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이 시스템이 단순하게 기계적인 반응만을 하지 않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퀘스트나 보상을 제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놀리는 것 같기도 했다. 친근한 말투를 쓰는가 하면 어느 바이럴 블로그에서 긁어 온 듯한 텍스트를 띄울 때도 있었다.
‘사실은 안에 사람이 있다거나?’
아무리 그래도 이건 말도 안 되지, 음.
이 시스템이 내게 맞춰 반응한다면 의도가 뭔지 궁금했다. 이제까지 해를 끼친 적은 없었긴 한데 무작정 나를 돕는 것도 아닌 느낌이다.
‘아무튼 나를 던전에 처넣고 싶어 하는 건 확실한데.’
물론 절대 안 갈 거다. 나는 당장 저 불길한 퀘스트 창을 꺼 버렸다.
던전에 가느니 차라리 커피 노예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쌓인 주문을 처리했지만 오래지 않아 한계에 부딪쳤다.
체력이 다 떨어져 시스템 창에 빨간 불이 깜빡거렸기 때문이다. 거기다 커피 원두도 바닥을 보였다.
“죄송하지만 이제 영업 종료하겠습니다.”
“네? 벌써요?”
“여기, 루비를 열 배로 드릴 테니까 제발 더 팔아 주세요!”
“커피 원두가 다 떨어졌어요. 죄송해요. 재료가 들어오면 영업할게요.”
“그럼 레몬에이드라도 주세요!”
“그것도 다 떨어졌어요.”
“으아악!”
절망하는 손님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나니 손가락 하나 꿈쩍할 힘도 없었다.
나는 로스터에 생두를 넣고 반지의 힘으로 불을 붙였다. 그리고 커피가 볶아지는 냄새를 맡으며 테이블 위에 철퍼덕 엎어졌다.
“으으윽…….”
가정용 소형 로스터다 보니 한 번에 볶을 수 있는 커피의 양이 적었다. 이제까지는 그래도 괜찮았지만, 본격적으로 손님이 몰려들자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업소용 로스터를 살까? 마침 지난 퀘스트 보상으로 이공간 안에 빈 땅이 늘어났다. 거기다 설치하면 딱 좋을 것 같은데.
“퀘스트 보상으로 쓸데없는 거 말고 로스터나 주면 좋겠네…….”
나는 일부러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내 추측대로 이 시스템에 의지가 있다면 내 의견을 듣고 반영해 달라는 뜻에서였다.
“알겠지, 자동으로 돌아가는 로스터. 한 번에 많이 볶아지는 걸로. 이공간에 설치 가능하게.”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냐, 왜옭.”
“뀨우우…….”
옆에서 미음이와 라임이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크흠. 내 큰 뜻을 몰라보다니.
그러고 보니 아까 보상으로 웬 카페 테이블을 받았다. 그건 어떻게 쓰는 거지? 시스템 알림을 다시 읽어 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띠링, 하고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편안한 카페 테이블(★★☆☆☆)을 설치할 수 있습니다. 설치하시겠습니까?
네 / 아니오]
‘네’를 선택하자 희뿌연 빛이 반짝거리더니 카페 테이블이 변화했다.
상판은 짙은 갈색의 두꺼운 원목으로 되어 있었고, 따뜻한 분위기였다. 원래 있던 테이블보다 약간, 아주 약간 고급스러워 보이기는 했다.
[아이템: 편안한 카페 테이블(★★☆☆☆)
종류: 가구
나무로 만든 카페 테이블. 앉으면 약간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비고: 만족도 +1, 편안함 +1]
[더 많은 퀘스트를 클리어해 다양한 가구를 모아 보세요. 카페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습니다.]
“로스터를 줘…….”
[다양한 가구를 모아 보세요.]
[다양한 가구를 모아 보세요.]
그렇구나.
이 시스템은 내 말을 듣기는 하는데 듣고 싶은 말만 듣는구나…….
로스터보다 시급한 건 바로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사실 손님이 늘어나기 시작한 첫날 이미 구인 공고를 올렸다. 하지만 평균보다 좋은 조건을 내걸었는데도 위치가 위치인 탓에 지원자가 없었다. 기껏 온 연락도 던전 게이트 앞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거절했고.
