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 * *
“할머니, 정신이 드세요?”
“으…….”
김덕이 할머니가 눈을 뜬 것은 새벽녘이었다.
기유현이 포션을 갖고 있어 복부의 상처를 바로 치료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 뒤 병원에 입원해 나머지 상처를 치료받았다.
나이 드신 분인 데다 베인 곳이 좋지 않아 조금만 늦었으면 위험했을 거라고 의사가 말했다.
“선생님, 그런데 할머니께서 왜 깨어나질 못하시죠? 설마 무슨…… 다른 이상이라도 있는 건가요?”
외상을 전부 치료했는데도 할머니는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피로한 인상의 의사가 차트를 뒤적이면서 한 설명도 그다지 안심되지는 않았다.
“나이 드신 분이라…… 몸에 충격이 많이 갔어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병원으로 옮기기 전 곧장 경찰에 신고했지만, 할머니를 찌른 괴한도 방화범도 붙잡을 수 없었다.
나는 공방 입구에서 마주친 남자를 떠올렸다. 모자를 푹 눌러 쓴 데다 이상하게 서두르던 발걸음이 기억에 남았다. 역시 그자가 범인이 분명했다.
‘어디서 본 것 같았는데…….’
모자에 얼굴이 가려졌지만, 체형이나 턱선이 어딘가 익숙했다.
조금 더 유심히 봤다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할머니만 남겨 두고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그대로 병실을 지키기로 했다.
기유현 역시 병실에 남았다.
아, 그러고 보니 정신이 없는 통에 고맙단 말도 못했네. 그가 제때 오지 않았다면 정말로 위험했을 테다.
“유현 씨 덕분에 살았어요. 고마워요.”
“리을 씨.”
“네?”
옆에 서 있던 그가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렸다.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도 뒤로.
계속 두 걸음의 틈을 벌리고 뒤로 물러나자, 기유현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그게, 그냥…….”
이상하게 보인다는 건 알지만, 차마 그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볼 수 없었다.
아직 저 반짝거리는 얼굴에 면역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불타는 공방 입구로 뛰어 들어올 때는 거의 구세주처럼 보였으니까.
윽, 눈이 부시다.
“그러니까……. 아무튼, 말씀하세요.”
“……하아.”
기유현은 내게 다가서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내 손을 가리켰다.
“치료를 받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
나는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할머니를 데리고 탈출하려다 다쳤는지 상처가 나 있었다. 조금 쓰리지만 심하지는 않다.
“이 정도는 이따가 약 바르면 괜찮아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기유현이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미안합니다.”
“네? 뭐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내게 사과할 일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기유현은 무척 괴로운 표정이었다.
“내가 안일했어요. 리을 씨를 혼자 가게 해선 안 됐었는데……. 아직 시간이 남았다는 생각에 방심했어요. 얼마든지 미래는 바뀔 수 있는 건데.”
무슨 말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나를 혼자 위험에 처하게 해서 미안하다는 뜻인가.
하지만 오늘 김덕이 할머니의 공방에 방화범이 나타날 거라고 기유현이 어떻게 예상한단 말인가. 그래, 회귀자인 나도 알지 못한 일인데 말이다.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보던 기유현이 인벤토리에서 병을 하나 꺼내 안에 든 것을 내 손에 뿌렸다.
“으앗, 차가워……. 어?”
“놀라지 마세요. 포션입니다.”
투명한 액체가 손바닥에 뿌려지는 순간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손바닥은 금방 생채기 하나 없는 상태로 돌아왔다. 그뿐만 아니라, 어쩐지 기운이 나고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알림이 울렸다.
[고급 포션(★★★★☆)의 효과로 스테이터스가 최대치로 회복되었습니다.]
이름만 봐도 고작 손바닥의 긁힌 상처에 쓰기에는 퍽 비싸 보였다.
“……고마워요.”
머쓱하게 인사를 한 뒤.
다시 침묵이 자리했다.
잠시 경찰이 오기는 했으나 사건이 <던전관리청>으로 이관된다는 말만 하고 돌아갔다. 할머니를 찌른 범인이 헌터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좋으신 분을 죽이려고 하다니…….
반드시 붙잡아 감옥에 처넣어야 했다. 나는 속으로 분을 삼켰다.
기유현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낀 것이 틀림없다.
“범인…… 잡히겠죠?”
