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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51/192)

51화

“……여긴 어디지.”

앞은 뱀덩굴나무, 뒤는 사람도 충분히 삼킬 크기의 끈끈이주걱.

나는 길을 잃었다.

나가는 길을 찾으려 이리저리 헤매길 몇십 분.

“또 실패했나…….”

지척에서 우울한 중얼거림이 들렸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대체 어디서 들리는 소리지? 나는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행이다. 이대로 꼼짝없이 온실에 갇힌 줄 알았는데, 사람을 찾아서 나가는 길을 물어보면 되겠다.

한탄하는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하아……. 이번에도 실패…….”

울음기 있는 목소리가 꼭 귀신이 말하는 것처럼 음침했다.

“대체 어떡해야 하지? 내 힘으로는…… 역부족인가…….”

커다란 끈끈이주걱을 끼고 돌자 목소리의 주인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왜 항상 이 모양이지…….”

어느 남자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자그마한 화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분의 꽃은 시든 상태였다. 잎은 노랗고 줄기는 꺾여, 잘못 건드렸다간 그대로 꽃잎이 떨어질 것 같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굉장히 말을 걸기 힘든 분위기다. 살짝 물러서려 했지만.

바스락.

“……!”

내 발소리에 놀란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하얀 뺨이 점점 붉게 달아오르더니, 당황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 여,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아무도 들어오지 말란 말은 못 들었나?”

“못 들었는데?”

나랑 비슷한 나이 같은데 초면에 왜 반말이지. 자연히 나도 말이 짧아졌다.

“……! 저기, 들어오지 말라고 적혀 있잖아.”

“없는데?”

“뭐? 눈깔에 문제 있냐? 여기 분명히 출입 금지라고 적어 뒀잖아! 엥?”

남자가 가리킨 곳에는 하얀 종이가 한 장 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안 쓰인 하얀 종이.

남자가 그 종이를 떼서 확인했다. 뒷면에 ‘출입 금지’라고 쓰여 있다.

……뒤집어서 붙였군. 그러니 당연히 안 보이지.

당황한 남자가 부루퉁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크흠! 아무튼 나는 지금 바쁘니까, 저리 가.”

“좀 물어볼 게 있는데……. 아.”

어른스러운 척 머리를 넘겨 이마를 드러냈지만 아직 어린 티가 나는 뺨, 쌍꺼풀이 없는 눈에 살짝 위로 치솟은 눈매가 익숙하다. 어디서 본 얼굴 같더라니, 나는 곧장 이 남자가 누구인지 기억해 냈다.

랭킹 2위의 헌터 최세드릭이다.

빅3 길드 중 하나인 <씨앤엘 코퍼레이션>의 간판급 헌터에 S급 검사.

거의 잠수 상태인 랭킹 1위와 반대로 워낙 온갖 미디어에 많이 나오는 터라 낯이 익은 것도 당연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모습은…….

“지금 힐러가 힐 타이밍이 늦었잖아. 우리 검사가 직접 몬스터 잡는 동안 뒤에서 힐밖에 안 하는 헌터들이 힐도 제대로 못 하면 어떡함?”

“아, 몇 번 말해요. 힐이 밀렸다니까요? 뭐? 내가 힐 범위를 벗어났다고? 힐러가 알아서 쫓아와야 할 거 아니에요? 어차피 다 우리 길드 덕분에 돈 받는 거잖아.”

인성 논란이었다…….

편집도 안 되는 생방송에서 대형 폭탄을 터뜨린 바람에 한동안 시끌시끌했었다. 힐러 전문 길드 ‘축복의 정원’이 최세드릭을 보이콧하겠다며 들고 일어났다.

결국 최세드릭이 공개 사과하는 걸로 일단락되긴 했는데, 그 사과문이 성의가 없다며 또 논란이었지.

즉, 실력과 유명세만큼이나 인성 논란도 널리 알려진 화제의 랭커.

그런 유명 헌터를 여기서 보게 되다니 세상 참 좁구나.

그렇게 잠시 추억에 잠겨 있는데.

“아, 그래, 그래. 알겠어.”

“뭘?”

최세드릭이 갑자기 ‘출입 금지’ 종이를 뜯어서 뒷면에 뭐라 끼적거리더니 내밀었다.

“자! 내 사인! 사인도 해 줬으니까 이제 가.”

“아니, 필요 없는데.”

딱히 팬도 아닌데 헌터 사인 받아다 얻다 쓰겠는가. 그것도 테이프 자국이 남아 있는 이면지에 한 사인.

