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대답 대신 차가운 손가락이 이마에 닿았다.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빛에 있는지도 몰랐던 이마의 생채기가 나았다.
“다행이다. 크게 다친 데는 없는 모양이군.”
“어, 뭐…… 그렇지.”
“피해 신고만 접수하면 바로 귀가해도 좋다고 하네. 외상은 없어도 많이 피곤할 거야. 돌아가면 푹 쉬고.”
뭐지, 이 위화감.
그동안 각성 사실을 감췄다고 화를 낼까 봐 나는 긴장했다. 그러나 권지운은 아무 말도 없다.
“……?”
나의 일생일대의 고백이 완전히 무시당함? 못 들은 척?
음, 그래, 주위가 혼잡하니까 못 들었나 보다. 나는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권지운, 나 각성했다니까?”
“…….”
이번에는 조금 충격받은 표정.
아, 그거 때문인가.
“그게, 음, 그러니까, 일부러 숨기려고 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이래저래……. 아, 그리고 절대 오빠네 길드에 가입하고 싶다는 말은 안 할 테니까 안심해.”
이상하다. 걱정하지 말란 뜻에서 말했는데 권지운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내가 못 미더웠나 보구나.”
이어지는 말은 서글프게도 들렸다.
권지운이 내 손을 붙잡았다. 하얀빛에 보일 듯 말 듯한 상처까지 전부 사라졌다. 붙잡힌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나를 불렀어야지.”
“던전 안에선 핸드폰 연결 안 되잖아…….”
나도 모르게 변명조의 말이 튀어나왔다.
“이런 수상쩍은 곳에 왜 왔는지는 묻지 않을게. 하지만 적어도 나한테 말은 했어야지. 갑자기 균열에 휘말렸다는 연락을 받고 얼마나…….”
짙게 서린 염려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의 반응이 낯설게 느껴졌다.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당황하여 대답을 고르는 때였다.
“너 거기서 뭐 하는……. 어.”
탈출 게이트에서 최세드릭이 빠져나왔다. 그는 내게 말을 걸려다가 앞에 있는 권지운을 보고 흠칫 놀랐다.
“설마, 권지운 헌터……?”
“최세드릭 헌터. 오랜만입니다.”
권지운이 먼저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다. 그러나 옆에서 봤을 때 그다지 우호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산하로 들어오란 제안을 수락하지 않으면 돈으로 길드를 산다고 했던 이후로 처음이군요.”
최세드릭 너 그런 짓도 저질렀었냐…….
과연 빅3 중 악덕 길드로 이름 높은 곳답다.
“그건, 사정이, 대표님 부탁에 어쩔 수가…….”
당황해서 뭐라 중얼거리던 최세드릭이 숨을 삼켰다. 뒤늦게 자신의 대외적 콘셉트를 떠올린 듯 말을 바꾼다.
“흐, 흠! 그때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될걸!”
꽈악. 살벌한 분위기에서 악수가 끝났다.
하지만…….
엄청난 발연기였다. 책을 읽는 듯 뻣뻣한 말투에 불안한 시선 처리. 이런 발연기인데 오만한 랭커 행세가 통했다니, 다들 눈이 없는 건가.
“난 일이 있어서 먼저 돌아가 볼게. 다음에 다시 보자.”
잡을 틈도 없었다. 최세드릭과 더 말하기 싫었던 건지, 아니면 나를 피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권지운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나저나 <씨앤엘 코퍼레이션>이 권지운의 길드를 먹으려 했었다고?
‘이상한데…….’
<백은 길드>는 탑 랭커 힐러 권지운을 중심으로 하는 소규모 길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무리 탑 랭커라고 해도 힐러 혼자서 던전을 돌 수는 없다. 길드장이 실종되었다는 이유도 있어서 <백은 길드>는 유명세와 인지도에 비해 활동 범위가 좁은 편이었다.
<씨앤엘> 같은 대형 길드에서 욕심을 낼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회귀 전의 기억대로라면 <씨앤엘 코퍼레이션>은 힐러 전문 길드 <축복의 정원>을 산하로 받아들인다.
