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진정하자. 아직 실망하긴 이르니까.
어쩌면 스킬에 숨겨진 효과 따위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희망을 품고 스킬을 사용해 보았다.
‘바닥이 반짝반짝.’
샤샤샥.
가벼운 손짓만으로도 바닥의 먼지가 쓸려 나갔다. 채 몇 분이 지나기 전에 바닥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해졌다. 매끈한 바닥에 멍한 내 얼굴이 비쳐 보였다.
“……왜오옭?!”
너무 깨끗한 나머지 바닥을 밟은 미음이가 미끄러질 정도였다.
편리하긴 편리한데. 보통 헌터 스킬이라고 하면 좀 더 멋진 걸 떠올리지 않나.
“하아…….”
간판과 스킬 창을 살피다 보니 어느덧 정오가 되었고, 최이찬이 가게에 왔다.
오늘, 나는 최이찬을 가게로 불렀다. 적당한 핑계를 대고 펜던트를 그에게 선물하기 위해서였다.
“권리, 안녕!”
최이찬은 오늘도 가벼운 운동복 차림이었다. 안으로 들어온 그가 반짝반짝한 바닥을 보고 놀랐다.
“어, 여긴 정말 깨끗하다.”
“고마워……. 아, 뭐 좀 마실래?”
“좋지. 그럼 전에 그거.”
“알았어.”
그런데 아이스크림 커피를 연거푸 두 잔 마신 최이찬이 구석에 처박아 둔 간판을 발견했다.
“어! 이거 가게 간판이야? 내가 달아 줄까?”
“아니야, 괜찮아. 안 그래도 돼.”
한 점 거짓 없는 진심 100%의 거절이었다. 그러나 최이찬은 이를 사양으로 받아들였다.
“에이, 무거워서 그래? 걱정하지 마. 그래도 내가 각성자인데 이 정도쯤 아무것도 아니야! 나만 믿어.”
“아니, 진짜 괜찮은데…….”
“저쪽에 달면 잘 보이겠다. 그치?”
“어, 으응…….”
“기다려 봐. 금방 달아 줄게.”
결국 최이찬은 창고에서 못과 망치를 찾아오더니 곧장 적당한 위치에 간판을 달기 시작했다.
하긴 최이찬은 회귀 전에도 원래 이랬다. 남 도와주기를 좋아하고, 한번 해 주기로 한 일은 귀찮은 내색도 없이 끝까지 해치웠다. 회귀 전과 똑같은 최이찬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그래도 이제 펜던트가 있으니까, 회귀 전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최이찬이 간판을 다는 동안 나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한 방에 카페인 중독이 되는 메뉴 만들기였다.
‘커피 한 잔의 인연.’
지난번에 확인한 최이찬의 스킬 리스트 중 내 시선을 끈 것이 하나 있었다.
[커피는 나의 힘(S) /미습득/
(Lv.1) 카페인 중독 상태일 때 공격력이 800% 상승한다.
※ 아직 습득하지 않은 스킬입니다.
습득 방법: 카페인 중독 상태에서 공격을 시도한다.]
효과가 꽤 좋다. 공격력을 800%나 올려주니, 얻을 수만 있으면 도움이 될 테다.
문제는 카페인 중독에 걸려야 한다는 건데.
이제까지의 경험에 따르면 커피를 네 잔은 마셔야 카페인 중독에 걸렸다.
그렇다고 던전에 들어가서 급박한 상황에 커피를 네 잔이나 마시기는 힘들겠지.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 몬스터가 공격이라도 하면 어떡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한 방에 카페인 중독이 되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이렇게…… 하면 되나?”
“뭘 하는 거냐?!”
“뀨우?”
에스프레소 머신의 세팅을 조절하자 옆에서 미음이와 라임이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리스트레토를 추출하려고.”
“그게 뭐냐!”
호기심을 보이는 동물들을 떼어 놓고, 그라인더 세팅까지 조절한 뒤 스킬을 사용했다.
‘바리스타의 추출.’
곧 머신에서 짙은 리스트레토가 추출되기 시작했다.
“……됐다.”
약 15㎖의 더 진하고 묵직한 커피가 만들어졌다. 에스프레소의 절반 용량으로 뽑아 낸 만큼 더 농축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같은 과정을 몇 번 더 반복해서 잔에 리스트레토 네 샷을 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 추출된 커피에 다시 ‘바리스타의 추출’을 사용했다. 리스트레토를 다시 한번 농축하기 위해서였다.
