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192)

56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이제까지 많이 만나 봤어. 전부 사기꾼이었지. 여기 식물 오타쿠도 못 해낸 걸 네가 어떻게 한다는 거야?”

“그럼 만약 내가 성공하면 어떡할 건데?”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왜, 성공할 수도 있잖아? 내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너는 손해 보는 거 없는데, 시도도 안 해 보게?”

최세드릭이 동요를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희망, 그리고 희망을 품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보다 더 큰 낙담. 그래도, 어쩌면, 혹시,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기대.

그 복잡한 표정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최세드릭이 겪었을 일이 짐작되었다. 그동안 비슷한 일이 여러 번 있었겠지. 기대하고, 실망하고, 다시 기대하고.

이제껏 최세드릭에 대해 널리 알려진 이미지는 이랬다. 오만하고, 건방지고, 인성질이 심한 랭커.

그런데 직접 보니 그보다는 어린애처럼 느껴졌다.

“좋아! 네가 성공하면, 내가 뭐든 해 준다. 돈? 연줄? 뭐든 말만 해.”

“그런 건 됐고. 성공하면 원하는 걸 말할게.”

어쨌건 해 볼 수밖에 없나.

심호흡을 한 뒤, 나는 최세드릭을 돌아보고 말했다.

“저기…… 조금만 뒤로 물러나 줄래?”

“어엉? 왜? 내가 쳐다보면 꽃을 못 살리는 건가? 설마, 몰래 이 꽃을 슬쩍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닌데……. 그게, 유명인이 가까이 있으니까 긴장돼서!”

“내 참, 그런 이유면 빨리 말하지 그랬어? 긴장될 만하지, 암, 이해하고말고! 자, 이 정도면 됐지?”

이게 통하다니.

최세드릭이 다섯 발짝 정도 거리를 벌린 것을 알고 화분에 다가갔다.

원래 푸른색이었을 꽃잎은 누렇게 말라붙었고, 줄기는 당장이라도 꺾일 것 같다.

푸른 세라에노꽃은 재생의 힘을 지닌 꽃.

하지만 이 꽃은 씨앗 상태일 때부터 이미 죽어 있었다. 이초록이 보살핀 덕분에 어떻게 싹을 틔우기는 했지만 시들어 버린 것도 바로 그래서.

그러면 꽃을 재생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재생은 죽음을 전제로 한다. 즉, 완전히 죽어야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거다.

나는 크투가의 반지를 꽃 가까이에 가져다 댔다.

화르르.

반지가 피운 불이 순식간에 꽃을 태웠다.

하얀 재가 화분에 떨어지는 순간.

“무슨 짓이야?!”

“……크헉!”

최세드릭이 달려들더니 내 멱살을 잡아당겼다. 강력한 힘에 발이 바닥에서 들렸다. 숨이 막힌다.

“최, 최세드릭 헌터, 일단 진정하시고 그거 놓고 얘기하세요.”

“지금 내가 진정하게 됐어?!”

분노로 이성을 잃은 눈.

하지만 힘을 조절하고 있다. S급 헌터의 힘 그대로 멱살을 잡혔다간 그대로 저세상으로 갔을 테니까.

“너! 왜 꽃을 태웠어?! 저게 어떤 꽃인 줄 알고! 대답 내용에 따라선 가만두지 않겠어!”

“윽……. 그……. 쿨럭, 쿨럭!”

“대답해!”

엄청난 힘에 숨이 막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손가락 끝만 들어 화분을 가리킨 것이 최선이었다.

“헉! 최세드릭 헌터, 이거 보세요!”

이초록이 화들짝 놀란 소리를 냈다.

“왜? 벌써 꽃은 재가 되어 버렸는데!”

“그게 아니라요! 꽃이!”

“뭐? ……아.”

최세드릭의 눈이 크게 떠지더니.

털썩.

겨우 손에 힘이 풀렸다. 조금만 더 늦었다간 진짜로 산소 부족으로 기절할 뻔했다.

그래서 일부러 좀 떨어지라고 말한 건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캘록, 캘록! 헉, 죽는 줄 알았네! 쿨럭!”

나는 일부러 과장되게 기침을 토해 냈다. 한 번 기침할 때마다 최세드릭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파우더팩트로 따지면 13호쯤 될 것 같다.

“미안, 그게, 나는 네가 꽃을 죽인 줄 알고……. 진짜 미안하다.”

