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이곳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한 가지였다. 바로 던전의 보스 몬스터지옥을 죽이는 것.
문제는 이 넓은 던전 안에서 몬스터지옥의 본체를 찾기가 힘들다는 데 있었다.
점점 오르막이 가팔라지는 것으로 보아 이쪽이 맞는 것 같기는 한데, 본체는커녕 소화액을 뿜어 대는 줄기와 벌레만 보일 뿐이었다.
굵은 뿌리를 타고 한참 올라가던 중, 최세드릭이 나를 툭 쳤다.
“야.”
“……왜?”
“여기서 잠깐만 쉬었다 가자.”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마침 한쪽에 벌레도 끈적한 액체도 없는 빈 공간이 있었다.
최세드릭이 무슨 스킬을 쓰자 반투명한 방어막이 주위를 감쌌다. 방어막 안으로 들어가니 습기도 시큼한 냄새도 한결 덜해 숨쉬기 편했다.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인벤토리에서 꺼낸 물티슈로 끈적한 손을 닦아 내니 조금이나마 살 것 같았다. 특유의 눅눅한 공기 때문인지 던전 안을 걷는 일이 생각보다 피로했다.
숨을 돌리고 나니 드는 생각이 있었다.
‘커피 마시고 싶다…….’
지금 딱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만 마시면 소원이 없겠네.
스킬로 만든 아메리카노는 아니라도 카누 하나쯤 넣어 두지 않았을까, 인벤토리를 뒤지면서 최세드릭에게 말을 걸었다.
“밖에는 지금쯤 난리려나. 갑자기 던전이 나타났으니까.”
“…….”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그래도 랭킹 2위랑 같이 들어왔으니까 그렇게 비상사태는 아니겠다. 그 식물 오타쿠 어디서 이런 걸 가져와서.”
“…….”
왜 답이 없지?
인벤토리를 아무리 뒤져도 카누는 없었다.
대신 꺼낸 것이 지난번 퀘스트에서 얻은 황금 뽑기 티켓.
[현재 황금 뽑기 티켓 소지 수: 1]
[손잡이를 당겨 주세요.]
원래 아껴 둘 생각이었지만 지금 돌릴까. 던전 안에서 돌리면 더 좋은 게 나올지도 모르잖아.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뒤, 하지만 설렘을 품고 뽑기를 하려는 찰나였다.
“……저, 저기.”
한참 말이 없던 최세드릭이 나를 불렀다.
“어? 왜?”
“…….”
그러나 이번에도 대답은 없다.
최세드릭은 머리를 흐트러뜨렸다가, 다시 손으로 빗었다가, 한숨을 쉬었다가, 입속으로 뭐라 중얼거리다가 겨우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
“뭐가?”
“아까 며, 멱살 잡은 거 있잖냐.”
흘끔, 내 쪽을 쳐다봤다가 다시 팍 고개를 숙인다. 표정으로 봐서 진짜 미안하기는 한 모양이다.
나는 픽 웃고는 대답했다.
“됐어. 아까도 사과했잖아. 갑자기 꽃을 태웠는데 놀랐겠지.”
“그래, 그 꽃……! 정말 고맙다. 그 꽃을 살려 준 값은 내가 여기만 나가면 꼭 갚을게. 뭐든 말만 해.”
그에게 요구할 대가는 이미 생각해 놓았지만, 호기심에 불쑥 물었다.
“뭐로 줄 수 있는데?”
“돈이라면 얼마든지……! 아니다, 그냥 돈으로 때우는 건 너무 성의 없지.”
두근두근……!
“그래, 우리 길드에 들어오는 건 어때?”
“……뭐?”
최세드릭의 길드라면 <씨앤엘 코퍼레이션>이잖아.
빅3 길드 중에서도 최대 규모, 헌터 길드계의 쓰리스타. 체계적이지만 그만큼 실적 압박 등 빡빡한 분위기로 유명했다.
물론 그런 데에 들어갈 생각은 조금도 없긴 한데. 그 전에 F급을 받아 주나?
나는 최세드릭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살짝 날티 나는 분위기의 얼굴. 그러나 눈만은 진심이었다.
당연히 자기네 길드가 최고고, 그러니 내가 길드에 들어가고 싶어 하리라 믿는 듯했다.
