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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40/192)

40화

머리에도 찢어진 상처와 멍이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냥 넘어지거나 사고로 인한 상처가 아니다. 누군가 할머니를 공격한 거다. 상처를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설마, 방금 그 남자…….’

뚝, 뚝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일단 얼른 할머니를 병원으로 모셔야 했다. 한시가 급했다.

“할머니, 지금 구급차를 부를 테니까…….”

“얼른…… 도망…….”

“네?”

할머니가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너무 가냘프고 떨리는 탓에 잘 들리지 않았다.

“더 말씀하시면 안 돼요. 상처가 벌어질 수도 있어요. 저 붙잡으세요!”

할머니를 일으킨 다음 밖으로 나가려 하는데 일순 매캐한 냄새가 확 퍼졌다.

“……어?”

타닥.

밖에서 불을 붙인 종이가 날아 들어왔다.

바닥에는 어느새 휘발유가 뿌려져 있었다. 불씨는 금방 커졌고, 불이 공방의 물건을 태우며 순식간에 출구를 막았다.

누가 불을 지른 거다.

심장이 더욱 거세게 쿵쿵 뛰었다. 손도 쓸 수 없을 만큼 삽시간에 불이 높이 피어올랐고, 연기가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얼른 빠져나가지 않으면 이대로 질식할 수도 있었다.

“……윽!”

불을 끄려 가까이 다가가 봤지만 뜨거운 열기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들통에 수돗물을 받아 불길에 끼얹어 보았다. 그러나 잠깐 사그라드는 듯싶더니 더 거세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시간 여유는 없다. 차라리 내가 물을 뒤집어쓰고, 할머니를 업고 나가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할머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다시 들통에 수돗물을 받아 머리 위로 부었다. 차가운 감각조차도 곧 열기에 지워진다.

“읏…….”

불길은 더더욱 거세졌다.

열기와 매캐한 냄새에 머리가 어질어질한 것을 느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공기의 질감이 무겁게 내려앉은 것 같았다.

분명 같은 곳에 서 있는데,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 된 느낌.

그리고 머리 위로 넓게 빛의 그물이 펼쳐졌다.

어디선가 이런 그물을 본 적이 있다. 어디였더라…….

그래, 기유현과 튜토리얼 던전에 갔을 때다.

이어진 광경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신비했다. 공중에서 생겨난 미세한 빛의 입자가 그물을 이루어 불길 위로 내려앉더니, 순식간에 불이 사라졌다.

말 그대로 사라졌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붉은 불꽃도, 매캐한 연기도, 뺨을 홧홧하게 데우던 열기도. 그물이 걷힌 다음에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남아 있는 그을음만이 불길의 존재를 떠올리게 해 줄 뿐이었다.

[업적: 두 번째 죽음의 위기를 회피함

축하드립니다.

죽음의 위기를 무사히 회피했습니다.

생명을 소중하게 여깁시다.

보상: 랜덤 스킬 포인트 1]

꺼림칙한 시스템 알림이 뜨는 것과 거의 동시에.

“리을 씨!”

검게 타 무너진 입구로 뛰어 들어온 사람은 기유현이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주저앉은 나를 발견하고 살짝 안도의 빛을 띠었다.

이제 살았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너무 반가워서 왈칵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괜찮아요?”

불은 꺼졌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의식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유현 씨, 할머니가…….”

* * *

실패했다.

그는 또 실패하고야 말았다.

지존은 덜덜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멀찍이 불길에 휩싸인 공방이 보였다. 두려움은 점점 커졌고, 이제는 몸 전체가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등 뒤의 불꽃이 꼭 자신을 쫓아오기라도 할 것 같았다.

불길이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을 곳까지 달려간 지존은 털썩 주저앉았다. 힘이 빠진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읊조렸다.

“내가 아니야…….”

내가 한 게 아니다.

내가 그 할머니를 죽인 게 아니다.

하지만 누가 그의 말을 믿어 주겠는가. 할머니는 이미…….

“그, 그래! 신고…… 신고를…….”

지존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려 했다. 그러나 손끝이 덜덜 떨려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한 게 아니라고…….”

