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공략대는 안쪽의 상황을 좀 더 본 뒤 투입할 예정입니다. 현재 안에 최세드릭 헌터가 같이 있습니다.”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이겠으나, 권지운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상관없습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인데, 바로 투입해 주세요. 저도 가겠습니다.”
“……! 헌터님께서 지원해 주시면 든든하죠. 바로 투입 준비하겠습니다.”
“아…… 안 돼요!”
이초록은 허둥지둥 그들을 가로막았다.
“물러서세요.”
공무원이 그녀를 뒤로 당긴다.
권지운이 서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목덜미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그녀는 떨리는 입술을 움직였다.
“몬스터지옥은 식사를 위해 자리를 잡으면 고치를 만들고 결계를 쳐요.”
“네?”
“이미 균열을 둘러싸고 보호 결계가 발동되었어요. 그걸 억지로 깨뜨렸다간……. 복잡한 에테르의 흐름이 깨지면 영영 바깥으로 나올 수 없다고요!”
멈칫. 은빛 머리카락의 힐러가 이초록을 보았다.
“……자연 발생한 균열이 아니군요. 그런 위험한 게 왜 여기 있습니까?”
“그건……. 저도 잘…… 아하하…….”
거액의 벌금에 72시간의 던전 안전 교육 이수가 추가로 결정되었다.
이제 과일 가게 알바생 겸 거액의 빚쟁이가 된 이초록은 푸른빛을 뿜어내는 균열을 바라보았다.
분명 깨어나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푸른 세라에노꽃이 뿌리는 별빛을 받은 몬스터지옥이 요사스럽게 반짝인다.
속으로 되뇐 기도는 절실한 진심이었다.
‘제발 무사하세요, 손님.’
은빛 파도라는 이명을 지닌 헌터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안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을 것 같다.
‘부디 빨리 살아 돌아와서.’
저 눈빛에서 나를 구해 줬으면…….
* * *
소화액을 쏘아 생물체를 녹여 영양분을 섭취하는 식물형 몬스터.
그 소화액은 염산보다도 강해 단단한 몬스터의 겉가죽도 녹일 수 있다.
날렵한 덩굴로 먹잇감을 잡아 천천히 녹여 먹는 아주 무서운 존재.
by 에테르-위키.
눈앞에 나타난 몬스터지옥을 보고 당황한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랭킹 2위의 검사가 있기 때문이다.
날렵한 동작으로 적의 앞을 파고드는 속도형 딜러. 검사 중에서는 견줄 자가 없는 능력치다.
흔히 불리는 별명은…….
“가랏! 콩드릭!”
“……그렇게 부르지 마라.”
그렇게 말하면서도 최세드릭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제 키만 한 검을 비딱하게 들고 앞으로 나선다. 잠깐만 기다려, 같은 먼치킨 같은 대사는 덤이었다.
스르릉. 검날이 원을 그렸다.
순식간에 몬스터지옥의 앞으로 파고들어 비스듬히 베어 넘긴다. 틈을 두지 않고 다시 뿌리를 끊어 낸다.
샤샤샥, 쾅!
몬스터지옥은 깨끗하게 두 쪽으로 갈라졌다. 소화액을 뿜어내던 줄기도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됐다!”
이제 탈출 게이트가 열릴 차례인데…….
“……어?”
크어어어!
죽은 것 같던 몬스터지옥이 다시 일어났다. 칼에 베인 상처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나았다.
말도 안 된다. 방금 분명히 죽었는데!
최세드릭이 검을 고쳐 쥐었다. 도움닫기를 하며 외친다.
“헹, 살아나 봤자 마찬가지야. 다시 베어 넘기면 그뿐!”
와, 진짜 믿음직하다. 먼치킨 버스의 안락함이란.
쏜살같이 달린 최세드릭이 위로 점프. 몸이 공중을 날았다.
바로 앞에는 부활한 몬스터지옥의 무성한 가지. 그러나 최세드릭의 검이 더 빠르다.
스슥, 콰아앙!
크게 휘두른 검이 깨끗하게 몬스터지옥을 잘랐다. 이어 터지는 전격 스킬이 내리꽂힌다.
