은 코트가 잘 어울렸다. 테가 두꺼운 안경 너머의 큰 눈동자가 나를 발견하고 웃음을 머금는다.

살짝 길게 자란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릴 때마다, 지나던 사람들이 흘긋 그를 쳐다보았다.

역시나 엄청 눈에 띄는 외모다.

‘저 안경은 대체 왜 쓰는 거지?’

시력이 나쁜 것 같지는 않다. 애초에 헌터는 각성 시 신체 능력이 좋아지니까 시력이 나쁜 사람이 없다.

설마 얼굴을 가리려고 쓰는 건가?

에이, 설마.

눈 밑에 점을 찍거나 안경을 쓴다고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계관도 아니고, 안경은 조금도 그의 화사한 얼굴을 가려 주지 못했다.

기유현의 뒤로 미남으로 유명한 랭킹 17위 오서호 헌터가 찍은 음료수 광고가 걸려 있었는데, 솔직히 광고판보다 그가 더 눈에 띌 정도였으니까.

그냥 안경이 좋아서 쓰는 건가?

으음, 그래, 취향은 존중하도록 하자.

“여기에 그분이 계신 건가요?”

나는 주위를 슬쩍 둘러보고는 입술을 뗐다.

청계천이라니……. 은둔 고수가 있는 곳 치고는 너무도 도회적이다.

가게에서 거리도 가깝다. 지하철 타고 을지로3가역에서 내려서 조금만 걸으면 도착했다.

주변은 막 문을 여는 상가와 물건을 나르는 트럭, 바쁜 걸음을 옮기는 직장인들로 혼잡했다.

“잠깐 비켜 주세요.”

“아, 네.”

트럭에서 커다란 상자를 내리던 사람이 나를 불렀다. 나는 황급히 옆으로 움직여 피했다.

복잡하다. 상가 특유의 혼잡한 활기가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막연히 상상한 은거의 이미지와는 너무 달랐다. 좀 더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일 줄 알았는데…….

잠시 스스로의 편견을 반성하는 중이었던 내게 기유현이 말을 걸었다.

“이리로 오시죠.”

“어, 같이 가요!”

기유현은 복잡한 청계천 상가를 슥슥 나아갔다. 다리가 길어서 그런지 걸음이 빠르다.

후다닥 뒤를 쫓아가자 어느 좁은 골목 입구 앞에서 그가 나를 기다려 주었다. 바로 옆에 ‘청계3가 공방 거리’라고 적힌 간판이 보였다.

청계천 일대에는 원래 아이템 제작계 헌터들의 소규모 공방이 모여 있었다. 희귀한 아이템을 취급하는 노점상도 있어 몇 년 전까지는 제법 북적거렸다. ‘<헌터 마켓>에 없으면 청계천에 가 봐라.’ 하는 말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닫은 곳이 많네요?”

활기찬 주변과는 달리 ‘청계3가 공방 거리’는 쓸쓸한 분위기였다. 평일 오전인데도 연 곳보다 닫은 곳이 많았고, 인기척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제작계 헌터들이 점점 대형 공방으로 이적하면서 많이 쇠퇴했습니다. 아무래도 소규모 공방은 살아남기 힘든 환경이 됐거든요.”

“그렇군요…….”

그 을씨년스러운 골목 안쪽으로 한참 들어가자 어떤 상가 건물이 보였다.

앞에는 잡다한 에테르 광석과 만들다 만 듯한 아이템이 너저분하게 놓여 있어서 입구를 찾기가 힘이 들었다.

“여기입니다.”

기유현이 슥, 잡동사니에 가려진 문을 열었다. 얼마나 오래 사람이 드나들지 않았는지, 끼이익, 하는 소리가 났다.

‘들어가도 되는 거 맞겠지?’

아이템을 구하러 갔다가 이세계에 떨어졌습니다, 하는 전개는 아니겠지?

“……꿀꺽.”

나는 조심스럽게 문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좁은 입구에 비해 안은 뜻밖에 넓었다. 오래된 한옥을 개조한 건물에 안뜰까지 딸려 있었다. 이 안뜰이 물건에 파묻혀 있지만 않았다면 꽤 고즈넉한 분위기일 듯했다.

긴 안뜰을 한참 걸어 들어가자 다시 문이었다. 먼지에 뒤덮인 간판에는 ‘김덕이 공방’이라고 적혀 있었다.

끼익. 삐걱거리는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곧 먼지가 풀풀 날리는 안쪽에서 매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잠가 두었을 텐데, 어떻게 들어왔지?”

“열려 있었…….”

“이제 아이템은 안 판다고 했네. 얼른 돌아가게나.”

안에서 나온 사람은 작고 마른 체구의 할머니였다.

“……자네인가.”

주름이 자글자글했지만 허리는 꼿꼿하고 목소리는 또렷하다.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의 할머니는 기유현을 보고 얼굴을 찌푸리더니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축객령을 내리려 했다.

나는 이 할머니를 어디서 봤는지 금방 기억해 냈다.

그때 <헌터 마켓>에서 위탁 상점을 하던 할머니다!

내게 50루비를 받고 잡템 세트와 반지를 판 사람.

“어, 할머니! 안녕하세요!”

반가운 마음에 꾸벅 고개를 숙였다.

당장 우리를 문밖으로 쫓아낼 기색이던 할머니가 나를 보고 반색했다.

“당신은……. 그때 헌터 마켓에서 만났었지.”