낮은 중얼거림을 듣는 사람은 없다.

<씨앤엘 코퍼레이션>에 들어오는 대가로 이세인 대표는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바로 어떤 헌터에게 붉은 돌이 박힌 반지를 받아오는 것이었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필요하다면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해도 된다고까지 말했다.

지존은 처음에는 쉬운 일거리라고 생각했다.

헌터계는 약육강식의 세계다. 설령 지존이 상대에게서 반지를 억지로 빼앗는다고 해도 약한 쪽이 잘못인 거니까.

그러나 상대가 노인인 것을 알고는 크게 당황했다.

그의 주먹이 스치기만 해도 쓰러질 것처럼 작고 마른 할머니였다.

헌터로 성공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고 마음먹은 지존이었지만, 노인을 무력으로 협박할 만큼 악랄하지는 못했다.

“누가 보냈는지 알겠군.”

지존이 검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도 할머니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뜨거운 보리차를 내오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찾는 반지는 이미 올바른 주인에게 전달되었다네.”

“윽……. 주인이고 뭐고 알 바 아님다! 반지를 내놓으십쇼!”

“그건 불가능하네. 대신 이곳에 있는 아이템 중 하나를 줄 테니 물러나 줄 수 없겠나.”

“누가 이런 잡템 얻으러 온 줄 아쇼.”

“모두 나 김덕이의 자신작이라네.”

“크흠, 흠! 그럼 한번 보여 주시든가. ……괘, 괜찮은 아이템이면 받아 줄 수도 있고!”

차마 할머니를 겁박하진 못하고 적당한 아이템을 하나 받아 낸 후 물러나려 했다.

푹!

그때, 갑자기 뒤에서 괴한이 나타나더니 칼을 휘둘렀다.

살갗을 가르는 불쾌한 소리가 들렸다. 칼이 할머니의 배를 찌르는 것은 순식간이었고, 괴한은 곧장 달아났다. 지존은 놀라 숨도 쉬지 못했다.

“할머니, 괜찮으심까? 자, 자, 잠깐만 기다리십쇼. 저, 저, 망할 놈을!”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지존은 허둥지둥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괴한은 이미 모습을 감춘 다음이었지만, C급 헌터인 그는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테다. 그런 악독한 놈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런데 공방의 대문을 나서 괴한의 뒤를 쫓는데, 어디선가 날아온 불씨가 불을 붙였다.

“아, 안 돼…….”

불은 금방 번져 공방의 입구를 막았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왈칵 두려움이 차올랐다.

괴한은 이미 온데간데없고, 남은 것은 자신 혼자뿐이었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범인으로 몰릴 테다. 안 된다. 이번에야말로 성공해서 잘나가는 헌터가 되려 했는데, 살인 누명을 쓸 수는 없다.

지존은 두려움에 쫓겨 후다닥 공방 앞에서 도망쳤다.

그러나 결국 양심이 그의 발을 잡아챘다. 할머니의 파리한 낯을 떠올릴 때마다 발걸음이 무거워졌고, 결국 바닥에 주저앉고 만 것이다.

지존은 숨을 헐떡거리다 중얼거렸다.

나는 지존이다. 헌터계의 지존이 되기 위해 흔해 빠진 본명을 버리고 이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누명을 입을 것이 무서워서 도망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겨우 핸드폰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지존은 애써 떨림을 억누르고 화면에 숫자를 입력했다. 비 오듯 쏟아지는 땀에 손가락이 미끄러진다.

“윽, 1, 1, 9…….”

바로 그때였다.

퍽!

“으아아악!”

골목 맞은편에 나타난 사람이 발로 핸드폰을 쥔 지존의 손을 밟았다. 어찌나 힘이 센지, C급 헌터의 힘 스테이터스로도 손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콰직!

신발 굽에 핸드폰 액정이 산산조각이 났다. 새까만 액정에 고통과 겁에 질린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오른손의 뼈가 부서진 것 같다. 지존은 신발 굽에 짓밟힌 오른손을 감싸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뜻밖의 인물이 앞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그…….”