한때는 최세드릭과 갈등을 빚고 보이콧 선언까지 했던 길드의 파격적인 합병 선언.
아마 거절하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었겠지.
그러니 힐러가 부족해서 합병하려는 것도 아니다.
‘으음…….’
권지운 길드와 무슨 일이 있기는 한 모양인데.
하지만 당장은 알 수 있는 사실이 없었다. 최세드릭에게 좀 더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혼신의 발연기를 선보인 그가 뜬금없는 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너 설마 저, 저…….”
“권지운 말야?”
“그래! 저 힐러랑 무슨 사이야?!”
“어? 사촌 오빠인데.”
최세드릭은 진심으로 당황한 표정이었다. 얼굴 위로 손을 덮더니 혼자 뭐라 뭐라 중얼거린다.
하필이면 저 권지운의 가족이었다니 그럼 내 이미지는 완전히 엉망진창인 거 아닌가 어쩌고저쩌고. 얜 또 왜 이러지.
한참 혼자 구시렁거리다가 고개를 든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아니, 뭘?
“각오하고 있으라고!”
그러니까 뭘?
* * *
서늘한 그늘이 드리운 병실.
최세드릭은 로나의 옆을 지키던 힐러를 전부 내보냈다.
또 지난번처럼 화풀이를 당할까 봐 두려워하던 힐러들은 곧장 도망치듯 병실을 나갔다.
오늘도 동생은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눈물에 젖은 뺨이 뜨겁다.
“로나야…….”
당장 인벤토리를 열려다 최세드릭은 멈칫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온갖 방법을 써도 차도가 없었던 로나의 병을 낫게 할 유일한 희망이 푸른 세라에노꽃이었다. 우연히 씨앗을 손에 넣은 뒤 꽃을 피울 방법을 얼마나 찾아 헤맸던가.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꽃을 살려 냈다.
하지만 만약 이것도 실패하면? 믿었던 단 하나의 희망이 좌절되었을 때의 절망. 최세드릭은 그것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인벤토리를 열고, 화분에 옮겨 심은 꽃을 침대 옆에 내려놓았다.
꽃잎에서 푸른 별빛이 흘러나왔다. 영롱한 빛은 그늘진 공간을 떠돌다가 병실 전체를 가득 채웠다.
천천히 신음이 잦아들고 숨이 편안해진다.
이윽고 로나가 느리게 눈을 떴다.
“……로나야!”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고 마른 손은 떨렸다. 그러나 소녀는 똑바로 자신을 바라본다. 이렇게 깨어난 모습을 보는 것이 몇 년 만인지.
“오빠…….”
“정신이 들어? 어, 그래, 나야. 오빠 여기 있어.”
손을 뻗는다. 최세드릭은 로나의 손을 마주 잡았다. 마르고 작은 손이 안타까웠다.
로나는 최세드릭의 손에 의지해 몸을 일으켰다. 오랜 시간 누워만 있던 몸은 그 작은 동작조차도 버거워 팔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 로나는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로나야, 일단 누워. 여기 물. 물 좀 마셔.”
“오빠, 그 사람, 조심…….”
뒷말은 거친 숨에 섞여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한계였다. 스르륵, 로나는 다시 잠이 들었다. 몇 번 더 이름을 불렀지만 무거운 눈꺼풀이 들리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잠은 편안했다. 예전처럼 고통에 찬 모습은 없었고, 쌔근거리는 숨, 부드럽게 감긴 눈은 마치 좋은 꿈이라도 꾸는 것 같다.
지금은 이것만으로도 눈물이 나올 만큼 기쁘다.
최세드릭은 로나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넘겼다.
오빠가 꼭 낫게 해 줄게. 그때까지만 좋은 꿈을 꾸는 거야.
그렇게 되뇌는 그때.
벌컥 병실 문이 열렸다. 대표의 비서, 이온이었다.
“……? 무슨 일이지?”
