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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38/192)

38화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의 이름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깜짝 놀랐다.

동명이인인가? 박희순이 그렇게 특이한 이름은 아니니까.

하지만 할머니는 맞는다며 살짝 웃음 지었다.

“딱 한 번 손녀 사진을 보여 준 적이 있었지. 그대로 컸구나.”

할머니가 반가운 표정으로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그리고 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 주었다.

조금 더 젊어 보이는 김덕이 할머니와 우리 할머니가 그 안에 있었다. 두 분은 아주 친한 사이처럼 보였다.

“아는 사이셨어요?”

“예전에 그분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네.”

목소리에 그리움이 두텁게 묻어나왔다. 시선은 나를 향한 채지만 할머니는 아주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보답을 하기 위해 소식을 수소문했을 때는 이미 돌아가신 다음이더군.”

“네, 몇 년 전에 병으로…….”

“박희순 씨의 유품 중에 손거울이 하나 있을 걸세. 예전에 내가 빌려드린 물건인데. 돌려받고 싶으니, 그걸 찾아와 주면 좋겠네.”

할머니는 손거울의 모양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가게에 남아 있던 잡동사니를 정리하는 동안 그런 손거울은 발견하지 못했다. 할머니 물건을 버리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다른 사람이 손댔을 리도 없고.

그러나 바로 그런 물건은 본 적 없다고 거절하기 힘이 들었다.

암흑 에테르 아이템이 꼭 필요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할머니에게서 짙은 그리움이 느껴져서였다.

그리움은 언제나 강렬한 감정이지 않나.

기억의 틈새에서 배어 나와 폭력적으로 마음을 할퀴고 지나간다. 그 막연하면서도 막대한 감정이 유난히 견디기 힘든 순간이 온다. 그런 때 추억이 담긴 물건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손거울이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할머니 물건을 정리할 때 본 적이 없는데……. 하지만 창고를 한번 찾아볼게요.”

“그거면 충분해. 고맙네.”

할머니가 부드럽게 웃었다.

쓸쓸함이 감도는 낯이었다.

* * *

권리을은 공방의 아이템이 신기한지 구경하는 중이었다. 기유현은 멀찍이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표정 변화가 크다. 김덕이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가, 또 옆의 아이템을 들여다본다. 김덕이 역시 그녀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 나갔다.

미심쩍은 부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그녀는 ‘별의 지혜 교단’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것으로 보였다.

다행이다.

‘죽이지 않아도 되어서.’

그 생각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김덕이가 기유현의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었다.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가 있어.”

“네?”

“이렇게 힘이 들어가 있어서야. 조금 힘을 빼는 게 어떻겠나.”

기유현은 김덕이를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말투는 정중했으나 날이 서 있었다.

“뭘 알고 계시는 겁니까?”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네.”

“농담이 지나치시군요. 당신이 유일품을 허투루 넘겼을 리가 없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

“왜 크투가의 반지를 저 사람에게 준 겁니까? 저 사람은 대체 누굽니까?”

“자네도 모르는 모양이군.”

“…….”

기유현은 대답 대신 얼어붙은 표정 그대로 김덕이를 바라보았다. 말장난 따위를 할 시간은 없다는 표현이었으나, 이 은거 중인 장인은 여전히 느긋한 투였다.

“그런 표정 짓지 말게나. 그냥 어느 날 목소리가 들려왔을 뿐이라네.”

“목소리……라고요.”

“내 역할은 크투가의 반지를 완성해서 적합한 주인에게 넘기는 것이라고 말했지. 나는 그 목소리를 따랐다네. 그 밖의 일은 몰라.”

“크투가의 반지를 소유할 적합한 주인이 저 사람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기유현은 눈가를 찌푸렸다. 시야의 끝에 여전히 공방을 구경하고 있는 권리을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면 저 사람은 누구죠? 무슨 힘을 갖고 있어서…….”

“자네도 목소리를 듣지 않았나.”

“…….”

기유현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김덕이가 무슨 일을 말하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남자의 잘 빚어진 낯은 표정에 따라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다.

이제까지 겨우 유지하고 있던 예의바른 웃음을 걷어 내면 남는 것은 냉정한 절대자의 모습이다. 새까만 눈은 불을 지른 듯 뜨거웠다.

만약 권리을이 보았다면 좀 더 그의 정체를 의심했겠으나, 그녀는 기유현에게서 눈을 돌린 채였다.

“나는 당신에게 장인에 대한 예우를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만 더 같은 말을 하면 참아 넘기지 않겠다는 경고였다. 그러나 김덕이는 꿈쩍도 않고 서 있었다.

기유현은 13살 때 헌터로 각성했다.

하지만 여느 헌터의 각성처럼 우연도 기적도 아니었으며, 축하도 환호도 없었다.

그의 각성은 인위적으로 준비되었다.

<각성자 센터.>

세간에는 비리 때문에 사라진, <던전관리청>의 전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실체는 더욱 끔찍하다.

먼저, ‘별의 지혜 교단’이라고 이름을 내세운 자들이 <각성자 센터> 상층부를 점령했다. 우주의 진리를 탐구한다고 떠들어 대는 사이비 종교 단체였다.

교단의 지시 아래 <센터>는 인위적으로 각성자를 만들기 위해 어린아이들을 모았다.

기유현은 그 아이들 중 하나였다. <센터>의 목적을 짐작도 하지 못한 채, 가족을 잃은 자신을 돌봐주는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 <센터>는 ‘문’을 열었다. 이계의 마신을 소환할 수 있는 게이트였다.

게이트 너머의 마신을 직접 만난 아이들은 전부 미쳐버렸고 이윽고 사망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기유현은 여전히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비명과 울음, 피, 고통…… 그리고 목소리.