주르륵, 검고 끈적한 액체가 잔 안으로 떨어졌다. 스킬의 효과로 용량이 더욱 줄어들어 잔의 절반밖에 차지 않았다.
원액이 전부 잔에 담기는 순간, 새로운 스테이터스 창이 나타났다.
[아이템: 진한 커피 원액(★☆☆☆☆)
매우 농축된 커피 원액입니다.
너무 진한 탓에 섭취 시 한 방에 카페인 중독에 걸립니다.
섭취에 주의하세요.]
성공했다!
성공하기는 했는데……. 단 커피만 좋아하는 최이찬이 이걸 먹는 게 가능할까?
잔에 담긴 원액에서는 아주 진하고 쓴 냄새가 났다. 나는 스푼 끝을 살짝만 담근 뒤 맛을 보았는데, 그것만으로도 강렬한 맛이 입 안에서 휘몰아쳤다.
“미음아, 라임아, 이거 잠깐 봐.”
“뭐냐, 내 도움이 필요한 거냐!”
“뀨우……?”
나는 동물들에게 원액이 담긴 잔을 내밀었다.
살짝 냄새를 맡은 미음이가 털을 쭈뼛 세우더니 앞발을 마구 날렸다.
“키야옭! 그게 뭐냐, 나를 죽이려는 생각이냐!”
“뀨우우웃!”
라임이는 냄새가 고약한지 아예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았다.
이래서는 안 된다. 아무리 스킬을 얻기 위해서라지만 맛없는 걸 먹이고 싶지는 않았다. 최이찬이라면 입에 대자마자 뱉어 낼 테고. 무슨 방법을 찾아야겠다.
“그걸 써야겠어.”
나는 먼저 잔뜩 만들어 둔 설탕을 꺼냈다.
다음으로 필요한 재료가 하나 더 있었다.
‘차원의 상점.’
[차원의 상점
어서 오세요! 이곳은 다차원의 틈새를 잇는 상점.
적격자님이 필요하신 아이템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아이템 갱신 시각: 12:00:00 남음]
나는 시스템 창을 열어 차원의 상점을 불러냈다.
차원의 상점은 24시간에 한 번, 자정에 품목이 갱신되었는데, 그 전에 갱신하기 위해서는 루비를 내야 했다.
리스트 중에 내가 원하는 아이템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갱신을 하지 않고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찾았다.”
루비를 지불하고 아이템을 받아들자 옆에서 미음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걸 어디 쓰려고 사는 거냐!”
“후후, 두고 봐. 이것만 있으면 되니까.”
“종이처럼 생겼다, 야옹!”
내가 산 아이템은 바로 젤라틴이었다. 나는 이 젤라틴을 이용해 커피 젤리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원액보다는 젤리가 맛있고 먹기도 편할 테니까.
만드는 과정도 쉽고 간단했다. 나는 먼저 그릇에 찬물을 담은 뒤 젤라틴을 넣어 잠시 불렸다.
젤라틴이 불기를 기다리는 동안, 커피 원액에 설탕을 섞었다.
“음……. 조금만 더 넣을까?”
설탕을 아끼지 않고 팍팍 떠 넣었다. 워낙 원액의 맛이 강해서, 조금만 넣어서는 설탕의 맛이 묻히기 때문이었다. 단맛은 맛의 척도니까.
숟가락으로 꼼꼼하게 휘저어, 서걱서걱한 소리가 나지 않을 때까지 설탕을 녹였다.
“독약을 만들려는 거냐!”
“뀨우……?”
옆에서 미음이와 라임이가 불신의 시선을 보냈지만 무시했다.
“나를 믿어 보라니까?”
마침 젤라틴이 물에 불어 적당하게 말랑해졌다. 나는 커피 원액이 든 그릇에 젤라틴을 섞었다.
마지막으로 적당한 크기의 유리컵에 액체를 옮겨 담았다. 이제 이 유리컵을 냉장고에 넣어 굳히기만 하면 완성이다.
“권리, 뭐 하는 중이야?”
커피 젤리를 냉장고에 넣는데, 마침 최이찬이 돌아왔다.
