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192)

45화

“이건 뭐예요? 어……. 컵?”

봉투 안에는 일회용 종이컵과 플라스틱 컵이 가득 들어 있었다. 어림잡아도 각각 500개씩은 되어 보였다.

그런데 보통 컵이 아니었다. 컵의 중앙에 찍힌 ‘카페 리을’이라는 이름에 눈에 들어왔다.

“곧 카페를 오픈한다고 했지. 테이크아웃용 컵이 필요할 것 같아서 만들어 봤네.”

“감사합니다! 할머니!”

하긴 모든 손님이 카페 내에서 마시고 가는 건 아니지.

테이크아웃 손님 생각을 못 했는데,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아이템: 커스텀 테이크아웃용 컵(★★☆☆☆) x 1000

종류: 일회용 컵

비고: 음료의 상태를 보존합니다. (2:00:00)]

그뿐만 아니라 좋은 효과까지 붙어 있었다.

스킬로 만든 음료의 보존 시간은 30분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컵에 담으면 더 오랜 시간 동안 음료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부족하면 언제든지 말하게. 더 만들어 줄 테니.”

“아하하……. 그때는 부탁드릴게요.”

뜨거운 음료용이 500개, 차가운 음료용이 500개. 다해서 1000개나 된다.

그리고 적막한 여기는 대던전 《어비스》의 앞.

이 많은 컵을 다 쓸 날이 오긴 할까…….

음…… 한 3년쯤 뒤?

“멋진 곳이군.”

“하하……. 감사합니다.”

카페를 한 바퀴 둘러본 할머니가 가볍게 감탄했다.

사실 지금 가게 안은 상당히 혼잡한 상태였다. 한쪽에선 로스터에서 커피를 로스팅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선 던전 사탕수수의 수액을 굳히는 중이었다.

방금 밥을 다 먹은 미음이와 라임이가 우다다 바닥을 뛰어다니기까지 했다. 내 참, 뛰지 말고 놀라니깐.

“뀨웃, 뀨우웃!”

“왜오오옹!”

타다다닷. 통, 통, 통.

…….

민망해진 나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아! 내 정신 좀 봐. 커피도 아직 안 내왔네요. 할머니, 어떤 게 좋으세요?”

“음, 그러면 달고 시원한 걸로 부탁하지.”

“네!”

달고 시원한 거라. 나는 레시피 리스트를 보며 잠시 고민했다. 아이스크림 커피가 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새로운 메뉴를 만들어 보는 게 좋겠지.

그래, 정했다. 확인해 보니 마침 재료도 다 있고.

나는 아이스 캐러멜마키아토를 만들기로 했다.

차가운 음료도 뜨거운 음료와 만드는 방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캐러멜시럽과 얼음, 차가운 우유를 넣은 뒤 따로 우유 거품을 내서 잔 위에 올려 준다.

그리고 에스프레소를 붓고 캐러멜 드리즐을 뿌리면 된다.

나는 완성된 음료를 할머니에게 건넸다.

“할머니, 여기, 아이스 캐러멜마키아토예요.”

“고맙네. ……아.”

유리잔을 받아들다 말고 할머니가 창밖을 보았다.

“왜 그러세요? 거기 뭐가 있는…… 아.”

아침에는 분명 맑던 하늘이 어느새 잿빛이었다. 그리고 하늘에서 하나, 둘 눈송이가 떨어지더니 이윽고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벌써…… 첫눈이 내린다고?

아직 10월 말밖에 되지 않았다. 첫눈이 내릴 때까지는 좀 더 시간이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이른 눈에 당황해서 하늘을 보는데, 핸드폰이 크게 진동했다.

불길한 알림이었다.

* * *

기유현은 좁은 골목길을 거침없이 나아갔다.

“잠깐만, 같이 가요, 길드장님!”

“밖에서 길드장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셨잖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시간이 없다. 주신우, 주신희 쌍둥이는 이미 저만치 멀어진 기유현의 뒤를 후다닥 빠르게 쫓았다.

주변은 평범한 빌라촌이었다. 지하철역에서 멀리 떨어졌지만, 그만큼 집세가 싸서 주로 학생이나 젊은 직장인들이 자취하는 동네.