그러나 그는 내 말을 다른 뜻으로 해석한 듯했다.

“뭐? 같이 사진도 찍고 싶어? 음…… 그래, 원래는 안 되는데, 오늘은 기분이다. 이거 받고 빨리 가. 나도 사생활이 있는 몸이라고.”

찰칵.

내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내 핸드폰을 낚아채 셀카를 찍더니 보정까지 꼼꼼하게 한 다음 돌려주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여기서 나가는 길을 물어보려고 했는데.”

“……!”

최세드릭의 뺨이 서서히 붉게 달아올랐다.

“야! 그, 그, 그런 얘기는 처음에 했어야 할 거 아냐! 나, 나, 나는 또 여기까지 찾아온 팬인 줄 알았잖아!”

나는 얘기하려고 했다. 자기가 멋대로 떠들어 댄 거지.

“그런데 그 꽃은 뭐야?”

나는 화분의 다 시들어가는 꽃을 가리켰다.

“……그냥 꽃이야. 이제 가. 저쪽으로 가면 출구니까.”

그런 것 치고는 아까 우울한 표정으로 들여다보던데.

“내 힘으로는 역부족이니 어쩌니 했잖아.”

아무래도 최세드릭은 금방 얼굴이 빨개지는 체질인가 보다.

“너, 너어, 너는! 사람이 혼잣말하는 걸 몰래 듣기나 하고!”

“몰래 들은 게 아니라 내가 지나가는 길 앞에서 네가 멋대로 떠든 거거든.”

“……!”

“아무튼, 이 꽃이 뭔데?”

사람 머리통처럼 생긴 꽃과 뱀이 달린 덩굴, 사람도 잡아먹을 크기의 끈끈이주걱이 가득한 온실에서 이 꽃은 그저 시들시들할 뿐 제법 평범하게 생겼다.

하지만 은은한 푸른빛이 감도는 꽃잎이 어쩐지 신경 쓰였다.

“관심 꺼! 아주 귀한 꽃이니까. 아무나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그런 것 치곤 다 죽어 가고 있는데…….

꽃에 대해 더 물어보려는 순간이었다.

“손님! 어디 계세요? 묘목 준비 다 됐어요. 설마 던전 끈끈이주걱 가까이 다가가신 건 아니죠? 손님! 던전 끈끈이주걱이 아주 귀엽긴 하지만 만지면 잡아먹힐 수도 있어요!”

“이쪽이에요!”

이초록이 나를 발견하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다가 최세드릭을 보고 깜짝 놀랐다.

“헉, 하아, 손님 여기 계셨군요! 여기, 구매하신 정화목 묘목……. 헉, 최세드릭 헌터는 여기 왜……. 설마 손님에게 무슨 일 하신 건 아니죠?!”

“뭐? 너 나를 어떻게 보는 거냐.”

“전에는 저를 막 이렇게, 죽인다고 하셨잖아요.”

“…….”

내 시선 속에 섞인 무언의 경멸을 눈치챘는지, 최세드릭이 급히 덧붙였다.

“그건……! 네가 이 꽃을 살리기 힘들다고 하니까……!”

“아무튼 그러시면 안 돼요. 몇 달 만에 처음 오신 손님인데.”

여기 괜찮은 걸까…….

지이잉.

그때, 최세드릭의 핸드폰이 길게 진동했다.

“……! 나 간다.”

이초록에게 뭐라 말하려던 최세드릭은 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그대로 온실 밖으로 나갔다. 무슨 급한 연락이라도 온 모양이다.

“저 사람은 여기 왜 온 거예요?”

“설마, 헉, 손님, 무슨 일 있으셨나요? 저 헌터가 성질이 좀 더럽고, 성질이 더럽고, 성질이 아주 더럽긴 한데, 나쁜 사람은 아니……. 아닌 거 같기도, 아니라고 하지 못할 것도 아니…… 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이초록은 좋지 않은 기억이라도 떠올렸는지 얼굴이 창백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데……. 이 꽃은 뭔가요?”

“아, 이걸 보고 있었군요. 이건 푸른 세라에노꽃이라는 꽃이에요.”

이름을 듣자마자 눈앞에 상태 창이 떴다.

[아이템: 푸른 세라에노꽃(★★★★★)

종류: 꽃

세라에노의 별빛을 함유했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꽃.

비고: 시들었음]

5성이라고……?

평범하게 생긴 꽃의 등급이 5성인 것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이 화분은 최세드릭 헌터가 제게 맡긴 것이에요.”