“잡힐 겁니다.”
불안을 머금은 물음에 단호하게 대답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다가 난 문득 기유현이 쓴 스킬에 대해 떠올렸다.
기유현의 그 스킬이 아니었다면 정말 위험한 순간이었다. 방화범이 휘발유를 뿌린 통에 불이 너무 빨리 번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스킬은 정말 신비했다. 섬세한 빛의 입자가 촘촘한 그물이 되어 주위를 뒤덮자마자 공기의 질감이 달라졌다.
마법 스킬인가? 아니, 그렇다기엔 좀 더…….
“유현 씨, 아까 그 스킬 말인데요…….”
대체 무슨 스킬이냐고 물어보려던 순간.
그때, 할머니가 깨어났다며 간호사가 우리를 불렀다.
나는 하려던 말을 잊고 후다닥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할머니, 몸은 어떠세요?”
잠시 눈만 깜빡거리던 할머니가 이윽고 입술을 열었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된 일이지?”
“오늘 제가 공방에 갔더니 쓰러져 계셔서, 병원으로 모셨어요.”
“공방……. 아!”
할머니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다친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눈에는 형형한 불꽃이 튀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리신 모양이다.
“더 누워 계세요. 아직 더 쉬셔야 한대요.”
“공방은 어떻게 됐지?”
“그건……. 불이 났지만 지금은 진화되었……. 할머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할머니는 침대에서 일어나 병실을 빠져나갔다.
어찌나 빠른지 막아설 틈도 없었다.
“잠깐만요, 할머니, 같이 가요!”
기유현과 나는 황급히 뒤를 쫓았다.
* * *
어슴푸레 동쪽 하늘이 밝아 오는 시각.
공방의 입구에 도착한 할머니가 털썩 주저앉았다.
“아, 이럴 수가……!”
공방 건물은 엉망진창이었고, 수많은 아이템은 부서지거나 타 버렸다. 새까만 그을음이 이곳을 덮친 불이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지 알려 주었다.
슬퍼하는 할머니에게 가만히 기유현이 다가갔다.
“죄송합니다. 불은 껐지만 공방은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되었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도 없었을 거네.”
“범인으로 짐작 가는 자는 있으십니까?”
“범인……. 글쎄, 그자는……. 아, 설마!”
다시 벌떡 몸을 일으킨 할머니가 불탄 공방 안쪽을 향하더니, 그을음으로 새까매진 문을 열고 옆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불의 흔적은 없었지만 누가 침입했는지 안은 엉망이었다.
선반이 쓰러지면서 물건이 바닥으로 쏟아져 있었다. 할머니는 그 중 깨진 유리병을 집어 들고는 탄식을 내뱉었다.
“이럴 수가…….”
깨진 유리병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할머니, 왜 그러세요?”
“이건 내가 보관하던 암흑 에테르를 담은 병일세.”
“네?”
다른 유리병도 마찬가지였다. 바닥을 살폈지만 전부 멀쩡한 것은 없었다.
“이제 남은 암흑 에테르가 없네. 새로 구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어. ……미안하네.”
무거운 목소리였다.
“…….”
첫눈이 내리는 날, 최이찬을 죽일 던전이 발생한다.
지금부터 암흑 에테르를 구하려 노력한다고 해도, 시간에 맞추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랬다가는 또 과거처럼…….
눈앞이 깜깜해졌다.
한숨을 내쉬면서 바닥을 짚는데, 문득 이공간에서 찾은 손거울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아직 돌려드리지 못했구나.
깨진 건 아쉽지만, 이거라도 받으면 기운을 차리지 않으실까.
나는 인벤토리를 뒤져 손거울을 꺼내 할머니에게 내밀었다.
“할머니가 말씀하신 거울 찾았어요. 죄송해요. 깨져 버렸지만, 이거라도 받아 주세요.”
“……깨졌다고?”
“네, 손을 댔더니 금이 갔어요.”
“……!”
할머니가 놀란 표정으로 손거울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깨진 자국을 찬찬히 살폈다.
“이 거울은 니토크리스의 거울이라는 아티팩트를 본떠 만든 걸세. 효능이 다하지 않는 한, 사람의 힘으로는 깰 수 없는 물건이지.”
“……네?”
그냥 깨지던데……? 정말 살짝, 톡 건드린 순간 금이 갔는데.
