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192)

54화

[아이템: 정화목(★★☆☆☆)

종류: 나무

부정한 것을 정화하는 좋은 나무입니다. 은은한 꽃향기가 납니다.

상태: 어림

열매가 열리기까지 남은 시간: 6개월]

6개월?

뭐, 6개월이라고?

그야 보통 나무에서 열매가 열리기까지 6개월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껏 위그드라실의 가지도 던전 사탕수수도 하루 만에 슥슥 자라더니 왜 이것만 6개월인데!

퀘스트도 퀘스트지만 이대로라면 그 손님에게 신메뉴를 줄 수가 없는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

띠링.

[에테르-위키에 새로운 항목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그때 눈치 빠르게 시스템 알림이 울렸다. 모처럼 힌트를 준다는데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할까.

에테르-위키에 접속해서 ‘최신 업데이트’ 란을 확인하자, 전에 없던 새로운 항목이 하나 나타났다.

《작물의 생장을 촉진하는 방법》

작물을 더 빨리 자라게 하고 싶은 당신. 빠른 스피드로 진행되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하는 K-게이머인 당신. 글자란 글자는 몽땅 스킵해야 직성이 풀리는 당신.

[더 보기]

뭐지, 백과사전의 설명에서 뒤끝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아무튼 침착하게 [더 보기]를 눌러 보았다.

안녕하세요~ 에테르-위키입니다.

오늘은 작물의 생장을 촉진하는 방법에 대한 정보를 들고 왔는데요.

적격자님에게 꼭 필요한 정보를 전달 드리니, 잊지 말고 꼭 끝까지 읽어 주세요.

열매가 맺히는 데 시간이 걸리는 건 당연하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하지만 하루빨리 퀘스트를 끝내고 싶으시죠?

그래서 오늘은!

작물을 빨리 키우고 싶으신 적격자님을 위해 특별한 비료 만들기를…….

(중략)

이렇게 오늘은 특별한 비료를 만드는 방법을 알아봤는데요~

도움이 되셨다면 에테르-위키에 많은 접속 부탁드립니다. ^^

무슨 바이럴 블로그인가…….

어디서 복사해 온 것처럼 성의 없고 길기만 한 텍스트의 향연에 딱 한 줄 내가 원하는 정보가 적혀 있었다.

다행이다. 이거면 당장 준비할 수 있겠다.

그나저나 아무래도 이 에테르-위키란 것은 내 행동에 따라 정보가 업데이트되는 모양이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알림을 띄워 대는 것을 보면.

처음 접속했을 때 그런 설명이 나왔던 것 같기도 하고…….

이 위키를 통해서 그 푸른 세라에노꽃을 살리는 방법을 알아낼 수는 없을까.

나는 어제 농원에서 만난 최세드릭의 모습을 떠올렸다.

내가 나타나자마자 곧장 아닌 척했지만 우울해 보이던 표정과 시들어 죽기 직전인 꽃.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관계없는 일이긴 한데…….

가족이 아프다고 하니까 신경이 쓰인단 말이지.

지금까지 흐름대로라면 왠지 시스템이 알려줄 법도 한데. 으음, 일단은 할 수 있는 일부터 해치우자.

나는 이공간을 나가 창고에 처박혀 있던 종이 박스를 하나 꺼냈다. 그 사이 내용물이 많이 모여서 박스는 꽤 묵직했다.

“권리, 그건 뭐 하게?”

박스를 안으로 옮기는데 마침 최이찬이 도착했다.

“어? 아, 비료로 쓰려고.”

“그걸?”

에테르-위키에서 알려 준 비료의 재료는 바로, 커피를 내리고 남은 커피찌꺼기였다. 쓰레기봉투가 떨어져서 버리지 않고 모아 두고 있었는데 마침 잘되었다.

“이리 줘. 내가 옮길게.”

최이찬이 상자를 받아 들고는 어디로 가면 되냐고 물었다.

그러나 우리는 곧 한 가지 난관에 부딪쳤다. 벽에 있는 푸른 이공간의 입구가 최이찬에게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오오옭(당연하지, 이게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인 줄 아느냐)!”

“……그런 거였어?”

당연히 아무나 들어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키야오옹(나, 시스템을 집행하는 에이전트의 승인을 받은 자에게만 허락되는 공간이다)!”

“그럼 승인해 줘.”

“왜우웅(그건……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게 아니라)…….”

그럴 줄 알았다. 그럼 그렇지.

“왜오옭(나를 ‘쓸모는 없지만 그래도 정도 들었고 불쌍하니 거둬 주자’라는 눈으로 보지 마라)!”