“나 F급인데?”
얘 이상한 데서 편견이 없네.
“등급이 무슨 상관이야? 식물 오타쿠도 못 해낸 푸른 세라에노꽃을 살려냈잖아. 식물 오타쿠보다 대단하니까…… 그래, 식물 십타쿠님!”
“…….”
저 그런 사람 아닌데요…….
“그렇게 부르지 마.”
“왜? 자신감을 가져.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식물 십타쿠님!”
“…….”
제발 그런 소름 끼치는 표현을 쓰지 말라고 사정사정한 뒤에야 최세드릭이 그렇게 부르기를 그만뒀다.
“아무튼, 길드에 들어갈 생각은 없어.”
“왜? 내 추천이면 서류 심사, 실기시험, 면접 다 프리패슨데.”
너희 길드 빡세서 싫다고 하면 좀 그렇겠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자유로운 영혼…….”
“어?”
“한곳에 머무를 생각은 없어. 그러니 길드에는 들어가지 않아.”
“그래, 그럼 별수 없지. 그런 것도 좋겠네.”
반쯤 농담이었는데, 뜻밖에 최세드릭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럽다.”
그렇게 덧붙이는 말에는 진심이 두텁게 묻어났다.
“내가 바라는 건 이거야. 나 카페 운영하거든.”
“아! 체인점 내려고? 본사는 내 권한으론 좀 어려운데, 지사에는 바로 자리 하나 내 줄 수 있어.”
랭커들은 다 이런가. 갑자기 터무니없이 스케일이 큰 이야기를 꺼내서 나는 당황했다.
“그게 아니라! 언제 손님으로 한번 오란 이야기를 하려던…….”
손을 내저으며 정확한 뜻을 전달하려던 바로 그때였다.
“……!”
띠링, 하고 알림이 울렸다.
[아이템을 획득했습니다. 인벤토리를 확인하세요.]
헉, 대화에 정신이 팔린 사이 나도 모르게 뽑기 버튼을 눌러 버렸나 보다.
엄청 설레는 마음으로 뽑기를 하려고 했는데. 뽑는 순간의 손맛! 그게 바로 뽑기의 매력이라고!
내 뽑기!
[아이템: 간단 커피 제조 키트(★★★☆☆)]
언제 어디서든 커피를 즐길 수 있는 휴대용 커피 도구 세트입니다.
이제 던전에서도 마음껏 커피를 즐겨 보세요.
비고: 신규 이용자 특전! 1회분 커피 재료 포함]
뽑기가 날아간 걸 아까워하는 것도 잠시.
인벤토리에는 웬 커피 제조 키트가 들어 있었다. 휴대용 버너, 모카포트, 컵 등과 함께 한 번은 충분히 먹을 양의 커피 원두와 기타 재료까지.
커피가 먹고 싶다고 투덜거렸더니 이런 게 나오다니, 웬일로 쓸 만한 게 뽑혔다.
“세드릭, 커피 마실래?”
“에엥, 지금? 여기서? 버프 포션도 아니고 커피를?”
“마셔 보면 알아.”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최세드릭의 눈빛은 무시하고.
인벤토리에서 커피 제조 키트를 꺼내 손에 드는 순간 알림이 뜬다.
[조건을 만족했습니다.]
[스킬: 던전 탐험도 커피 한잔 후(B)를 획득했습니다.]
[던전 탐험도 커피 한잔 후(B)
상세: (Lv.1) 던전에서 음료 제조 시 완성도가 높아진다.]
새로 얻은 스킬을 써서 모카포트로 에스프레소를 추출한 다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들었다. 산뜻한 향이 피로를 덜어 주는 느낌이었다. 곧장 기력 소모를 막는 효과가 적용되었다.
최세드릭에게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넸다. 그런데 컵을 받아 드는 그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왜 그래? 혹시 쓴 커피 못 마셔?”
“아니! 누가 못 마신다고 그래?”
최세드릭이 홱 컵을 낚아채고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꿀꺽.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감춰지지 않는 떫은 표정에 나는 웃음을 참으며 인벤토리를 뒤졌다.
“설탕 있는데 줄까?”
“야, 그런 게 있으면 빨리 말할 것이지!”