“으음…….”
고민에 빠진 그때 다시 가게 문이 열렸다. 나는 테이블 위로 축 늘어뜨린 몸을 겨우 일으킨 뒤 말했다.
“죄송해요. 오늘은 재료가 떨어져서 영업 종료했어요…….”
“이런, 제가 늦은 모양이군요.”
방문자는 기유현이었다. 오늘은 쌍둥이와 함께가 아니라 혼자였다.
검은색 코트를 입고 살짝 긴 머리카락을 보기 좋게 넘긴 그는 텅 빈 가게와 넋 나간 나를 보고 상황을 짐작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
“유현 씨, 카페 아르바이트할 생각 없어요?”
“좋아요.”
“……네?”
“리을 씨의 카페에서 일할 수 있다면 영광이죠.”
진짜 좋다고 할 줄은 몰랐는데.
“그쪽 길드는 겸업 금지 같은 거 없어요?”
“없습니다.”
문득 회귀 전, 회사에 다닐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점심시간마다 가까운 곳에 있는 카페를 놔두고 꼭 건널목을 두 개 건너야 하는 먼 카페에서 커피를 사 오는 직원들이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먼 카페 아르바이트생이 잘생겨서라고 했다. 나도 궁금했는데 점심시간엔 밥 먹고 자느라 못 가 봤었지.
나는 기유현을 올려다본 채 잠시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해 보았다.
하얗게 빛나는 뺨, 균형 잡힌 이목구비, 긴 코트가 어울리는 길게 뻗은 팔다리, 그냥 쳐다보기만 해도 사연 있어 보이는 반짝거리는 눈동자.
그가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했다간 오히려 손님이 늘어날 것 같다.
“그냥 해 본 말이에요. 길드 소속 헌터를 아르바이트생으로 쓸 순 없죠.”
“그건 아쉽네요.”
“아하하…….”
그렇게 정말 슬픈 듯한 표정으로 보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여기에 노느라 바쁜 고양이와 슬라임만 있어서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 봤으면 오해할 법한 표정이니까.
나는 테이블 앞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기 앉으세요. 마실 거라도 드릴게요.”
“영업 종료하신 거 아니신가요?”
“그렇긴 한데…… 유현 씨 드릴 만큼은 있어요.”
다행히 원두를 담아 둔 상자 바닥에 딱 커피 두 잔을 내릴 만큼의 원두가 남아 있었다.
피로가 쌓이다 보니 단 음료를 마시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끝맛은 깔끔했으면 좋겠는데, 뭐 없을까.
아, 이거다. 마침 오늘 얻은 새 레시피에 적당한 레시피가 있었다.
“새 메뉴를 만들어 보려고요.”
“기대되는군요.”
다음은 재료인데…….
차원의 상점에 마침 필요한 재료가 있었다. 나는 A급 황금삼각뿔소의 우유로 만들었다는 생크림을 구입했다.
가장 먼저, 생크림에 설탕을 넣고 휘핑을 쳤다. 이 메뉴는 너무 묽지도 단단하지도 않게 적당한 점도를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휘핑기를 들었을 때 적당히 묵직한 느낌이 나면서 주르륵 흘러내리면 딱 맞았다.
다음으로는 잔에 에스프레소를 붓고 얼음과 물을 넣어 진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주었다. 그 위에 방금 만든 생크림을 부으면 끝이었다.
됐다, 아인슈페너가 완성되었다.
[아이템: 아인슈페너(★★★☆☆)
상태: 좋음 (남은 시간: 00:30:00)
효과: 한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체력과 기력이 회복된다. (1분당 10 포인트)
진하고 쌉쌀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위를 쫀쫀한 생크림이 덮었다. 유리잔 안에서 층을 이룬 모습은 눈으로 보기에도 좋았다.
당장 완성된 이 메뉴를 마셔 보기로 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크림이 먼저 입 안으로 들어왔다. 풍부한 우유 맛과 설탕 맛이 딱 기분 좋을 만큼의 단맛을 이루었다.
