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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52/192)

52화

목이 타는 듯했다. 최세드릭은 울컥 분노를 토해냈다.

“그럼 로나가 이렇게 아픈데 손가락만 빨고 있다는 거야?”

“아, 아니요! 그럴 리가요. 계속해서 힐링 스킬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럼 지금은?”

“저, 마력이 고갈되어서 더 이상은 쓸 수가…….”

최세드릭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힐러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뭐? 마력이 떨어져? 다시 한번 말해 봐.”

“으…… 으윽.”

그대로 힐러의 몸을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한 손으로 머리통을 붙잡고 바닥에 처박았다.

특별한 스킬을 쓰지 않았는데도 S급 헌터의 압도적인 스테이터스는 그 자체로 힐러에게 압박을 가하기 충분했다.

퍽! 몸이 낙엽처럼 쓰러졌다.

아픔에 버둥거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최세드릭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윽……. 으, 으아악!”

목이 손바닥 안에 꽉 들어찬다. 그가 자신의 명줄을 쥐고 있음을 뒤늦게 알아차린 힐러가 사시나무처럼 덜덜 몸을 떨었다.

“‘마력이 떨어져서 스킬을 못 쓴다’라. 그럼 여기 남아 있을 이유가 없겠네?”

스릉.

최세드릭이 검을 뽑았다. 그 은빛 검날을 보는 순간 힐러는 새하얗게 굳어 버렸다. 벤다. 이 남자는 정말로 자신을 벨 생각이다.

“아…… 아닙니다. 쓸 수…… 쓰, 쓰겠…….”

“뭐라 지껄이는 거야?”

다시 일으켜 세웠을 때 힐러의 얼굴은 피와 눈물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손으로 뺨을 툭 쳤지만 극도로 긴장한 탓에 거의 실신해 버렸다.

이래선 쓸 수가 없다. 휙. 최세드릭은 힐러를 내던졌다. 대신 구석에서 덜덜 떨고 있던 또 다른 힐러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힉!”

“못하나?”

“헉, 허억, 쓰, 쓰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바짝 긴장한 힐러가 최로나를 향해 손을 뻗고 스킬을 시전했다. 이미 마력이 바닥까지 소진된 통에 현기증이 났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스킬을 쓰지 않았다간 바닥에 쓰러진 힐러와 같은 꼴이 될 뿐이다.

“으……. 흑, 으아, 으아악!”

손끝에서 생겨난 하얀 빛이 공중을 유영했다.

하지만 치유의 빛은 마치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최로나에게 흡수되지 못하고 소멸했다.

“큭, 쿨럭……. 쿨럭!”

“계속해.”

다시 한번 더. 또 한 번 더…….

한계에 달한 힐러가 피를 토해 낼 때까지 스킬을 퍼부었지만 변화는 없다. 최로나는 여전히 고통스러워 보였다.

최세드릭은 가만히 그 모습을 보았다.

‘쓸모없는 것들.’

던전에서 전투 중 상처를 입고 힐링 스킬로 치료받을 때면 항상 생각했다. 쓸모없는 것들이라고.

아무리 심한 상처를 입어도 힐링 스킬을 받으면 금방 나았다.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이 베인 상처가 아물고 새살이 들어차는 모습을 볼 때마다 최세드릭은 자신이 역겹게 느껴져서 견딜 수 없었다.

이런 아무것도 아닌 상처 대신 동생의 병을 치료하고 싶었다.

그러나 가장 낫게 하고 싶은 사람만은 구할 수가 없다.

‘그 꽃만 있으면…….’

푸른 세라에노꽃. 동생의 병에 듣는 유일한 약이었다.

그 꽃만 살릴 수 있다면 적어도…… 로나의 저 아픔을 걷어 내 줄 수는 있을 텐데.

너는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꿈속에서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는 나를 원망하기도 할까.

울지는 않았다. 최세드릭은 마른 눈으로 동생의 가냘픈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최로나의 발작이 멈췄다. 여전히 눈꺼풀은 굳게 닫힌 채지만 비명과 경련은 잦아들었다.

식은땀에 축축하게 젖은 이마를 닦아 주고 병실을 나오니 어느덧 한밤중이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닫는데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또 한바탕했다며?”

“……대표님.”

<씨앤엘 코퍼레이션>의 대표, 이세인이었다.

“화풀이를 한 것 정도로 질책할 생각은 없지만. 오늘은 좀 떠들썩했구나.”

“죄송해요…….”