컵에 설탕을 넉넉히 타는 최세드릭의 옆에서 나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방어막 주위에서 웅웅대는 벌레형 몬스터, 분비물을 쏴 대는 줄기, 꿀렁꿀렁 흔들리는 바닥…….
빈말로도 쾌적하다고는 할 수 없는 풍경이지만 어쨌거나 커피는 맛있었다.
던전 안에서 마시는 것도 나름 운치가…….
푸지직!
위이잉, 푸직!
공중을 날던 벌레형 몬스터가 분비물에 맞았다. 이파리가 쩌억 벌어지더니 녹아내리는 벌레를 낚아채 삼킨다. 콰직 하는 불쾌한 소리 끝에 남은 것은 벌레형 몬스터의 날개 두 장뿐.
“…….”
운치는 무슨…….
몬스터지옥의 식사 라이브쇼에 입맛이 싹 떨어졌다.
빨리 여기서 나가고 싶어졌다. 컵을 전부 비운 뒤 옆의 최세드릭을 불렀다.
“슬슬 가자. 얼른 여기서 나가고 싶어. ……어?”
그 사이에 최세드릭은 자신의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차피 던전 안에서는 연결도 안 되는데 퍽 진지한 표정이다.
변명하자면 일부러 보려 한 건 아니다. 옆에서 자연히 화면 속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데?”
“……! 무, 무슨 짓이야. 깜짝 놀랐잖아. 멋대로 보지 마.”
S급 헌터가 F급 헌터한테 놀랐다고 투덜거리다니 불합리하게 느껴지지만.
“미안. 안 볼게.”
“크흠, 흠, 정 보고 싶으면 보여 줄 수도 있고.”
불쑥 눈앞에 핸드폰이 들이밀어졌다.
“많이 보면 닳으니까 조심해서 봐.”
대체 보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핸드폰 화면 안에는 어느 여자애 사진이 있었다.
복숭앗빛 뺨에 커다란 눈동자, 도톰한 입술이 꽤 귀엽다. 가족인가. 자세히 보니 최세드릭과 눈매가 닮았다.
“동생이야?”
“어. 이런 말 하면 그렇지만.”
“……?”
“세상에서 제일 귀엽지 않냐. 솔직히 천사인 듯? 내 동생이지만 어떻게 이렇게 예쁠 수가 있지? 아! 달력 모델을 했어야 하는데! 지금이라도 달력을 만들까? 하지만 온갖 어중이떠중이한테 우리 로나 사진을 보여 줄 수는 없는데.”
깜빡이도 켜지 않고 주접이 쏟아졌다. 드립인가? 동생에 대한 주접 치고는 조금 과한데.
“그래, 프리미엄 한정판으로 만들면 되겠다!”
아니, 이건 순도 100%의 진심이다. 눈을 봐라. 그럴 사람이다.
최세드릭의 말이 거짓말은 아닌 것이, 사진 속 여자애는 귀여웠다. 확실히 귀엽긴 한데…….
최세드릭이 지금 22살일 텐데, 사진 속 여자애는 꽤나 어려 보인다. 잘 봐 줘야 초등학생. 나이차가 많이 나는 동생인가?
“동생이 되게 어리네?”
“아, 그건.”
들뜬 표정으로 노빠꾸 불도저 주접을 쏟아 내던 최세드릭의 얼굴에 순식간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건……. 깨어 있을 때 찍은 사진이 이것밖에 없어서.”
아.
이초록이 이야기한 최세드릭의 아픈 가족이 이 여자애였나.
“지금은 열여섯 살이야.”
내년엔 고등학교도 가야 하는데. 최세드릭이 씁쓸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의 동생, 최로나는 어느 날 갑자기 잠이 들더니 그대로 깨어나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힐러에 포션 등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지만 차도는 없었다.
문득 유독 힐러에게만 인성질을 부리던 회귀 전 최세드릭의 모습이 떠올랐다. 힐러를 싫어하는 것도 그래서였나.
불합리한 감정이지만, 누군가를 탓하지 않고는 버티기 힘든 순간이 있으니까.
“그래도 이제 여기만 나가면 괜찮아. 푸른 세라에노꽃을 살렸으니까. 그거만 있으면 로나도 이제 편해지겠지.”
그런 말로 우울함을 억지로 떨쳐 낸 최세드릭이 불쑥 화제를 돌렸다.
“근데 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