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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53/192)

53화

하지만 이대로 보내기에는 하나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다.

“밤인데 애들만 보내도 돼요? 여기서 가게 가까우니까, 같이 데리고 가요.”

기유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들은 어리지만 헌터입니다. 밤길 정도야.”

“아니요. 헌터지만 애들이에요.”

회귀 전에 본 쌍둥이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세상에 환멸을 느끼기라도 하는 듯 생기라고는 없는 눈이라니.

그렇게 변하도록 둘 순 없다. 아직 남아 있는 저 활달함과 동심을 지켜 주고 싶었다.

자고로 애들이란 학교 마치고 저녁 5시에 아동용 애니메이션을 보고 저녁 반찬을 궁금해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법이다.

길드 소속의 헌터가 된 이상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애들은 애들이다.

“기유현 헌터님의 말이 맞습니다.”

“저희끼리 갈 수 있어요.”

“그래? 아쉽네. 들렀다 가면 따뜻한 바닐라라테를 만들어 주려고 했는데.”

“……바닐라라테요?”

쌍둥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먹고 싶은 마음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나 바닐라라테 먹어 본 적 없어. 어리다고 아직 먹으면 안 된다고 했다고.’

‘참아, 이 멍청아! 나도 먹어 본 적 없단 말이야.’

하는 속닥거림이 다 들렸다.

“아, 버터 쿠키도 있어.”

“……!”

욕망과 인내 사이에서 방황하기를 수 초.

“……괜찮습니다.”

“맞아요. 방해 안 해요!”

이런, 인내 쪽이 이겼다.

쌍둥이는 등장했을 때처럼 부산스러운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뭐, 별수 없지. 다음에 보면 꼭 달달한 음료와 간식을 먹여야겠다.

* * *

가게로 돌아가는 길을 기유현과 나란히 걸었다.

점차 건물과 자동차가 줄어드는 던전 게이트 주변. 띄엄띄엄한 가로등 불빛만이 길을 밝혔다. 걸음에 따라 그림자가 길어졌다 짧아졌다 했다.

새삼스럽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다. 서울시 중구 한복판에 이런 적막이라니.

엄밀히 말하면 대던전 《어비스》의 던전게이트는 ‘서울시’가 아니기는 했다. 저 거대한 던전은 주위의 공간을 찢고 왜곡하며 등장했으니까.

그래서 《어비스》 생성 전과 생성 후 서울 지도는 모양이 달라졌다. 시청역과 회현역 사이에 손으로 양끝을 잡아당긴 것처럼 벌어진 공간. 검은 네모박스로 칠해진 곳이 바로 던전게이트3가다.

그래도 서울 안에 있긴 하니 접근성을 노리고 개발이 이뤄질 만도 하건만, 편의점 하나 생기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중심부를 향해 걸을수록 미세하게 공기의 냄새가 달라진다. 발에 밟히는 흙의 색깔도 다르다. 그 안에는 미지의 던전이 자리했다.

저 끝에 무엇이 있는지 밝혀지지 않은 거대한 석벽. 기질이 예민한 사람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낀다나 어쩐다나.

‘그런 것 치곤 나는 별문제 없었지만…….’

잘 자고 잘 먹고 잘 놀았지, 음.

고요가 찾아들자 자연히 옆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신경이 쏠렸다.

“…….”

짐을 멋대로 뺏어 들고 걷는 기유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기유현을 만나는 것도 꽤 오랜만이다. 화재 다음 날 김덕이 할머니 공방 앞에서 헤어진 뒤 처음이네.

얼굴에 비스듬히 내려앉은 그림자에 살짝 시선을 뺏긴 순간.

“리을 씨.”

차분한 부름이 귓가에 닿았다.

“네?”

“아까 한 말 있죠.”

“무슨 말이요?”

“헌터라도 애들이라는 말.”

“……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화사한 얼굴을 조금도 가려 주지 못하는 안경 너머, 빛을 머금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요?”

질문의 답은 금방 나왔다.

“그렇잖아요. 몸이 강해진다고 정신도 강해지는 건 아니니까요.”

대던전이 나타나고 20년. 어린 각성자는 더 이상 특이하거나 희귀한 존재가 아니었다.

각성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우연, 혹은 운명이니까.