설마 나한테도 숨겨진 힘이 있는 건가? 진정한 힘숨찐은 바로 나?
허황된 생각에 빠져 있던 와중.
“가만, 이게 깨졌다는 건……!”
그때, 뭔가를 떠올린 할머니가 거울의 깨진 조각을 뒤집었다.
주르륵.
거울의 뒷면에서 부정형의 검은 덩어리가 나왔다.
이게 대체 뭐지.
덩어리는 딱 새끼손톱만 한 크기였는데, 질감이 끈적한 액체 같기도 했고 기체 같기도 했다. 병에 담으니 깜빡깜빡 묘한 빛을 발했다.
신기한 마음에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할머니가 말했다.
“이건 암흑 에테르라네.”
이게 바로 그 암흑 에테르구나.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라 그런지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깨져서 차라리 잘되었군. 거울을 가공하는 데 소량의 암흑 에테르가 들어가거든. 적은 양이지만, 이걸 재가공하면 아이템 하나는 만들 수 있을 것 같군.”
“네? 하지만……. 이건 할머니가 찾으시던 거울이잖아요.”
“괜찮네. 어차피 효용을 다 한 물건이니. 리을 양에게 도움이 되는 쪽이 의미 있을 걸세.”
벌떡.
그렇게 말한 할머니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엉망진창이 된 공방에서 아이템 제작 도구를 찾기 시작했다. 아까와 달리 할머니의 얼굴에는 생기가 넘쳤다.
“잠시만 기다리게.”
일단 병원으로 돌아가자고 말했지만 전혀 듣지 않으셨다. 어쩔 수 없이 작업에 열중한 할머니를 두고 공방 앞마당으로 나왔다.
한 시간쯤 흘렀을까.
“이걸 받게.”
문을 열고 나온 할머니가 내게 어떤 물건을 건넸다.
그건 깨진 손거울을 재가공해서 만든 펜던트였다.
가는 체인 끝에 자그마한 물방울 모양의 돌이 달려 있었다. 검은 돌 안에서 묘한 빛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곧 아이템의 스테이터스 창이 떴다.
[블랙 펜던트(★★☆☆☆)
흔한 디자인이지만 우정의 증표로 사용된다.
종류: 액세서리
비고: 암흑 에테르 속성 부여됨]
특별한 효과는 없지만, 확실하게 ‘암흑’이라고 적혀 있었다.
“……감사합니다!”
드디어 찾았다.
이것만 있으면…….
“친구를 구하는 데 필요하다고 그랬었지.”
“네.”
할머니가 엷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도움이 되길 바라겠네.”
이곳에 없는 사람을 떠올리는 듯한 그 웃음은 어쩐지 애틋하게 보였다.
* * *
펜던트를 손에 넣은 다음 날.
“하아…….”
“리을아, 이렇게 다는 건 어때?”
“수평이 맞나? 음, 좀 비뚤어진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하면 이쪽이 기울어졌네. 다시 맞춰 볼게.”
최이찬은 벽에 가게 간판을 대어 보고 있었다.
나는 양손으로도 들기 힘든 무게였는데, 최이찬은 한 손으로도 가뿐하게 들었다. 이리저리 살피며 신중하게 수평을 맞춘다.
“이러면 잘 맞지? ……어, 표정이 왜 그래?”
“응? 아, 아니야. 아무것도.”
최이찬이 걱정스레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이찬아, 그 간판 어때? 괜찮아 보여?”
“어? 응! 엄청 멋지고 세련됐다.”
“……그래?”
“나는 이런 건 잘 모르지만……. 진짜 예뻐!”
활짝 웃는 표정에 거짓은 없다. 최이찬의 긍정적인 반응에 살짝 귀가 솔깃했지만.
“지렁이 그림 맞지? 독특하다.”
“…….”
“어, 아니야? 그럼…… 뱀인가?”
“…….”
‘미음아, 이 간판 못 바꿔?’
내 속삭임에 미음이가 뻐기는 투로 대답했다.
“이야옹(낙장불입이다! 그러게 내 이름을 넣었어야지)!”
‘미음이는 어려운 말도 다 아네.’
“왜옹(에헴)!”
“하아…….”
이 볕 좋은 날, 내가 지렁이인지 뱀인지 모를 간판을 보고 한숨을 쉬게 된 원인은 어제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