비슷비슷하게 생긴 빌라가 이어지는 길, 기유현은 망설임 없이 다리를 움직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이윽고 한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

곧장 기유현을 따라온 쌍둥이가 입을 열었다.

“여기에 그 용의자가 있습니까?”

“할머니를 죽이려 하다니 나쁜 놈이에요!”

“하지만, 단순 살인미수범이면 <던전관리청>에서 수사할 텐데요. 길드장…… 아니, 헌터님이 직접 찾으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멍청아! 길드장…… 아니, 헌터님이 그 나쁜 놈을 직접 족치시려는 거잖아!”

“너야말로 멍청한 거 아냐? 길드장…… 아니, 헌터님이 너처럼 아무 생각도 없는 줄 알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조용히.”

기유현의 말에 쌍둥이가 헙, 하고 입을 다물었다.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며 눈치를 본다.

인기척이 없는 빌라의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서 기유현은 생각에 잠겼다.

장인 김덕이가 습격당한 사건은 회귀 전에도 똑같이 일어났다.

다만 시기가 달랐다. 1회차의 사건은 몇 개월이나 뒤, 그 때문에 그만 방심했다.

과거로 거슬러 오기까지 했으면서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기유현은 손바닥에 화상을 입은 채 아무렇지 않다며 웃어 보이던 권리을의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이 공방으로 그녀를 안내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그러니 그 상처는 자신의 책임이다.

그런 후회 속에 현장을 살피다 흉기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평범한 칼이 아니었다. 등급은 낮지만 아껴서 사용했는지 제법 길이 잘 든, 헌터 전용의 검이었다. 검의 손잡이에는 음각으로 이름이 새겨졌다. 마치 찾아달라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멍청한 범인이라고 해도 자기 이름이 쓰인 흉기를 현장에 버리고 갈 정도로 생각이 없지는 않을 테다. 누군가가 일부러 두고 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더군다나 흉기에 묻어 있던 독특한 에테르가 마음에 걸렸다.

짙고 검은…… 불쾌한 에테르.

이와 같은 냄새를 어디서 맡은 적이 있다. 미량이었지만 그의 예민한 감각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검의 주인은 이미 무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목적하는 곳은 제일 꼭대기 층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동시에 문 너머의 에테르 흐름을 읽어 들였다. 그러나 안에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기유현은 지체 없이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군요.”

“이건…… 방어구 같습니다.”

주신희가 지저분한 바닥에서 옷을 집어 들었다. 공작새가 연상되는 화려한 디자인이었다.

“……한발 늦었군.”

“도망친 걸까요?”

“곧 수배가 내려질 테니까, 도주한 것으로 보입니다.”

생활 집기며 잡동사니로 방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사건을 일으킨 뒤 급히 집을 떠난 것으로 보였다.

혹은 그렇게 보이도록 꾸몄거나.

역시 그 수밖에 없나. 인과율이니 뭐니 귀찮게 떠들어 대서 그다지 사용하고 싶진 않지만.

기유현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좁은 방을 둘러보았다.

“물러나 있어.”

“……!”

쌍둥이가 긴장된 표정으로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들이 충분히 거리를 벌린 것을 확인한 뒤, 스킬을 사용했다.

스킬명, 백광의 권능.

기유현을 랭킹 1위의 자리에 올려놓은 고유 스킬이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스킬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저 공간을 다룬다는 사실 정도만 알려졌을 뿐.

길드에 들어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쌍둥이로서는 실제로 보는 것조차 처음이었다.

[□□□ □□의 가호가 적용됩니다.]

[스킬: 백광의 권능(S)이 발동됩니다.

[※ 주의: 지나친 개입은 인과율의 저항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음 순간, 공기의 질량이 변한다. 분명 같은 공간인데도 아까와 달리 공기가 묵직했다. 쌍둥이는 어떤 투명한 막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것 같다고 느꼈다.

미세한 빛의 입자가 방 전체를 감쌌고, 곧 확장된 감각이 정보를 읽어 들이기 시작했다.

찾는 것은 하나. 현장에서 발견한 검에 묻어 있던 에테르다.