“됐으니까 꽃이나 빨리 살펴 봐.”

“아, 그, 그래!”

하얀 재가 쏟아진 화분 위로 연두색 새싹이 돋았다.

새싹은 순식간에 쑥쑥 자라더니 줄기와 잎을 뻗고 이윽고 푸른색 꽃을 피워 냈다.

은은한 빛을 머금은 푸른 꽃잎은 아주 신비하게 보였다.

[아이템: 푸른 세라에노꽃(★★★★★)

종류: 꽃

세라에노의 별빛을 함유했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꽃. 재생의 힘을 지녔습니다.

비고: 싱싱함]

상태 창의 내용도 바뀌었다.

“드디어, 이 꽃만 있으면……!”

감격한 최세드릭이 화분을 얼싸안으려는 순간.

쿠쿠쿵!

묵직한 진동음이 들리더니, 화분의 흙이 하늘을 향해 치솟기 시작했다.

“어, 어……?”

사정없이 멀리 뻗어나가는 굵은 뿌리.

푸른 세라에노꽃 아래에 다른 식물이 있었다. 꽃의 힘을 흡수한 식물이 마구 자라나면서 온실을 부수고 주위를 뿌리로 감싸기 시작했다.

“으아아, 안 돼, 내 온실이!”

“……피해!”

와장창!

그리고 식물의 뿌리 한가운데서 일렁거리는 저 푸른빛은…….

균열이다.

쿵, 쿠우웅! 가지가 천장을 가르고 뿌리가 땅을 파헤친다.

아. 기억났다.

회귀 전 이초록의 농원이 폐업한 이유.

농원에서 던전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피할 틈도 없었다. 나는 그대로 던전에 빨려 들어갔다.

주르륵!

균열의 틈새로 빨려 들어간 몸이 줄기를 타고 아래로 미끄러졌다. 나는 중심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아야야…….”

주위는 꼭 아주 커다란 나무의 뿌리처럼 어둡고 울퉁불퉁했고, 어디선가 퀴퀴한 풀잎 냄새가 났다.

코를 찌르는 시큼한 냄새, 눅눅한 공기, 그리고 꿈틀거리는 바닥.

이곳은 어느 식물 안에 형성된 던전이었다.

아주 드물게, 풀이나 나무 안에 균열이 숨어 있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보통은 모체가 된 식물이 균열이 터지는 것을 막아서 안전하다.

그런데 만약 그 식물이 짙은 에테르에 노출되면 어떻게 될까. 식물과 균열이 융합되어 식물 자체가 던전이 되어 버린다.

이초록이 기르는 던전 식물 중 하나에 균열이 숨어 있었고, 식물의 생장을 돕기 위해 온실에는 짙은 에테르를 풀어 두었다.

훗날 그 에테르를 흡수하면서 식물이 던전화한다. 그 여파로 <해피 그린 라이프 농원>은 폐업.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회귀 전 폐업의 전말이다.

그 식물 오타쿠 진짜…….

그런데 푸른 세라에노꽃이 지닌 재생의 힘으로 균열이 회귀 전보다 일찍 터졌고, 마침 내가 휘말린 상황.

보통 던전화된 식물은 그렇게까지 위험하지 않다고 한다.

문제는 이 던전의 바탕이 된 식물이 무엇이냐인데…….

띠링.

[던전: 몬스터지옥에 입장했습니다.]

[몬스터지옥은 현재 굶주린 상태입니다.]

알림 창에 던전 이름이 떴다.

어, 몬스터지옥이라고……?

잠깐, 정리해 보자.

소화액을 분비해 파리를 잡아먹는 식충식물을 파리지옥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소화액을 분비해 몬스터를 잡아먹는 식물이 몬스터지옥일 테고.

몬스터도 녹이는 식물이 인간을 녹이지 못할 가능성은……?

…….

치지직!

“으, 으아악!”

앞으로 뻗어 나온 식물의 덩굴이 분비물을 발사했다.

바닥에 쏟아진 분비물이 치익, 소리를 내면서 주변을 녹였다. 맞으면 절대 무사하지 않을 것 같다.

그때 다시 한번 알림이 울렸다.

[몬스터지옥은 현재 굶주린 상태입니다.]

“…….”

“사람 살려!”

꽃을 살려 보려다 깨워선 안 되는 것을 깨우고 말았습니다.