“네, 맞아요. 아, 저는 권리을이라고 합니다.”

“김덕이일세. 어서 오게. 용케 알고 찾아왔구나.”

“……저는 여기 문턱도 넘지 말라면서요?”

기유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말해도 멋대로 찾아오지 않나.”

기유현하고 할머니가 아는 사이였다니, 세상은 좁구나.

가만, 그럼 이 할머니가 바로 은둔 고수?

그러고 보니 할머니가 준 반지 덕분에 던전에 들어가지 않고 커피 원두를 로스팅할 수 있었다. 어쩐지 은둔 고수가 만든 아이템이라 그런지 좋더라. 존경심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나는 냉큼 붉은 돌이 박힌 반지를 내밀며 말했다.

“할머니, 전에 주신 이 반지 정말 잘 쓰고 있어요. 감사해요!”

“그래? 무슨 효과가 있던가.”

“네? 할머니가 만드신 거 아닌가요?”

“내가 만들긴 했지만 완성한 것은 운이었다. 내가 한 일은 그저 적합한 사람에게 전달한 것뿐이라네.”

겸손이 지나치신 것 같은데. 천재에게는 99%의 실력과 1%의 운이 필요하다, 뭐 이런 뜻인가.

아무튼 나는 할머니의 질문에 대답했다.

“이 반지, 불이 나오더라고요! 커피 볶는 데 잘 쓰고 있어요.”

“…….”

“…….”

정적.

잔잔하게 이어지던 대화가 뚝 끊어지고 차디찬 고요가 그 자리를 채웠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오묘한 표정으로 할머니가 나를 바라보았다. 놀란 것 같기도 했고, 허탈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옆에서는 기유현이 숨을 죽이고 웃고 있었다. 왜 웃냐며 옆구리를 찔렀지만 웃음을 그칠 기미는 없었다.

설마…… 불을 붙이는 데 쓰는 게 아닌가?

하지만 할머니는 곧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쓰고 있다니 다행이네.”

뭐,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괜찮겠지?

할머니는 우리를 데리고 공방 안쪽의 방을 향했다. 공방 안쪽에도 산더미같이 아이템이 쌓여 있었는데, 하나같이 다 신기해 보였다. 나는 그중 하나 특이하게 생긴 병을 가리키며 물었다.

“와, 여긴 신기한 게 많네요. 이건 뭐예요?”

“그건 일시적으로 존재감을 지워 주는 약이란다.”

“그럼 이건요?”

“아이템의 효능을 조절할 때 쓰는 중화제.”

“저기 저 막대기는…….”

“마지막 마감만 남은 아이템이지.”

“이 붓은……. 우와, 할머니. 어떻게 이렇게 작은 데다 그림을 그리셨어요?”

“크흠, 이 정도쯤이야…….”

나는 안에 있는 아이템을 구경하면서 할머니와 한참 수다를 떨었다.

공방에는 신기한 아이템이 참 많았다.

내가 열렬하게 리액션하자 할머니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역시 칭찬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얼핏 엉망진창으로 보이는 공방의 안은 나름의 법칙으로 잘 정돈되어 있었다. 중화제나 에테르 포션에는 전부 라벨이 붙어 있었고, 아이템 세공 도구도 방금 닦은 것처럼 반짝반짝했다.

애착이 없다면 이렇게 세심하게 관리하지는 않았을 거다.

아직 아이템 제작을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왜 은거 중인 걸까.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아이템 제작은 안 하시는 건가요?”

“그래.”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특별한 이유는 아닐세. 그저 내 사명을 다했을 뿐.”

“사명……이요.”

할머니는 더 말하지 않고 생긋 웃음만 짓더니 말을 돌렸다.

“그래서, 오늘 찾아온 이유는 뭔가?”

헉, 본론을 까먹을 뻔했네.

정신없이 안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엄청나게 흐른 다음이었다.

“실은 부탁이 있어서 왔어요. 암흑 에테르 아이템이란 걸 구하고 있거든요. 혹시 구하는 방법을 아시나 해서요.”

“그건…….”

흠칫, 놀란 할머니가 이내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이유로 찾지? 암흑 에테르는 정제 방법에 따라 사람을 크게 해칠 수도 있네. 그런 이유라면 알려 줄 수 없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기유현도 그렇고 다들 반응이 나쁜 걸 보아 정말로 위험한 물건이기는 한가 보다.

“말 못할 이유인가?”

“그런 것도 아닌데……. 그냥 믿어 주실지 잘 모르겠어서요.”

“들어 보고 판단하지.”

“친구를 구하기 위해서 필요해요. 친구한테 꼭…… 필요하거든요.”

인과율 어쩌고의 방해를 피하기 위해, 곧 암흑 속성 던전이 나타난다거나 이대로면 최이찬이 그곳에서 죽을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빼니 할 수 있는 말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냥, 친구의 몸을 지킬 스킬을 얻는 데 필요하다는 말만 전했다.

불충분한 설명이었을 텐데도 할머니는 더 묻지 않았다.

“약간이지만 나한테 비정제 암흑 에테르가 남아 있다. 작은 액세서리 하나쯤 만들 양은 될 거네.”

드디어.

할머니의 뒤로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걸 주는 대신 리을 양이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네.”

“네? 뭔데요? 뭐든 말씀하세요!”

“나는 어떤 사람이 남긴 물건을 찾고 있어. 이름은…… 박희순.”

박희순?

어, 이 이름은…….

“우리 할머니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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