최세드릭은 무심결에 비서 이온의 시선에서 로나를 가렸다.
이온이 이 병실에 얼굴을 비춘 적은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저 엷은 미소가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로나 양은 어때요? 좀 나아졌나요?”
이온이 걱정스러운 투로 말을 걸었다.
그 말에 최세드릭은 경계심을 잊고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
착각이었겠지. 좀 꺼림칙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길드를 위해서 이제껏 헌신해 온 사람인데 내가 무슨 생각을.
“어어, 이 꽃 덕분에 많이 나아졌어.”
“이세인 대표님이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어요.”
“그래? 나중에 간다고 전해 줘.”
“급하신 용건 같아요.”
“……그래, 알았어.”
최세드릭은 아쉬워하며 침대맡에서 몸은 일으켰다.
로나는 편안하게 잠들어 있다. 그동안 잠깐 다녀오면 되겠지.
“로나야, 오빠 금방 갔다 올게.”
잠든 동생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최세드릭은 병실을 나섰다.
문 너머로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다음.
“…….”
어느새 이온의 얼굴에 웃음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소름 끼치는 정적 속, 표정을 모두 지워 내 인간의 것 같지 않은 시선이 침대 위의 소녀를 향했다.
그리고 별빛을 머금은 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온은 주저 없이 푸른 세라에노꽃을 손으로 짓이기려 했다.
키이잉-
무형의 결계가 이온의 손을 튕겨 냈다. 스파크가 튀고, 이어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칫.”
아주 잠깐 결계에 닿았을 뿐인데도 손바닥이 새까맣게 탔다. 이온은 혀를 차며 거뭇한 손을 감췄다.
뭐, 됐다. 이제 와서 이 꽃이 있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저 마음의 위안이나 될까.
“어차피 넌 아무것도 하지 못할걸.”
그 말을 남기고 이온이 몸을 돌렸다.
문이 닫힌다. 소녀는 잠든 채다.
* * *
“어…… 대표님?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왜? 너라면 할 수 있잖아.”
<씨앤엘 코퍼레이션>의 최상층.
헌터 길드라기보다는 어느 대기업의 대표실처럼 꾸며 놓은 방이었다.
최세드릭은 맞은편에 앉은 대표, 이세인을 바라보았다.
한쪽으로 빗어 넘긴 머리카락, 고급스러운 티가 나는 정장, 성공한 사람다운 여유로운 미소.
분명 오랫동안 알던 사람인데도 오랜만에 만나서일까, 이세인이 유독 낯설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방금 한 말대로라면…….
“<백은 길드>는 건드리지 않기로 한 것 아니었어요?”
“그래, 그랬었지.”
생긋. 이세인이 웃었다.
몇 년 전, 다른 헌터들에게 얕보일 수는 없다며 거울을 보고 몇 번이나 연습한 그 미소였다.
“계획이 바뀌었을 뿐이야.”
“하지만 그러면…….”
“걱정하지 마. 위험한 일은 없을 거야. 넌 내 동생이나 마찬가지인데, 위험한 일을 시킬까.”
“…….”
“응, 세드릭?”
부드럽게 달래는 말투는 예전을 떠올리게 했다.
친남매는 아니다.
하지만 최세드릭의 C, 이세인의 L을 넣어 길드 이름을 지었을 때부터 그들은 가족만큼이나 끈끈한 사이가 되었다. 옛날엔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작은 건물에서 로나와 셋이서 지내기도 했는데. 까마득하게 멀게 느껴지는 과거의 향취가 그리움을 자극했다.
“알겠어, 누나.”
최세드릭은 위화감을 눌러 삼켰다.
그래, 이세인이 잘못된 지시를 할 리 없다. 이 거북한 감정은 그저 착각일 테다.
목표는 그때와 같다. <씨앤엘>을 최고의 길드로 만드는 것. 목표를 위해서라면 이해할 수 없는 지시라도 전부 따랐다. 변한 건 없다.
하지만…….
로나 이야기는 한 마디도 안 물어본 거 알아요,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