퍼엉! 새까맣게 탄 벼락 맞은 나무토막. 이번에야말로 성공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들었는데…….
벼락 맞은 나무토막에 새 가지가 돋아나더니 금방 부활했다.
이 사태는 최세드릭조차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낮게 뇌까렸다.
“말도 안 된다. B급 따까리가 쿨타임도 없이 부활을 한다니, 들어 본 적 없어.”
그때 무언가가 내 눈에 들어왔다.
“야, 저기 봐! 저거!”
“왜, 나오지 말고 방어막 안에 있으라니……. 어?”
몬스터지옥의 가지 꼭대기에 매달린, 별빛을 머금은 푸른 꽃.
착각할 리가 없다. 애써 부활시켰던 푸른 세라에노꽃이었다.
순식간에 최세드릭의 얼굴이 차게 굳었다.
“저건……. 안 돼, 저건 우리 로나한테 가져가야 해.”
꽃은 우리와 함께 균열에 빨려 들어온 듯했다. 그리고 그 꽃을 몬스터지옥이 삼켰고.
잠깐, 생각을 정리해 보자.
푸른 세라에노꽃의 힘은 재생이다. 그 꽃을 삼켰으니 자연히 몬스터지옥은 계속 재생한다.
그럼 재생을 하지 못하게 만들려면 먼저 힘의 원천, 푸른 세라에노꽃을 처리해야겠지.
그래, 결론.
꽃을 먼저 뽑아야 여기서 나갈 수 있다.
“…….”
“…….”
최세드릭 역시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는 꽃을 제거하는 대신 방어 자세를 취했다.
치지직!
다시 시작된 몬스터지옥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기만 할 뿐, 도통 공격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세드릭, 왜 그래? 이대로라면 또 부활하기만 할 거야!”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덧붙여진 나지막한 목소리는 절실했다.
“우리 로나를 구하려면 저 꽃이 있어야 해. 저걸 없앨 순 없어.”
“…….”
단단히 선 채 공격을 방어한다.
처음에 최세드릭은 잘 버텼다. 공격을 피하면서 줄기를 베고, 부활하면 또 베었다.
“……큭!”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크으윽…….”
매캐한 냄새와 함께 피부가 탔다. 고통이 상당할 텐데도 최세드릭은 움직이지 않는다.
“물러서.”
최세드릭은 몬스터지옥의 공격을 막으면서도 나를 공격하는 덩굴을 베어냈다.
하지만 이래서는 끝이 없다. 잘라 낸 덩굴은 금방 다시 자라났고, 저 괴물 나무토막은 오늘의 메인 디쉬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기색이었다.
“설마, 너 여기서 죽기라도 할 작정이야?!”
“그건 아니야. 하지만…….”
시선은 저 멀리 별빛을 머금은 꽃을 향했다.
안다. 이미 꽃이 몬스터와 융합한 이상 분리는 어렵다. 여기서 보스를 해치우고 던전을 빠져나간 뒤 다시 꽃씨를 구하는 쪽이 이성적인 선택이다.
최세드릭도 알고 있을 테다.
그렇지만…….
자신이 다치더라도 동생을 구할 약을 포기하고 싶지 않겠지. 차마 자기 손으로 동생을 구할 꽃을 벨 수가 없는 거다.
슈슈슉!
잠시 주의가 흐트러진 틈을 타 바닥에서 덩굴이 치솟았다.
“이야아아압!”
그 순간, 최세드릭은 검을 들고 위로 뛰어올랐다. 나는 것처럼 가벼운 동작이었다.
몬스터지옥의 가지를 밟고 재도약. 이어지는 공격을 피하며 순식간에 접근해 푸른 세라에노꽃을 향해 손을 뻗는다.
10미터, 5미터, 1미터…… 됐나?!
“……! 큿!”
꽃에 손이 닿기 직전, 몬스터지옥이 몸을 크게 뒤흔들었다.
손은 허공만 움켜쥐고 아래로 미끄러졌다.
격렬하게 움직이는 거대한 나무의 머리끝에서 꽃 한 송이를 상처 없이 뽑기란 힘든 법이다. 그것도 소화액을 뿜어 대는 나무라면.