균열은 계속해서 발생하고, 세상은 헌터를 원하고 있다. 제때 균열을 처리하지 못하면 죽음과 직면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런 소리는 허황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학교 마치고 어린이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저녁 반찬이나 궁금해할 애들이 몬스터와 맞서야 하는 건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있다. 12살 이하의 각성자는 길드에 소속될 수 없고 <던전관리청>의 보호를 받도록 정해져 있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어떤 아이는 부모에 의해. 어떤 아이는 자신의 의지라고 착각해서. 어떤 아이는 칭찬받고 싶어서 던전에 들어간다.

주신우, 주신희 쌍둥이만 해도 그래.

내 기억이 확실하다면 그들은 올해 14살이다. 아직 어린 나이.

대체 3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성격이 바뀌는 걸까. 혹시 <청라 길드>에서 엄청 혹사시키나? 랭킹 1위 놈 그렇게 안 봤는데 사실 악덕 길드장인가?

만난 적도 없는 랭킹 1위에 대해 속으로 비난을 퍼붓는데, 기유현이 다시 말했다.

“리을 씨는 다르실지도 모르겠지만……. 헌터들은 흔히 인간성이 조금씩 결여된다고 합니다.”

그의 말이 이해되기는 했다. 사람의 정신은 생각보다 신체의 영향을 많이 받으니까. 강력한 힘, 던전 경험, 주위 환경의 변화는 분명 정신에 흠집을 낸다.

가만, 그런데 앞에 말은 뭐지. 지금 나는 F급이니까 모를 거라고 돌려 말한 건가?

기유현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저 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렇게 보이지만 마음 안에 닳아서 무뎌진 부분이 있어요. 그런데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중요한 사실을 확인하기라도 하는 양 신중한 어조. 빛을 머금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왜 이런 걸 물어보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대답은 어차피 하나였다.

“당연히, 그러면 더 잘 대해 줘야죠. 각성했다고 아예 다른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게 어른이 할 일인 걸요.”

안 되겠다. 다음에 그 쌍둥이를 만나면 간식만 먹일 게 아니라, 같이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VOD도 봐야겠다. 한번 틀면 멈출 수 없는 흥미진진한 내용으로 준비해 놔야지.

띠링.

그때, 갑자기 시스템 알림이 울렸다.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서브 퀘스트: 동심여선

어린이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당신. 대상[1]에게 좋은 추억을 선물해 줍시다.

대상에게 간식 먹이기: 0/1

[1] 주신우, 주신희

보상: 없음]

특이하게도 보상이 없는 퀘스트였다.

하긴. 보상을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순수한 호의로 잘해 줄 수 있는 거니까. 3년 뒤 쌍둥이의 멘탈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그걸로 됐다.

언제 다시 쌍둥이와 만나면 클리어하도록 할까. 이 시스템, 매번 성가신 것만 띄워 대더니 가끔은 좋은 일도 하는군.

퀘스트 창을 끄다가, 기유현이 아직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왜 그래요? 혹시 내가 한 말에 감동했어요?”

변명하자면, 어디까지나 농담이었다. 딱히 알맹이 있는 말을 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냥 웃고 넘어가기 위한 가벼운 대화.

그런 내 뜻은 기유현에게 조금도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다. 무슨 기억을 더듬는 듯 잠시간 말이 없더니 입을 연다.

“네, 그런 것 같아요. 아니, 그렇습니다. 감동했어요.”

“…….”

아니, 이 사람이 진짜.

지금 완전 태클 걸 분위기였잖아. 갑자기 진지해지면 어떡한담. 티키타카 몰라?

나는 받아칠 말을 잃고 입만 뻐끔거렸다.

“…….”

“…….”

이 분위기 어떡할 거야.

* * *

다행히 가게까지는 얼마 남지 않은 길이었다. 초겨울 바람이 제법 쌀쌀한 남은 길, 나는 기유현에게 근황 이야기를 하며 걸음을 옮겼다.

근황이라고 해도 별건 없다. 주위의 등쌀을 피해 임시 아르바이트생을 자처한 최이찬 이야기를 할 순 없으니, 남은 건 새로 생긴 단골손님 이야기 정도다.

“……그래서 레몬에이드를 만들 재료를 구하러 다녀오는 길이었어요.”

가게 문 앞에 다다라서 이제 내 짐을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리을 씨, 혹시 그 손님이…… 낚시 조끼를 입은 40대 남자였습니까?”

“아, 네, 그런데요.”