[일치하는 정보를 찾았습니다.]

기유현은 방의 한쪽 구석, 눈에 띄지 않게 버려져 있던 물건을 집어 들었다.

검에 다는 자그마한 장식용 펜던트였다. 중심에 새겨진 또렷한 별 모양을 확인하는 순간, 기유현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길드장님?”

아무리 긴 시간이 흘렀다고 한들, 그가 이것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별의 지혜 교단>의 문장이다.

적이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선명한 증거.

모서리가 살갗을 파고들어 아픈 것도 잊고 장식을 꽉 움켜쥐는 순간.

“……어!”

주신우가 빌라의 창밖을 보더니 놀란 소리를 냈다.

“왜 그러지? ……아.”

눈이 내렸다.

내도록 맑던 하늘은 어느새 흐렸고, 굵은 눈송이가 떨어졌다.

“별일입니다. 벌써 첫눈이 오다니. 좀 빠른 편이군요.”

“으아, 길에 차 막히겠어요.”

지이잉. 갑자기 핸드폰이 진동했다.

[안전 안내 문자 <던전관리청>

오늘 13시 17분 수원시 권선구 F급 균열 발생

인근 주민께서는 속히 대피하시기 바라며, 양방향 교통 통제 중이오니 우회도로 이용 바랍니다.]

일순 감돌았던 긴장은 곧 잦아들었다. F급 균열이 발생하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으며, 위험도도 낮다. <던전관리청>의 대응 팀만으로 충분히 피해자 구제와 던전 안정화 작업이 가능할 테다.

그러나 연이어 온 다음 메시지를 보는 순간 모두 얼어붙었다.

[안전 안내 문자 <던전관리청>

수원시 권선구 균열 등급 A급으로 격상. 암흑 속성 변이 던전으로 추정

위기경보 “심각” 상향 발령.

해당 지역 봉쇄 예정 속히 대피 바람]

“어, 어, 어떡해야 하죠.”

“A급 속성 변이라니 이런 건…… 처음 봅니다.”

“거기다 암흑 속성. 위치도 너무 안 좋아요. 사람들이…… 어, 어쩌죠.”

“주신우 헌터, 주신희 헌터.”

창백하게 질려 당황하던 쌍둥이가 기유현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검은 눈은 차갑게 가라앉았고, 표정에는 일말의 당혹도 없었다.

동경하던 길드장이 이토록 침착한데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쌍둥이의 귓불이 붉어졌다.

“하아, 한가하게 범인 찾기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군. 곧장 길드로 돌아가자.”

“네!”

빌라를 떠나기 전, 기유현은 다시 한번 별 모양 장식을 세게 움켜쥐었다.

심장이 어지러이 뛰었다.

* * *

나는 끊임없이 진동하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손끝이 덜덜 떨리는 통에 핸드폰 잠금을 해제하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몇 번이나 손이 미끄러진 뒤에야 겨우 문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안전 안내 문자 <던전관리청>

수원시 권선구 A급 던전 충격파 발생. 해당 지역 봉쇄 진행 중. 속히 대피 바람]

짧은 시간 동안 쏟아진 여러 개의 문자가 모두 위기 상황을 알렸다.

곧장 최이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나 받지 않는다.

이날이 올 줄 알았고 몇 번이나 이 순간을 상상했지만, 떨림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가만…… 지금이 몇 시지? 어제 최이찬에게 펜던트를 건넸을 때가 몇 시였더라?

스킬 ‘어둠을 비추는 빛’의 습득 조건은 24시간 동안 아이템을 소지하는 것이다. 시간이 아슬아슬하다. 아직 24시간이 지나지 않았다면 스킬을 얻지 못했을 텐데.

던전 안은 일분일초가 급하게 상황이 바뀐다.

만약 스킬을 얻는 것이 늦어 또 회귀 전과 같은 일이 일어나면…….

“리을 양, 괜찮은가?”

“…….”

“리을 양!”

할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겨우 덜덜 떨리는 고개를 들었다.

쑤욱, 무언가가 입에 들어왔다. 무심코 받아 들고 보니, 아이스 캐러멜마키아토의 빨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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