다음으로는 커피 맛. 진하게 내린 아메리카노가 크림 맛을 중화하면서 섬세한 맛의 변화를 이끌었다.
바로 이 맛이다.
달고 부드럽지만 끝맛은 깔끔한 맛.
의자에 늘어진 채 아인슈페너를 홀짝이자 힘이 났다. 아인슈페너의 효과로 바닥을 보였던 체력과 기력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흑, 이제 좀 살 것 같다…….
“정말 맛있습니다.”
기유현 역시 아인슈페너 잔을 들고 마셨다. 그 순간 머리 위로 반짝이는 빛의 막대가 차올랐다.
나는 잠시 그 모습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
오늘도 그렇고, 매일은 아니었지만 기유현은 자주 이곳에 와서 커피를 주문했다.
<청라 길드>와 던전 게이트 앞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틈만 나면 오는 것 같다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그렇다고 여기서 무슨 특별한 일을 하는 건 아니다. 커피를 마시며 일상 잡담이나 좀 하다가 돌아가는 게 전부였다.
그의 일상 잡담이라는 게…….
“길드원들은 오늘 하급 던전에 갔습니다. 저는 굳이 올 필요 없다고 해서 안 갔어요.”
안쓰럽거나.
“최세드릭 헌터와 던전을 가셨다고 하던데요.”
“표현이 이상한데요. 간 게 아니라 휘말린…….”
“아쉽네요. 저도 리을 씨와 함께 가고 싶었는데.”
“아니, 전 이제 죽었다 다시 살아나도 던전에 갈 생각 같은 건 없어요.”
어처구니없거나.
“새로운 S급을 놓쳐서 한이성 헌터가 많이 아쉬워했습니다. 지금 행방이 묘연하다던데, 혹시 아시나요?”
“글쎄요, 저는 잘, 아하하…….”
“신기합니다. 새로운 S급도 그렇고, 식물 던전도 그렇고. 과거와 다른 일에는 꼭 리을 씨가 얽혀 있군요.”
“네? 방금 뭐라고 하셨…….”
“……아무것도 아니에요.”
심문하는 것 같긴 했지만.
아무튼 그렇게 몇 번 본 단골이란 느낌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좀 달라졌다.
언제부터지.
“으음……. 음…….”
“리을 씨?”
“음…….”
퍼뜩 깨달음이 머리를 스쳤다.
아, 그때부터다.
그때.
이초록의 <해피 그린 라이프 농원>에서 정화목을 사서 돌아오는 길에 쌍둥이와 함께 있던 기유현과 마주친 이후.
정확히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이쪽을 쳐다보는 의미심장한 눈빛이며 부쩍 줄어든 거리감이 좀…….
“리을 씨.”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거리가 가까워 깜짝 놀랐다. 그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는 것만으로 너무나도 쉽게 내 주의를 끌었다. 빛을 머금은 눈이 나를 향하더니, 손에 서늘한 감촉이 닿는다.
“손에, 가루가 묻어 있어서요.”
“……아.”
젖은 손에 커피 가루가 묻어 있었다. 기유현이 티슈를 집어 내 손을 가볍게 닦아 냈다.
용건은 그것뿐이었다는 듯 손은 금방 떨어졌지만, 여전히 거리는 가깝다.
뭘까. 보통이라면 기유현에게 무슨 다른 뜻이 있나 생각했을 거다.
마침 어제 친구 신미라에게 카톡이 와서 물어보기도 했다.
[나: 요새 가게에 매일 오는 손님이 있는데]
[신미라: 고정 수입 개꿀이네]
응, 그건 그렇지…….
좋아,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물어보자.
“유현 씨는 커피를 엄청 좋아하시나 봐요.”
대놓고 물어본다고는 안 했다. 그렇지만 왜 매일 오냐고 물어보면 좀…… 그렇잖아.
“리을 씨의 커피는 맛있으니까요.”
커피가 맛있기는 한데.
“그리고…….”
기유현은 말끝을 흐리며 잠시 고민했다. 적당한 말을 고르는 모습이었다.
그때 불쑥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있던 미음이가 끼어들었다.
“왜오옹, 왜옹(이 인간, 맛을 거의 느끼지 못할 거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