최세드릭은 이세인 앞에서 가시가 빠진 것처럼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 모습을 보는 이세인의 입가에 쓴웃음이 묻어났다.

“로나는 좀 어때?”

“이제 좀 나아졌어요.”

“미안해. 또 발작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와 보려 했는데, 회의가 이제 끝나서.”

“괜찮아요. 대신 다음에 한번 로나를 보러 와 주시면…….”

그때 옆에서 비서가 이세인을 불렀다.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러우면서도 분명한 목소리가 대화를 끊는다. 계산된 듯한 부드러운 침범이었다.

“대표님,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그래? 이만 가 봐야겠네. 세드릭, 미안.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자.”

“……네.”

주저 없이 이세인이 돌아섰다.

그 뒤를 따르기 전, 비서의 시선이 잠시 최세드릭의 낯에 머물렀다. 이어 흐릿한 웃음이 입가에만 머물렀다가 거품처럼 녹아 없어졌다.

최세드릭은 가만히 멀어지는 등을 바라보았다.

이름이 이온이라고 했던가.

성별도 연령도 분명하지 않은 묘한 낯, 그 얼굴을 장식하는 눈은 마치 유리 안구를 박아 넣은 듯 무감정하다.

저 비서가 이세인에게 한 조언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원래 최세드릭은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이었다.

그러나 S급 헌터가 된 후로는 남들 앞에서 부러 오만하게 굴어야 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최강에 걸맞은 S급의 모습이니까.

유약한 모습은 물어뜯기 좋은 약점이 될 뿐. 차라리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편이 나았다.

아픈 최로나의 존재를 세상으로부터 감추기로 한 것도 그래서였다. 랭커에게 신파는 어울리지 않는다. 슬픈 사연 따위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실제로 최세드릭은 유명해졌고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동생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비밀 병실에서 홀로 아파하고, 자신은 타인 앞에서 슬픔을 드러낼 수조차 없다.

이게 정말 맞는 걸까.

홀로 던진 물음에 대한 답은 알 수 없다. 속이 시끄러운 밤이었다.

* * *

오늘 무슨 날인가.

그러니까, 유명인을 만나는 날 말이다.

“아!”

농원에서의 한 차례 소동이 끝난 뒤 난 묘목과 잡다한 사은품 묶음을 들고 농원을 나왔다. 지하철로 던전 게이트에서 가장 가까운 역에서 내린 뒤 걷는데 갑자기 누가 놀란 소리를 냈다.

앞에는 대충 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있었다.

“너 왜 거기서 그러고 있는……. 아!”

똑같이 생긴 소년도 나타났다.

혹시 나를 아나? 하지만 이런 어린애들을 만난 기억은 없는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던 쌍둥이가 당황하더니 고개를 숙였다.

“으앗! 죄송합니다. 놀라게 해 드렸군요.”

“죄송해요!”

“아니, 그건 괜찮은데……. 어디서 만난 적 있니?”

“저희 길드장…… 아, 아니요, 아는 사람이랑 헷갈렸어요.”

“헉, 야, 주신우! 우리 길…… 아니, 헌터님 어디 갔지?”

“설마 놓친 건가?!”

“……저쪽이다!”

후다닥. 쌍둥이가 횡단보도 건너편을 향해 달려갔다. 어찌나 빠른지 붙잡을 새도 없었다.

‘이 멍청아, 내가 잘 보고 있으랬잖아!’ 하는 소리만 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요란한 아이들이군.

정말 다른 사람과 헷갈려서 말을 건 건가? 그런 것치곤 목소리가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았는데…….

음, 모르겠다. 얼른 돌아가기나 하자고 다시 걸음을 옮기는 찰나였다.

주황빛 가로등 불빛 아래로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나는 무심코 그림자의 시작점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가 깜짝 놀랐다.

“……거기서 뭐 해요?”

그림자의 주인은 기유현이었다.

선명한 주황빛 아래에서 기유현이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하하……. 오랜만입니다.”

반대편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담벼락의 사각지대, 화려한 얼굴을 가리는 안경(참고로 전혀 가려지지 않았다), 검은 코트.

어째 이 상황 기시감이 드는데…….

전에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던가? 하고 기억을 더듬는데, 아까 만났던 쌍둥이가 다시 돌아왔다.

기유현이 가로등 불빛을 피해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유현 씨?”

그러나 쌍둥이 쪽이 빨랐다. 후다닥 달려오더니 기유현을 앞뒤로 둘러싸고 말했다.

“길…… 아니, 기유현 헌터님, 여기 계셨군요!”