기유현은 가게 맞은편, 덤불 쪽을 보고 있었다.

굳이 마주 보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만 왜 굳이 저쪽을? 뭐가 있나?

“얼굴에 흉터가 있고요?”

“음……. 그러고 보니 흉터가 있었네요…….”

“신메뉴를 맛보여 주기로 한 날은 언제입니까?”

“7일인데요……. 왜 그래요?”

“저도 마침 그날 시간이 날 것 같아서, 꼭 리을 씨의 신메뉴를 마셔 보고 싶군요.”

이상하다. 분명 웃고 있는데 왜 이렇게 서늘하게 느껴진 걸까.

다음 날.

느긋하게 일어나 아침을 먹은 다음, 정화목 묘목을 심을 만한 곳을 찾아 이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이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한 위그드라실 때문에 좁긴 했지만, 잘 찾으면 나무 한 그루 심을 자리는 있겠지.

“아, 여기면 되겠다.”

이공간 안을 살피다 딱 적당한 곳을 발견했다. 던전 사탕수수를 심은 밭 옆, 나무 한 그루를 심으면 딱 좋은 빈 공간이 있었다.

쭈그리고 앉아 모종삽으로 흙을 파낸 다음 묘목을 심었다. 흙을 살살 덮어주면서 옆에서 뒹굴뒹굴하는 미음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있잖아, 헌터가 되면 인간성이 없어지는 경우도 있어?”

내가 물어보려던 것은 어제 기유현이 한 말에 대해서였다.

“헌터들은 흔히 인간성이 조금씩 결여된다고 합니다.”

평소의 헤실헤실하던 모습과는 달리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 정제된 어조가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그러나 미음이는 단호한 말투로 선을 그었다.

“그런 일은 없다!”

“그래?”

“물론 어떤 자는 인격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거나, 밑바닥에 있던 사람이 권력을 쥐었을 때 본성을 드러내는 것에 가깝다.”

“개인의 인성에 따라 다르다는 얘기네?”

“그래. 다만…….”

미음아, 나는 네가 그렇게 말끝을 흐리면 불안해지더라.

“위대한 자와 ‘계약’을 맺었을 때 위대한 자에게 너무 동조하면, 그 영향으로 본래의 자신을 잃는 경우는 있다.”

어, 방금 뭐라고? 갑자기 모르는 단어가 두 개나 나왔다.

“그 위대한 자가 뭔데?”

“키야오옭! 그것도 모르느냐, 상식이다!”

“너랑 나랑 생각하는 상식의 범위가 다른 거 같아.”

“각성자가 그냥 스킬을 쓸 수 있는 줄 아느냐! 모두 위대한 자가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니라! 그중 ‘계약’을 통해 계약자에게 더욱 특별한 힘을 주는 경우가 있다, 왜옹!”

“흐음……. 그러니까, 엄청나게 센 존재가 힘을 준다 이거지? 배후성이나 성좌 같은 거?”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왜옭!”

설명만 들어서는 꽤 좋아 보인다.

“그거 나도 할 수 있어?”

어디까지나 가벼운 호기심으로 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미음이와 라임이가 동시에 조용해졌다.

“…….”

“…….”

“왜 그래……?”

잠깐 정적이 깔리나 싶더니.

“뀨웃! 뀨우우웃!”

라임이가 엄청난 기세로 울기 시작했다.

“어, 응, 뭐라고?”

“뀨우우웃! 뀨웃! 뀨우우!”

갑갑한지 몸까지 통통 튕기며 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뀨우웃’ 외에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미안. 라임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뀨우웃!”

슬라임어 번역기가 있으면 좋겠다…….

* * *

모종삽으로 뿌리 위에 흙을 살살 덮은 다음 페트병에 담아 온 물을 뿌려 주니 정화목 심기는 끝났다.

햇볕이 따뜻하고 바람도 솔솔 불고, 흙은 촉촉하다. 여기서라면 잘 자라겠지.

옆에 공간이 좀 남기에 이빨당근도 옮겨 심었다.

받아 온 걸 계속 갖고 있기도 그렇고. 아니, 갖고 있기 싫고.

‘슈슉, 슉, 슈슉, 슈슈슉, 슉, 슈슈슉.’

엄마, 당근이 이상한 소리 내면서 울어…….

저건 뭐 잘 자라든가 말든가.

곧장 정화목의 상태 창을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한 가지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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