“신메뉴를 만들고 있었어.”
“정말? 나도 먹어 보고 싶다.”
“응, 완성되려면 아직 더 기다려야 하지만……. 이따가 먹게 해 줄게.”
이따가, 던전이 터진 다음에 말이다.
“간판 다 달았어. 어디 삐뚤어진 데 없는지 한번 볼래?”
“어, 으응…….”
붉은 벽돌 벽에 커다랗게 간판이 달렸다. 최이찬이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1㎜도 비뚤어진 데가 없이 반듯했다.
다행한 점은 달아 놓고 보니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것이었다.
심플하면서도 화려하고, 익숙하면서도 유니크한, 고전적이면서 모던한 터치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자꾸 간판에 눈길이 갔고, 가게에 들어가고 싶다는 충동이 느껴졌다.
설마 이게 바로 손님의 눈길을 끄는 간판의 효과인가.
그래, 룩이냐 성능이냐 하면 역시 성능을 택하는 것이 K-게이머의 소양이다. 나는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마쳤다.
뭐, 모처럼 최이찬이 달아 주었기도 하고.
“이찬아, 보답이라기엔 그렇지만……. 줄 게 있어.”
“응? 아니, 아니야! 이런 거 하나도 안 힘든걸! 다른 도와줄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해. 보답은 무슨.”
“이거 받아.”
나는 펜던트를 최이찬에게 건넸다.
다른 물건도 아니고 펜던트를 선물로 건네기에는 퍽 어색한 상황이었다. 그것도 새끼손톱만 한 검은 돌이 달린 것이 전부인 단순한 디자인은 얼핏 수상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스킬을 얻으려면 꼭 24시간 이상 이 펜던트를 착용해야 했다. 최이찬이 의문을 느끼면 뭐라고 설명할지 고민하는 와중이었다.
“…….”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가 펜던트를 받아들었다. 뺨이 약간 붉다. 그는 수줍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
그제야 나는 갑자기 액세서리를 선물하는 것이 의미심장하게 비춰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이찬을 살리는 방법에만 골몰하느라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았다.
더군다나 단순한 디자인이란 반대로 말하면 선물하기 좋은 무난한 디자인.
아니, 아니, 아니. 최이찬이랑 무슨! 학생 시절 자습 땡땡이칠 때 서로 망보기나 해 주던 사이인데!
최이찬도 같은 생각일 게 틀림없었다. 나는 허둥지둥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그, 이상한 뜻 있는 건 아니고! 어쩌다 생겼는데 너한테 잘 어울릴 거 같아서! 그러니까 일종의 재회 기념 선물, 그런 거?”
설명하면 할수록 망한 느낌이다…….
“알아. 다른 뜻 없는 거.”
최이찬이 펜던트를 바로 목에 걸었다.
“고마워. 마음에 든다.”
“잘 어울린다. 꼭 몸에서 떼 놓지 말고, 하루 이상은 하고 있으면 좋겠다.”
“그래, 그럴게.”
이유도 묻지 않고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내 친구지만 이렇게 착해서 어떡한담. 어디 가서 기를 맑게 해 주는 가짜 수정 목걸이 따위를 강매당하는 건 아니겠지.
잠시 그런 걱정이 들기는 했지만, 새까만 돌이 그의 목에서 대롱거리는 것을 보니 겨우 안심이 되었다.
* * *
커피 젤리가 굳기를 기다리는 동안, 최이찬은 가게 안에서 동물들을 데리고 놀았다. 심심해하던 미음이와 라임이는 새로이 놀아 주는 사람을 아주 반겼다.
문제는 최이찬의 체력이 나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데 있었다.
“자, 이거 잡아 봐. 자.”
최이찬이 던전 사탕수수의 줄기를 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이파리가 눈앞에서 팔랑거렸지만, 이미 지쳐 버린 미음이는 앞발을 제대로 들지도 못했다.
“왜옭, 왜우웅(이제 더는 무리다)…….”
“뀨우우…….”
“왜오오옭(이 인간, 어떻게 이렇게 지치지도 않는 거냐)!”
애처로운 울음과 함께 미음이와 라임이가 완전히 바닥에 뻗어 버렸다. 그제야 겨우 이들을 놔준 최이찬이 불쑥 말했다.
“리을아, 너 이 슬라임 어디서 데려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