이 거대 식물의 안에서 흔적도 없이 녹아내리는 미래를 상상하며 소름 돋는 그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야.”

“어, 어어, 어?”

“왜 그렇게 귀신 본 표정이야? 사람 간 떨어지게.”

“어…… 최세드릭?”

탁, 하고 공중의 줄기를 붙잡고 바닥에 착지한다. 고꾸라진 나와는 달리 안정적인 착지였다. 10점 만점에 9.5점 정도.

“쳇, 민간인도 같이 들어왔다니 귀찮게 됐네.”

다른 사람은 없다. 다행히 이초록은 같이 휘말리지 않은 모양이군.

“너 쓸 만한 무기나 아이템 가진 거 있냐?”

“으음…… 이거?”

나는 인벤토리에서 공격력 2짜리 모종삽을 꺼내 보여 주었다.

“엥? 진짜? 이게 아이템이야?”

세상에 이런 아이템은 처음 보았다는 표정이다. 모종삽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신기한 듯 감탄한다. 그리고 돌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많이 놀랐겠지만 진정하고 나만 믿어! 으하하!”

비웃을 줄 알았는데.

‘역시…….’

나는 아까부터 느낀 위화감에 확신을 더했다.

랭킹 2위 <씨앤엘 코퍼레이션> 소속 최세드릭 헌터. 그 이름 뒤를 따르던 수많은 인성 논란들이 머리를 스쳤다.

그 인성 논란에 비하면 어째 착한 것 같은데…….

그때.

치지직, 푸직!

“흐아아악!”

다시 쏟아지는 분비물에 깜짝 놀라 뒤로 펄쩍 뛰는 나를 보고 최세드릭이 픽 웃었다.

“왜 갑자기 소리 지르고 난리야? 겁먹었냐?”

“야, 이 풀 쪼가리 물 쏴 대는 거 봐. 저거 맞으면 그대로 녹아서 이 던전의 거름이 될 거라고!”

“아, 저거?”

스르릉.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면서 검을 꺼내 휘두른다.

양옆과 위아래로 정확히 두 번. 거의 최세드릭의 덩치만 한 크기의 검을 파리채라도 되는 듯 가볍게.

콰직!

분비물을 찍 뿜어내던 이파리가 그대로 짓이겨졌다.

“뭘 그런 걸로 쫄고 그러냐.”

착, 제 자리로 돌아온 검을 허리에 찬다.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고 싱긋, 멋들어진 웃음을 짓는다. 마치 지금이 감탄할 타이밍이라는 듯.

이 기시감은 뭐지…….

“와, 대단하다. 멋져.”

“……크흠, 흠!”

그다지 영혼이 담기지 않은 말에도, 최세드릭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번져갔다.

“최세드릭 헌터가 있어서 다행이야. 안심했어.”

“그래, 그래. 나만 믿으라고!”

평소에 칭찬을 많이 못 받았나……. 어깨에 힘을 주고 으쓱대며 걸어간다.

그렇구나. 이 느낌의 정체를 알았다.

얘 약간 우리 집 고양이 닮았다.

‘갑자기 랭킹 2위가 친근하게 느껴지는군.’

아무튼 이 괴상한 식물 던전에 들어와서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곧 침착을 되찾았다.

푸른 세라에노꽃은 이초록이 잘 보호해 주겠지. 이제 여기를 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한국에서 무원 다음으로 유명한 헌터랑 함께 있는데 무서울 이유가 없지.

치지지직!

스륵, 콰아앙!

치직!

분비물을 뿜어내는 이파리와 줄기를 거침없이 베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흐어억! 저기! 뒤에!”

“어디?”

스스슥, 펑!

몬스터지옥의 안에는 기생하는 벌레형 몬스터가 있었다. 하지만 최세드릭의 칼질 한 번에 죽어 거름이 되었다.

고속버스를 탄 기분이 이런 걸까.

길을 무시하고 눈앞의 뿌리와 줄기를 팍팍 잘라 내며 나아간다. 대리 먼치킨 체험이 아주 기가 막혔다. 이래서 무작정 다 때려 부수는 영화가 인기가 있나 보다.

속 시원한 파괴 행렬도 잠시.

그런데 이 몬스터지옥 던전은 생각보다 넓었다. 울퉁불퉁한 뿌리 위를 한참 걸었는데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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