“아, 들켰다.”

“캬갸갸옭!”

그래서 최이찬에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상자를 받아들려고 했는데.

“미안하다. 나 별로 도움이 안 되네.”

“에이, 말도 안 돼. 얼마나 많이 도와주는데.”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있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어깨를 툭 두드리는데, 최이찬은 기운이 없었다.

“기껏 ……까지 했으니 좀 더 너한테 도움이 될 줄 알았는데.”

한숨에 말이 삼켜졌다.

“무슨 일 있어?”

최이찬은 옆으로 고개를 저었다.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여기서 기다릴게. 다녀 와.”

씩 웃는 표정에 그늘은 없어 보이지만…….

나는 다시금 괜찮으니까 기운 내라고 한 뒤 이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묘목을 심은 주위에 커피찌꺼기를 살살 뿌려 주었다. 흙에서 나온 은은한 빛이 묘목에 흡수되더니 상태창이 업데이트되었다.

[아이템: 정화목(★★☆☆☆)

종류: 나무

부정한 것을 정화하는 힘을 지닌 좋은 나무입니다. 은은한 꽃향기가 납니다.

상태: 자라는 중

열매가 열리기까지 남은 시간: 하루]

됐다, 이거지.

다음날 무사히 레몬…… 아, 아니, 정화목의 열매를 넣을 수 있었다.

노란 빛깔에 한 손에 꽉 차는 크기, 동그란 모양, 새콤한 향기. 아무리 봐도 레몬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대충 짭레몬이라고 부를까.

하룻밤 사이에 나무가 꽤 크게 자라서, 열린 짭레몬을 다 따자 상당한 양이었다.

커다란 그릇에 산더미같이 쌓인 짭레몬. 가게 안이 새콤한 향으로 가득 찼다.

한 손에는 짭레몬, 다른 한 손에는 베이킹 소다를 든 나는 비장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자, 그럼 모두 준비됐지?”

“응, 됐어.”

“냐아(물론이다)!”

“뀨우우!

임시 아르바이트생(특징: S급 헌터)과 전력 외 2마리가 기운차게 대답했다.

잔뜩 딴 짭레몬은 모두 레몬청을 담그기로 했다.

남겨 둬 봤자 상하기만 할 테고.

어차피 레몬에이드를 만들려면 레몬청이 필요하니까, 잔뜩 만들어서 두고두고 먹으면 좋잖아.

그래서 오늘은 다 같이 이 산더미 같은 짭레몬을 처리할 예정이다.

양이 많아 번거로울 뿐 레몬청을 만드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짭레몬을 깨끗하게 세척하는 일이다.

“자, 이렇게 하면 돼.”

나는 베이킹 소다를 푼 물에 짭레몬을 담그고 손으로 뽀득뽀득 소리가 나게 씻었다. 내가 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더니, 최이찬도 짭레몬을 물에 담갔다.

“응, 이렇게…….”

푸직.

힘을 너무 준 탓에 최이찬의 손바닥에서 짭레몬이 찌그러졌다.

“으아아아악!”

그 바람에 짭레몬의 즙이 최이찬의 눈으로 정확하게 날아들었다.

“헉, 이찬아, 괜찮아?”

“윽, 따가워, 흑.”

“자, 물로 씻어. 얼른.”

S급의 튼튼한 몸 덕분에 금방 괜찮아지기는 했지만…….

“자, 다시 해 보자. 손에 힘을 더 빼고 살살 씻으면 돼. 살살.”

“응, 살살…….”

푸직.

“으아아악!”

…….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었고, 양쪽 눈이 전부 새빨개진 다음에야 최이찬이 레몬 씻기를 포기했다.

아직 힘 조절이 제대로 안 되는 모양이다. S급의 삶도 쉽지 않구나.

“하하……. 미안하다.”

시무룩해 보이는 표정에 늘어뜨려진 고개.

나는 그가 또 어제처럼 우울해할까 봐 얼른 등을 밀었다.

“괜찮아, 다른 걸 도와주면 되잖아. 그냥 저기 가서 쉬고 있어, 응?”

그렇게 리타이어한 최이찬을 떠나보낸 다음.

남은 노동력이라고는…….

“왜옭, 왜오옭(냄새가 좋구나)!”

앞발로 짭레몬을 굴리면서 놀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

“뀨우우!”

몸을 막처럼 넓게 퍼뜨려 짭레몬을 삼킨 뒤 우물우물하다가 씨앗만 툭 뱉어 내는 슬라임 한 마리.

그냥 나 혼자 하자…….