이초록의 말에 따르면 이랬다.

푸른 세라에노꽃은 아주 희귀할 뿐만 아니라 무척 꽃을 피우기 어렵다.

어느 날, 최세드릭 헌터가 이 꽃의 씨앗을 가져오더니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꽃을 피워 달라고 했다.

이초록은 식물학자의 자존심을 걸고 이 일을 받아들였다. ……라기 보다는, 최세드릭이 제시한 돈은 거절할 수 없을 만큼 큰 금액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흙의 에테르 함유량을 아주 섬세하게 조절해야 하거든요. 벌써 몇 달째 시도하고 있는데, 생기가 돌지 않네요.”

“그렇게 희귀한 꽃이라니, 무슨 고급 아이템 재료라도 되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닌데요…….”

이초록이 말끝을 흐렸다. 이 말을 해도 되는지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그러다가 조심스럽게 뒷말을 덧붙였다.

“최세드릭 헌터의 동생이 희귀병이거든요. 체내 에테르의 흐름이 뒤엉키는 병이라 아주 고통스럽고…… 현재는 치료법이 없어요. 하지만 유일하게 이 꽃, 푸른 세라에노꽃이 고통을 덜어 준다고 해요.”

“아…….”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혹시 무슨 정보가 있을까 에테르-위키에 꽃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자격을 확인 중입니다. ……완료.]

[적격자: 권리을 확인되었……]

‘건너뛰기.’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

그럼 그렇지. 꼭 필요할 때는 도움이 안 되는군.

그런 사정이 있다니, 무슨 방법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 * *

농원을 나온 최세드릭이 곧장 향한 곳은 바로 <씨앤엘 코퍼레이션>의 본사, 즉 그의 소속 길드였다.

“헌터님, 신분 확인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꺼져!”

최세드릭은 보안 요원의 제지를 무시하고 그대로 입구를 통과했다. 삐비빗, 하는 경고음이 울렸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보안 요원은 당황했지만 그를 붙잡거나 하지 않았다. 기실 얼굴만 보아도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이곳에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욱하는 표정으로 보안 경고 알림을 해제할 따름이다.

서두르는 걸음에 여유는 없다. 곧장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에 내렸다.

극히 일부의 사람만 접근할 수 있는 최상층은 삭막한 분위기였다.

장식이라곤 없는 하얀 벽의 특정 위치에 손을 접촉하면 비밀 문이 나타난다. 헌터 라이센스 확인을 하면 문이 열리고, 연결 복도를 지난 다음 같은 과정을 반복해야 숨겨진 구역에 들어갈 수 있다.

문을 통과하는 순간 약 냄새가 났다. 소독약 냄새 그리고 고통과 죽음의 냄새다.

최세드릭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가장 안쪽의 문을 열어젖혔다.

“……로나야!”

문 너머는 병실처럼 꾸며진 방이었다. 침대 위에는 마르고 작은 소녀가 잠들어 있었다.

아니, 그것을 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소녀의 잠은 휴식과 편안함이 아니라 고통과 두려움이다. 열에 들뜨고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면서도 그저 정신만이 피안에 갇혀 깨어나지 못한다.

소녀의 이름은 최로나.

3년 전 희귀병에 걸려 눈을 뜨지 못하게 된, 최세드릭의 하나뿐인 여동생이다.

그리고 지금 소녀는 발작을 일으킨 상태였다.

“으……. 헉, 허억……. 으, 으아아악! 악! 헉, 흐억!”

비명이 병실 안을 가득 메웠다. 최세드릭은 얼른 침대 곁으로 달려갔다.

“로나야! 오빠 왔어. 많이 힘들지. 로나야…….”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소녀는 계속 고통에 찬 신음을 토해 낼 뿐이었다.

최세드릭은 옆에 대기 중이던 힐러를 돌아보았다.

“치료는 왜 안 해?”

“저…… 그것이…….”

서슬 퍼런 물음에 힐러가 말끝을 흐렸다.

“아시다시피 힐링 스킬을 써도, 그게…… 차도가 없습니다.”

사실이었다.

병실에 있는 힐러 두 명은 <백은 길드>의 권지운을 제외하면 국내에서 가장 우수한 힐러였다. 상위 힐러를 독점한다는 비난을 감수하고 엄청난 금액을 내고 고용했다.

그러나 아무리 힐링 스킬을 퍼부어도 최로나의 고통을 덜어 주기란 불가능했다. 이 희귀병은 모든 스킬과 포션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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