재도약하려는 최세드릭의 몸에 덩굴이 휘감겼다.
스스슥, 쾅!
곧장 베어냈지만 이번에는 착지하려는 자리에 소화액을 쏜다.
“으윽……!”
무방비한 발이 바닥에 뿌려진 소화액에 닿는다. 그러나 최세드릭은 몬스터지옥을 공격하는 대신 방어 자세를 취했다.
이대로라면 끝이 없다. 구조를 기다리며 버티다가 저 괴물 나무토막의 브런치가 되는 결말 뿐.
무슨 수를 내야 했다. 나는 초조하게 생각을 이어 나갔다.
“……그래!”
‘커피 한 잔의 인연.’
[대상: ‘최이찬’을 선택합니다.]
S급인 최이찬의 스킬이라면 힘이 될 테다. 그런 생각에서였지만.
“…….”
“으음…….”
나는 최이찬의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시스템 창을 껐다. 쓸 만한 스킬은 모두 배수로 강화하는 스킬이었기 때문이다.
티끌을 부풀려 봐야 티끌. 힘 20에 공격력 2짜리 모종삽을 들고 몇 배로 뻥튀기해 봐야 최세드릭의 칼질 한 번보다 약하다.
애초에 최세드릭이 약해서 몬스터지옥에게 골골거리는 것도 아니고.
‘커피 한 잔의 인연’의 쿨타임은 24시간. 한 번밖에 사용하지 못하니까 신중해야 했다.
‘그럼 무슨 방법이……. 어?’
[커피 한 잔의 인연(B)
상세: (Lv.1) 궁극의 커피를 마신 상대의 스킬을 복사할 수 있다. (00:05:00)
쿨 타임: 24:00:00
사용 가능 대상: 최이찬, 김태운]
당장 도움 안 되는 스킬 창을 꺼 버리려고 했는데 낯선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김태운? 그게 누구더라. 그런 사람이 있었나?
“……아.”
맞다, <헌터 스코프>의 기자 아저씨 이름이었다. 하루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생기는 바람에 잊고 있었다.
혹시 도움이 될지도 모른단 생각에 냉큼 스킬을 열어 봤더니.
[조회 수 폭발!(F)
(Lv.1) 대상의 정보가 담긴 기사 한 편을 쓸 수 있다.
기사가 반드시 진실이라는 보장은 없다.]
[파파라치(E)
(Lv.1) 일정 시간 동안 들키지 않고 대상을 미행할 수 있다. (01:00:00)]
…….
…….
정말 악덕 기자다운 스킬이다…….
가짜 뉴스 제조에 최적화. 이러니까 세상에 가짜 뉴스가 판을 치지.
속으로 있는 대로 불평을 쏟아 내는 그 때였다.
오늘의 메인 디쉬(최세드릭)를 몬스터지옥이 끈질기게 공격하는 동안 사이드 디쉬(나)를 노리는 놈들이 있었다.
스스슥!
“흐아아악!”
바로 벌레형 몬스터였다.
하나하나는 그렇게 강하지 않다. 하지만 떼로 몰려다니는 벌레 무리는 그 자체로 비주얼적인 압박감이 있었다.
“흐악! 에, 에프 킬라!”
그러나 인벤토리에 그런 것은 없다.
위이이잉-
“저리 가! 으악!”
대신 모종삽을 꺼내 바닥을 두들겼지만 재빠른 벌레 떼를 퇴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다면…….
내 살점을 뜯어먹기 위해 다가오는 벌레 떼를 향해 스킬을 사용했다.
‘흐아악! 바닥이 반짝반짝!’
샤샤샥!
“……어?”
부정형의 에테르가 바닥을 뒤엎더니 순식간에 벌레가 주위에서 사라졌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 스킬은 완전히 바닥을 반짝반짝하게 만들기 위해 뻗어 나갔다.
크어어어!
몬스터지옥의 괴성이 울렸다. 바닥에 내린 뿌리가 모두 잘려 나갔기 때문이다.
곧장 다시 뿌리를 뻗으려 했으나, 바닥에는 먼지 한 톨 허락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