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결국 뿌리 내릴 곳을 잃은 몬스터지옥은 중심을 잃고 크게 비틀거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바로 이해하지 못한 최세드릭이 놀란 표정으로 감탄했다.
“너, 그렇게 센 스킬이 있다니……. 대단하잖아!”
글쎄, 나도 이 정도로 청소에 진심인 스킬인 줄은 몰랐는데. 한 번만 더 스킬 레벨 업을 했다간 세상을 청소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아무튼 쓸 수 있는 건 전부 써야 하는 법.
…….
‘바닥이 반짝반짝!’
나는 앞으로 나아가며 다시 스킬을 사용했다. 싹둑. 더 크게 뿌리가 잘려 나간다. 몬스터지옥의 중심부 쪽으로 걸어가 다시 한번, 또 다시…….
이윽고.
쿠쿠쿠쿵!
뿌리가 전부 뽑힌 몬스터지옥이 출하 직전의 당근처럼 뒤로 쿵 쓰러졌다.
어, 이게 진짜 되네……?
* * *
뿌리가 잘려 갓 뽑은 고구마 줄기처럼 쓰러진 몬스터지옥. 그 틈을 타 나는 다시 외쳤다.
“가랏! 콩드릭!”
꽃을 구해 낸 뒤 당장 여기서 나가는 거다.
그러나 제 생명의 원천인 꽃을 놓치지 않으려는 몬스터지옥의 반항도 엄청났다.
최세드릭이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가지와 뿌리를 사방으로 뻗어 대더니 원형의 감옥을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 갇히고 말았다.
칼로 베어도 보고 청소 스킬도 써 봤지만, 잘려나간 나뭇가지는 금방 다시 자라났다. 틈을 만들어 억지로 몸을 끄집어내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나뭇가지가 스스슥 움직이더니 다시 감옥을 만들어 가둘 뿐.
뭐야, 이거…… 회귀물이야? 아니, 루프물?
몬스터지옥 무한 회귀편?
그러다 문득 좋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몬스터지옥에서 푸른 세라에노꽃만 구해 낼 수 있다면, 이런 지지부진한 공방을 계속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1 더 이상 재생하지 못할 테니까.
나는 스킬 창을 열어 내용을 읽었다. 내가 주목한 스킬은 바로 이거다.
[바리스타의 추출(D)
상세: (Lv.2) 혼합된 물질에서 원하는 물질만 추출한다.]
‘말도 안 돼……. 아니, 아니야. 이제까지의 경험대로라면 분명 가능해!’
방법을 찾았다.
이 방법을 시도해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준비가 필요했다.
먼저 최세드릭에게 말을 걸었다.
“이대로는 끝이 없어. 조금만 쉬자.”
최세드릭은 조급한 기색이었지만, 끝이 없다는 데 동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몬스터지옥에 갇힌 채로 잠시만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커피를 만드는 것이었다.
쪼르륵. 달콤한 냄새가 주위에 확 퍼졌다. 나는 막 만든 카페모카를 최세드릭에게 건넸다.
“이게 뭔데?”
일단 주니까 받기는 했는데,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얼른 마시기나 해.”
그러나 말로 하는 설명보다는 체험이 빠른 법이다.
카페모카의 효과는 회복 속도 200% 증가다. 소화액을 맞아 몸 여기저기가 녹아내린 최세드릭에게 꼭 필요한 메뉴.
“……!”
카페모카를 마시고 효과를 직접 체험한 최세드릭이 깜짝 놀라서 나를 보았다.
“이, 이건 뭐지? 포션보다 더 빨리 상처가 낫고 있어!”
“그냥 커피야.”
“게다가 입속에서 초콜릿 향기가 춤추는 것만 같아! 이 달콤 쌉싸름함, 인생이 담겨 있는 맛이야!”
“아니야, 뭐 그렇게까지…….”
“정말이라니까!”
주접을 떨고, 겸손한 척 대답하고, 다시 주접을 떨고. 주접 스킬(S)을 패시브로 장착한 최세드릭과 짜고 치는 듯한 주거니 받거니를 한 지 한참.
최세드릭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렇구나, 너는…….”
내가 한 거라곤 스킬을 써서 커피를 탄 것밖에 없지만 어쨌건 칭찬을 듣는 건 기분 좋은 법이다.
그렇다고 천재 바리스타라고까지 부르는 건 좀 과한데, 아하하.
“커피 마니아, 아니, 커피 십타쿠님!”
“…….”
이 랭킹 2위의 어휘 체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다시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최세드릭을 뜯어말린 뒤, 내 몫의 바닐라라테를 마셨다.
준비는 모두 마쳤다. 이제 남은 일은 시도하는 것뿐.
“너, 잠깐만 시간을 끌어 줄 수 있어?”
“뭐? 뭘 할 생각이야?”
“두고 보면 알아.”
“꽃을 죽이려는 건…….”
“아니야, 걱정할 필요 없어.”
하얗게 마디가 솟을 정도로 꽉 쥔 손이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최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거의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샤샤샥! 감옥을 이룬 나뭇가지를 잘라 낸 순간 앞으로 몸을 던졌다.
틈을 두지 않고 곧장 스킬을 사용했다.
‘바리스타의 추출!’
[극도로 어려운 대상의 추출입니다.]
[추출에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추출하시겠습니까?
네 / 아니오]
원래라면 높은 확률로 실패했겠지만 나는 주저 없이 ‘네’를 선택했다.