[마신 소환 완료. 지정된 좌표에 마신을 구현화합니다.]

[……실패. 인과율로 인해 현실 개입이 제한됩니다.]

[위대한 마신: □□□□가 궁극의 문 너머에서 당신을 바라봅니다.]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여. □□여.】

머릿속으로 직접 들리던 섬뜩한 읊조림. 귀를 막아도 그 목소리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문 너머의 것은 웃고 있었다.

그것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인간의 인지 능력을 초월하는 압도적인 공포. 그저 존재할 뿐인 허무. 인간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미쳐 버리는 무정형의 혼돈.

섬찟한 감각과 동시에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나타났다.

[위대한 자: □□□ □□가 당신과의 계약을 원합니다.]

[적격자임을 확인했습니다.]

[적격자: 기유현의 의지에 따라 능력이 부여됩니다.]

[클래스: 정의로운 지배자(S)로 각성했습니다.]

[스킬: 백광의 권능(S)을 획득했습니다.]

…….

[인과율이 한계에 달했습니다. 이 이상의 개입은 현실 붕괴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접속이 강제로 종료됩니다. ……접속 종료까지 30초]

【나는 심연의 끝에 잠들어 있다. 나를 찾아라.】

[접속이 종료되었습니다.]

정신을 차리자 주위는 온통 피바다였다. 함께 있던 아이들은 모두 죽었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기유현이었다.

그리고 한국 최초이자 최고의 S급 헌터로 각성했다.

“오오, 드디어 성공했다! S급이야!”

“□□□□여, 위대한 마신이여, 드디어 우리에게 회답해 주시나이까!”

<각성자 센터>는 드디어 실험에 성공했다며 환호했다. 으레 미친놈들이 그렇듯, 그들은 다른 아이들의 죽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역겨웠다.

각성한 기유현은 곧장 <각성자 센터>를 무너뜨리고자 마음먹었다. 당시 유일하게 그와 함께한 사람이 한이성 헌터였다.

15세, 긴 싸움의 끝.

그는 <각성자 센터>를 파괴하고 <별의 지혜 교단>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교단은 포기하지 않고 그늘 속에서 움직였고, 이윽고 마신을 부활시킨다.

마신의 부활을 막기 위해 던전을 오르는 동안 기유현은 생각했다.

《궁극의 문》 너머에 자리한 마신에게 묻고 싶다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왜 자신만이 살아남았는지.

……왜 그날, ‘목소리’가 자신을 불렀는지.

그러나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시간은 과거로 되감겼다.

다시 반복되는 시간.

이번에야말로 마신에게서 세계를 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지만.

그날의 물음은 여전히 답을 구하지 못한 채다.

각성 시 들은 그 목소리에 대해서 혹자는 신의 목소리니, 별의 목소리니 하는 멋들어진 이름을 붙였다. 성좌라고 부르는 자도 있었다.

극소수의 각성자에게 말을 걸어, 특별한 힘을 부여하는 우주의 신격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본질은 그렇게 인간에게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날 이후 기유현은 자신 안의 어떤 부분이 닳아 없어졌다고 느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각성하기 전 자신이 어떠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자신 안의 ‘목소리’가 남은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그런데 김덕이가 ‘목소리’에 대해서 언급하다니.

기유현은 불쾌감에 얼굴을 찌푸렸다.

“나도 목소리를 들었다네.”

“……!”

흠칫 놀랐다.

김덕이도 우주의 신격과 계약한 것인가.

“무엇을 해야 할지, 내 역할이 무엇인지 말해 주었지.”

“…….”

“각성한 순간부터 그날을 기다려 왔고, 겨우 이루었을 뿐이라네.”

그렇게 말하는 김덕이의 얼굴은 아주 편안해 보였다. 기유현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저는 운명을 믿지 않습니다.”

“흠?”

“당신이 유일품을 넘긴 상대건 뭐건……. 저 사람이 내 목표를 방해한다고 판단되면 제거할 겁니다.”

“호호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은퇴한 장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가 있어. 힘을 빼면 보이는 것이 있을 거라네.”

장인은 그렇게 말했지만.

적은 여전히 그늘 속에 숨죽이고 있다.

쓴웃음을 지은 김덕이가 자리를 떠나고.

“거기서 뭐 해요?”

“……아.”

어느 사이엔가 권리을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기유현은 언제 날을 세웠냐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할머니께서 이거 가져가도 좋다고 하셨어요. 예쁘죠?”

그녀의 손에는 작은 꽃 모양의 머리핀이 놓여 있었다. 꽃의 중심부에 촘촘히 박힌 하얀 돌이 눈에 띄었다.

“그건…….”

“왜 그래요?”

정신 대미지를 경감하는 4성 레어 아이템이라고 말해 주려다 그만두었다. 평범한 머리핀으로 알고 있는 것 같으니, 진실은 모르는 편이 마음이 편할 테다.

평범한 사람이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각성자라고는 하나 교단은커녕, 헌터나 던전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평범한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유현은 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묘한 감정을 느꼈다. 특히 그녀의 커피를 마실 때는 더욱 그랬다.

커피의 회복 능력뿐만 아니라, 한마디로 정의내리기 힘든 따뜻한 느낌이 속에서부터 차오르는 것 같았다.

어째서 이런 느낌이 드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이리 주세요.”

“네?”

기유현은 권리을의 손에서 머리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밤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다음 머리핀을 꽂아 주었다.

권리을은 그가 손을 뗄 때까지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구불구불한 밤갈색 머리카락과 붉은 뺨을 보면서, 기유현은 낮게 중얼거렸다. 어느새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다행입니다.”

아직은 당신을 의심하지 않아도 되어서.

기유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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