“이제 안 놓칩니다! 얌전히 길드로 돌아가시죠.”

설마 기유현 이 사람, 이런 귀여운 어린애들을 떼어 놓고 땡땡이를 치려 한 건가?

“…….”

“리을 씨, 어쩐지 시선이 따갑게 느껴지는데 기분 탓이죠?”

“기분 탓 아니에요.”

“…….”

그때 쌍둥이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아까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길…… 아니, 기유현 헌터님을 찾는 중이었어서.”

“실례했어요!”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점퍼 차림.

곱슬머리를 길게 기른 여자애 쪽은 상대적으로 의젓해 보이고, 커트머리인 남자애 쪽은 더 활달한 분위기였다. 정말 귀엽다.

이어 자기소개를 한다.

“저는 <청라 길드> 소속 주신희라고 합니다.”

“주신우예요!”

“난 권리을이라고 해. 잘 부탁……. 어?”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닌데…….”

<청라 길드>의 남녀 쌍둥이 헌터?

기억났다. 회귀 전에 영상으로 본 적이 있었다.

각성하자마자 <청라>의 메인 파티 ‘푸른 덩굴’에 발탁된 유망주.

누나 쪽, 주신희. 궁사. 특기는 상대의 심장을 노리는 얼음 송곳.

동생 쪽, 주신우. 마법사. 특기는 상대를 갉아먹는 저주.

그들의 유능함보다 인상에 강렬하게 남은 부분은 표정이었다.

으레 어린애에게 기대하기 마련인 천진함이나 활기를 모두 지워 낸, 창백한 인형 같던 얼굴. 눈동자에 서린 냉혹함. 뺨에 묻은 피를 닦아 내는 동작은 잔인하게도 보였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그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활달하고 붙임성 좋은 소년 소녀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바로 알아보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도무지 기억 속 흉흉한 모습과 연결 지을 수 없었다.

이렇게 귀여운 애들이 그렇게 변한다고? 3년이란 생각보다 긴 시간이구나…….

“그거 무거워 보이는군요.”

쌍둥이의 미래 모습을 떠올리고 충격받은 내게 기유현이 불쑥 말을 걸었다.

“아뇨, 이거 안 무거워요.”

정화목 묘목은 두 뼘 정도 길이라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만큼 가벼웠다. 그리고 이초록이 떠넘긴 잡다한 물건이 든 봉투가 하나.

“혼자 들기에는 짐이 많네요.”

“네? 안 많은데요?”

애초에 무거웠으면 인벤토리에 넣어서 옮겼을 테다. 단지 이빨이 달린 당근 따위를 인벤토리에 넣고 싶지 않아서 들고 걸을 따름이다.

그러나 기유현은 꿋꿋했다.

“가게로 가시는 길이죠? 무거우실 테니 들어 드리겠습니다.”

내 말을 전혀 듣지 않은 기유현이 내 손에서 묘목과 봉투를 뺏어 들었다. 이 사람이 진짜.

정확히 무슨 사정인진 몰라도 쌍둥이는 기유현을 쫓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 핑계를 대고 여기서 빠져나가려는 거……?

“그럼, 리을 씨를 도와줘야 해서 나는 이만 가 볼게.”

“앗, 길…… 기유현 헌터님!”

재빨리 기유현을 붙잡으려는 주신희를 주신우가 다시 끌어당겼다. 그러더니 구석에서 머리를 맞대고 속닥거렸다.

참고로 속닥거림치고는 소리가 커서 반쯤은 다 들렸다.

‘멍청아! 부길드장님이 말씀하신 거 까먹었어?’

‘뭐래, 멍청아!’

‘왜, 기유현 헌터님이 요즘…….’

‘아, 아……!’

“……?”

쌍둥이가 흘긋 나를 보았다. 시선이 아주 열렬하다.

‘그럼 저분이 바로 그……!’

‘그래, 이제 상황을 알겠냐, 멍청아!’

‘누구더러 멍청이래, 이 멍청이가! 그럼 어, 어떡하지. 언니라고 불러야 하나?’

‘아니지. 아직 그렇게 부르긴 일러. 그러니까 우리가 잘 ……해야 한다고. 알겠어?’

‘주신우 웬일로 쓸 만한 말을 하네.’

‘이 정도쯤이야.’

끄덕끄덕. 뭔지 몰라도 둘이서 극적인 합의를 이끌어 낸 듯, 쌍둥이가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한껏 의젓한 태도로 인사했다.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군요. 저희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꾸벅. 그리고 미련 없이 돌아서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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