<씨앤엘 코퍼레이션>의 대표 이세인을 만날 때 그를 안내한 비서였다. 아주 아름답지만, 나이도 성별도 모호한 분위기의 비서.

이름은 이온.

가만, 이런 얼굴이었나?

이렇게 소름 끼치는 사람이었던가?

지존은 비서의 눈을 마주하고 흠칫 놀랐다. 묘한 빛이 감도는 눈은 꼭 사람의 눈이 아닌 것 같았다. 푸른빛이 도는 모조 보석을 끼워 넣은 양 기이했다.

자신도 모르게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이윽고 비서가 살짝 미소 짓더니 입술을 움직였다. 말투는 부드러웠으나,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실망이군요.”

“네, 네……?”

“대표님도 많이 낙심하셨어요. 이렇게 간단한 일도 똑바로 해내지 못하다니. 지존 헌터를 믿어 준 대표님의 마음이 어떠시겠어요.”

“설마……. 설마, 방금 그 할머니를 주, 주, 죽인 거.”

굳어 버린 혀가 똑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염려 마세요. 지존 헌터가 일을 똑바로 못해도, 제가 잘 처리했으니까. 날씨가 맑아서 다행이에요. 건조해서 작은 불씨도 큰불이 되기 쉽다고 뉴스에서 말하더라고요.”

“하지만 할머니……. 그런 할머니를, 어떻게.”

“다 설명 드렸잖아요. 현재 랭킹 1위가 인류를 배신할 테고, 그를 막기 위해서는 반지가 필요하다고.”

비서가 무릎을 굽혀 바닥에 앉았다.

지존은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비서가 발로 그의 손을 밟는 것이 빨랐다.

“으악! 악!”

신발 굽에 짓눌린 손등이 아팠다.

지존이 비명을 지르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서는 느긋하게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내밀었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 멍하니 눈만 깜빡이니, 비서가 생긋 웃었다. 소름끼치는 웃음이었다.

“지존 헌터가 정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면 신고를 해도 좋아요. 그래요, 나이 드신 할머니께 나쁜 짓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꿀꺽.

“그런데 그 사실은 아실까요? 현장에서 그 할머니를 찌른 흉기가 발견될 텐데.”

“그게, 무슨…….”

“얼마 전에 대표님께서 지존 헌터에게 무기를 하나 선물하셨죠. 지존 헌터가 예전에 쓰던 칼은 지금 어디 있을까요?”

비서의 말뜻을 알아들은 지존이 하얗게 질렸다.

원래 쓰던 칼은 <헌터 마켓>에 처분해 준다기에 눈앞의 이 비서에게 맡겼다. 자신의 이름까지 적힌 애도(愛刀)를.

갑자기 나타난 괴한이 할머니를 공격하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그자가 <씨앤엘>의 사주를 받은 자라면? 자신이 예전에 쓰던 무기를 흉기로 사용했다면?

신고해 봤자, 범인으로 몰리는 것은 자신이라는 뜻이다.

“윽, <씨앤엘>에서 사주했다고 다 불어 버리면…….”

“증거가 있을까요?”

“증거라니, 그런 건 얼마든지 있잖아!”

“당사와 계약서를 쓰신 것도 아니잖아요.”

“뭐, 뭐라고……?”

비서가 책을 읽듯 반듯하게 말을 이었다.

“지존 헌터는 당사와 무관한 인물입니다. 다만, 헌터업계를 선도하는 당사 입장에서 그토록 악랄한 헌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미처 인지하지 못한 점 송구스럽습니다. 향후 헌터업계의 발전을 위해 인재 영입에 더욱 신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라고 하면 끝날 일이랍니다.”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겠다는 양, 비서가 불쑥 말했다.

“지존 헌터 가족들은 다 일반인이더군요.”

“…….”

“걱정이 많이 되시겠어요. 균열이다 몬스터다 뭐다, 위험한 세상이잖아요.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힉.”

툭. 결국 지존은 손에서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걱정 마세요. 대표님은 아직 지존 헌터를 믿고 계세요. 다음에는 잘하실 수 있을 거예요.”

차갑게, 비서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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