왜냐하면…….
[바닐라라테의 효과가 적용 중입니다. 스킬 사용 시 1회 동안 100%의 확률로 크리티컬이 발생합니다.]
[크리티컬! 믿을 수 없는 추출에 성공했습니다.]
[추출이 완료되었습니다.]
반짝이는 빛이 사라지고 내 손에 남은 것은…….
“……푸른 세라에노꽃!”
혼합된 물질에서 원하는 물질만 추출하는 것이 바리스타의 추출(Lv.2)의 효과.
이름에 ‘바리스타’가 들어가기는 하지만 커피에만 쓰라는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즉, 이런 거다.
혼합된 물질 = 몬스터지옥 + 푸른 세라에노꽃
원하는 물질 = 푸른 세라에노꽃
나는 한 손에 꽃을 들고 생각했다.
야, 이게 진짜 되네……?
“……! 어떻게 이렇게 쉽게. 너, 너, 설마 등급을 속인 건…….”
“F급 맞아. 얼른 받기나 해.”
“……고맙다.”
짧은 말에서 짙은 진심이 느껴졌다.
최세드릭이 내게 푸른 세라에노꽃을 받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띠링.
[믿을 수 없는 업적: ‘밥 먹을 때 몬스터지옥 건드리기’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을 수령해 주세요.]
[보스 몬스터 ‘몬스터지옥(B)’을 처치했습니다.]
[던전: 몬스터지옥을 클리어했습니다.]
[레벨이 10이 되었습니다.]
우수수 뜨는 알림 창을 대강 훑었다.
내가 생각해도 밸런스 붕괴 사기 같았지만 보스를 처치했으니 아무래도 됐다.
이제 탈출하기만 하면 된다. 몬스터지옥의 몸통 근처에 생성된 탈출 게이트를 향하는데 다시 알림이 울렸다.
띠링.
[몬스터지옥의 사망으로 인해 현 공간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공간이 강제로 소멸됩니다. ……소멸까지 남은 시간 30초.]
째깍째깍…….
시스템 창의 남은 시간이 빠르게 줄어들더니, 시야의 끝부터 던전이 무너진다. 원래 있던 온실의 공기가 혼입되며 이공간을 먹어치웠다.
그 기이한 감각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발밑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30초는 너무 짧지 않아?!
“으아앗……!”
“칫, 조심해!”
주르륵 미끄러지는 나를 최세드릭이 붙잡았다. 그리고 먼저 나가라며 탈출 게이트 쪽으로 던졌다.
게이트의 푸른빛을 통과하는 순간.
……어?
몬스터지옥의 잔해가 발에 감겼고, 그 바람에 몸에 공중으로 떠올랐다. 지긋지긋한 이 괴물 나무토막!
몸이 바닥으로 추락한다.
안 돼, 기껏 밸런스 붕괴 사기 스킬로 보스를 처치했는데 여기서 죽는 미래는 사양이다!
다행히 시스템이 알아서 재빨리 반응했다.
[위기 상황! ‘커피 한 잔의 인연’이 발동됩니다.]
[대상: ‘최이찬’이 선택됩니다.]
[스킬: 방어는 최고의 방어(C)를 사용합니다.]
[5분 간 방어력이 500% 상승됩니다.]
이 상황은 이미 한 번 겪은 적이 있지.
데구르르, 착!
완벽한 낙법 자세로 착지한 몸에 아픔은 느껴지지 않는다.
‘바닥이 반짝반짝!’
발에 감긴 몬스터의 잔해도 완벽하게 처치했다. 퍼펙트 2콤보!
속으로 뿌듯함을 느끼며 고개를 드는데, 눈이 마주쳤다.
“…….”
“…….”
누구와?
권지운과.
권지운이 대체 왜 여기 있지? 잘못 봤나?
그러나 저 독특한 은빛 머리카락, 서늘한 분위기의 얼굴이 세상에 둘이 있을 리가 없다.
다 부서진 온실, 울상이 된 이초록, 덕지덕지 빨간 스티커가 붙어 있는 던전 식물들.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못 봤겠지?
방금 방어 스킬을 쓰긴 했지만 그냥 낙법처럼 보였을 거다.
몬스터 잔해도 날려 버리긴 했지만, 그건 그냥 청소 스킬…….
“…….”
“…….”
아니, 현실 도피는 그만두자.
무표정하던 권지운의 얼굴에 충격이 번져 갔다. 내게 다가온 그는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다 봤네!
“어, 그, 오빠, 여긴 무슨 일로……?”
권지운이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이곳, 농원에 균열이 발생했다는 연락을 받아서.”
급작스러운 균열이 터지면 1차적으로 <던전관리청>에서 현황을 파악한다. 그리고 <던전관리청> 소속 헌터만으로 대응이 불가능한 경우 각 길드에 지원 요청을 한다.
지원 요청을 하는 기준은 길드의 규모, 헌터의 능력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특별히 위험 요소가 크지 않은 균열의 경우는 그냥…… 순번제다. 학급 당번 같은 거지.
하필이면 오늘, 그 당번이 권지운의 차례였던 건가.
“그래? 하하하하, 우연이네.”
“…….”
다시 침묵.
진정하자. 어차피 각성했다고 말하려고 마음먹었잖아.
이렇게 갑자기 마주칠 줄은 몰랐지만, 지금이 말해야 할 타이밍이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한 뒤 입술을 움직였다.
“오빠, 나 각성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