이제 F급 카페 주인 한 명과 전력 외 1명과 2마리가 되었다.

이상하다. 분명 적게 일하고 많이 쉬는 삶, 구체적으로는 주2일 일하고 5일 쉬는 삶을 살기로 했는데.

왜 아침부터 대량의 짭레몬을 따서 씻는 신세가 된 걸까.

점점 이 시스템과 퀘스트에 말려드는 기분이 든다.

‘설마 내가 문젠가……?’

베이킹 소다를 탄 물에 꼼꼼하게 짭레몬을 씻은 뒤 물로 한번 헹궈 주면 세척은 끝이었다.

산 레몬이라면 더 씻어야 하지만, 이건 방금 직접 딴 열매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

다음으로는 짭레몬을 편으로 썰어 줄 차례였다.

물기를 닦아 낸 짭레몬의 꼭지는 썰어서 버린 뒤, 0.3㎝ 두께로 얇게 썰었다.

끼어들 틈을 노리던 최이찬이 잽싸게 도와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퍽!

짭레몬을 슬라이스가 아니라 다져 버린 바람에 포기해야 했다.

뭐, 짭레몬이 아니라 몬스터는 잘 썰 수 있을 테니까 된 거 아닐까?

“미안해, 이번에도…….”

“괜찮으니까, 그럼 미음이하고 라임이랑 좀 놀아 줄래?”

짭레몬을 써는 등 뒤로 비지엠이 들려온다.

타다다닷.

“우냐아아!”

“뀨웃! 뀨우웃!”

“아하하, 이 녀석들, 한 번에 한 명씩.”

눈앞의 창 너머로는 대던전 어비스의 거대한 석벽이 보이고, 뒤로는 활기찬 울음소리. 도마 위에서는 통, 통, 통 하는 레몬을 써는 소리.

정말이지 평화롭네…….

아,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덧붙이는데 절대 평화가 싫다는 뜻이 아니다.

잘 먹고 잘 쉬고 잘 놀다가 짭레몬이나 얇게 써는 삶. 그야말로 회귀자에게 어울리는 삶이다. F급 회귀자는 쉬고 싶어.

편으로 썬 짭레몬의 씨를 뺀 다음 커다란 볼에 담았다. 그리고 짭레몬의 무게와 동일한 무게의 설탕을 붓고 잘 버무렸다. 양이 많다 보니 여기까지 끝내는 데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설탕이 녹기를 잠시 기다리던 중 약간 허기가 졌다.

음, 하나만 먹어 볼까.

나는 설탕에 버무린 짭레몬 슬라이스를 하나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

가장 처음 느껴진 것은 짜릿한 신맛이었다. 이어 신맛을 중화해 주는 단맛이 입 안을 채우고, 풍부한 시트러스 향에 머리가 맑아졌다.

이대로 그냥 먹어도 맛있는데, 숙성을 하면 더 맛있겠지.

뜨거운 물에 끓여서 소독한 병을 잘 닦은 다음 설탕에 절인 짭레몬을 채워 넣는 것으로 레몬청 만들기가 끝이 났다.

나는 선반에 가지런히 올려 둔 레몬청 병을 바라보았다. 한낮의 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반짝거리는 병을 보기만 해도 마음이 여유롭다.

음, 평화롭네. 정말.

* * *

단골손님에게 신메뉴를 맛보여 주기로 약속한 그날 저녁, 나는 가게에 혼자 있었다.

방금까지 여기 함께 있던 최이찬이 돌아갔기 때문이다.

“지금 간다고? 어디로 가는데?”

“으하하하하! 아니야, 괜찮아! 잘 데는 있으니까!”

“뭐? 아직 집 구하는 중이라며? 지금 어디서 지내는데?”

“저 대지, 저 바람이 나와 함께하니까! 걱정하지 마.”

“잠깐,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진짜 어디서 지내냐니까? 이찬아?”

“간다, 내일 봐!”

그러나 그는 호쾌한 웃음만 남기고 떠나갔다.

진짜 괜찮은 건가. 어째 요즘 좀 이상한데…….

친구가 헌터 등급이 올라가더니 갑자기 이상해졌는데요, 어떡해야 할까요.

내일 좀 더 자세히 물어보기로 하고, 아무튼.

“어서 오세요.”

“그거, 전에 이야기한 걸 주시오.”

낚시 조끼를 입은 손님은 제 시간에 나타났다. 가타부타 다른 말도 없이 자리에 앉더니 음료를 달라고 말한다.

그렇게 기대를 많이 한 건가? 그러면 기대에 부응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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